소설리스트

〈 79화 〉79. (외전) 먼 바다에 있는 낙원(2) (79/145)



〈 79화 〉79. (외전) 먼 바다에 있는 낙원(2)

“너 진짜 유나 언니 몰라? 어떻게 한국 남자면서 차수진을 모를 수 있어!”
“꼭 알아야 돼?”

진짜 모르는 걸 어떡해. 난 하리랑 같이  때 아니면 TV도 잘  본다구.

“이그! 제이 군, 이 바보야!”

미유키가 답답하다는 듯 마구 물장구를 치며 성을 냈다.

“우리 유나 언니가 얼마나 예쁜데! 몸매도 엄청나다구! J컵이야 J컵! 뭐, 우리 일본 컵 기준이니까 한국으로 치면H나 I컵 정도겠지만.”
“…그, 그래.”
“참고로 나는 C컵이야. 대신 모양이 예쁘다고 유나 언니가 칭찬해줬어.”
“…….”

민망해서 말이  나왔다.
내가 오늘 처음 만난 여자랑 가슴 얘기나 하고 있다니.

더구나 J컵? 그게 얼마나 큰 건데?
C컵이라는 미유키도 꼬꼬마 하리랑은 비교도 안 될 것 같다.

나는 감이 전혀 오지 않아서 미유키 누나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흐응, 그렇구나. 설마 했는데.”

그녀가 뭔가를 알았다는 듯 지긋이 나를 보다가, 어깨를 짚어왔다.

“좋아. 제이 너, 비밀 지킬 수 있어? 비밀 지켜주면 내가 유나 언니 보게 해줄게. 지금 당장.”
“무슨 비밀인데  지켜야 돼?”
“큭큭!  귀여운 녀석아! 아까 그거는 진짜 장난이고!”

미유키가 죽는다고 웃어댔다.

“이번에는 정말 비밀이야.만약에 니가 비밀 못 지키면,  소속사 사장님이랑 학교 쌤들한테 다 혼나. 정말루.”
“그럼 괜찮아. 말해주지 마.”
“얌마! 너 진짜 이럴 거야?!”

나는 정말 몰라도 상관없는데.
미유키 누나가 괜히 험상궂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폴거리는 남색 교복치마 안으로 매끈한 허벅지와 수영복 아랫부분이 훤히 보였다.

‘이씨…. 창피한 줄도 모르나.’

고개를 푹 숙이고 손수건을 꺼내 발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있자.
미유키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과장된 희극 투로 선언했다.

“제이 군! 빨리 준비하도록! 지금부터 제이 군은 이 미야기 미유키님의 우상을 보러 가는 거야! 알겠나?”
“…괜찮다니까.”
“알.겠.냐.고?!”

눈을 감아 보아도 시선을 피해도.
계속해서 아른거리는 미유키의 허벅지 다리와 수영복 때문에.
나는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유나인지 유난인지 누나 알아서 해!

**

우리가 향한 곳은 세소코 여중 바로 옆에 있는 세소코 여자고등학교였다.

“어머. 미유키잖아?  누구야? …되게… 귀엽게 생겼다. 사촌 동생이니?”
“사촌이라뇨.”

미유키가  손에 깍지를 껴며 턱을 치켜 올렸다.

“남친이에요.”

나는 ‘저 누나 남친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미유키가 크게 창피해할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하! 꼬마 남친님 무지 잘생겼네.”
“콘돔 떨어졌으면 얘기해. 실내 수영장  라커에 있어. 많이 쓰진 말고.”
“미유키, 데이트 잘 해. 안 본 걸로 해줄 테니까 쥰페이 걱정은 말고~!”
“걔랑 아.무.사.이.아.니.거.든.요~?”

방학인데도 학교에 있는 고등부 누나들이 까르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미유키가 그녀만큼이나 치마가 무척이나 짧은 그 누나들의 뒷모습을 째려보았다.

“아줌마들이 별꼴이야. 쇼타콘도 아니고. 꿈 깨시지? 제이는 내 버디니까.”
“쇼타콘? 그게 뭔데.”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제이 빨리 가자.아…. 후문에서 마실 거 사서 가자. 제이 너 라무네라고 안 먹어봤지?”
“응.”
“일본식 스프라이트 같은 거야. 내가 사줄게.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나 정산금 들어와서 돈 디게 많아? 우리 소속사 사장님이 페이를 많이 주시거든.”

미유키가 세소코 여중에 있을 때보다 훨씬 친근하게 굴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아깐 너무 고마워. 내가 남친이라고 했을 때 날 감싸줬잖아. …미유키, 제이한테진심이 될 지도 모르겠는데?”
“…우리 빨리 슈퍼 가자.”

나는 쑥스럽기도 하고, 그녀가 너무 고맙기도 했고… 그리고….

‘아…. 뭔가… 이상… 해.’

어쩐지 모르게 심장이랑, 아랫배랑, 꼬츄가 간질간질한 것 같은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야, 라무네는 입에 맞아?”
“정말 맛있어. 너무 고마워, 미유키. 그리고 음료수는 내가 들게.”
“에에에? 너도 한국 남자 맞구나! 나 이런 배려 처음 받아봐.”
“…빨리 줘.”
“히히! 제이 군은 진짜 천사야.”

나는 미유키가 사준 라무네라는 음료수를 마시면서, 목적지인 3학년 교실로 갔다.
라무네는 솔직히 별로 맛이 없었는데, 맛없다고 하면 내가 너무 싸가지 없는 것 같아서 엄청 맛있는 척을 했다.

“여기야.”

미유키가 3학년 D반이라고 적힌 교실 앞에서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

“이제부턴 조용해야 돼. 알겠지?”
“응.”

교실 앞문과 뒷문에는 엄청 긴 케이블들이 뻗어 나와 옆 교실까지 이어져 있었다.
힐끔 안을 보니 많은 카메라들과 사람들이 안에서 누군가를 막 찍고 있었다.

―파삭!

그때, 미유키가 바닥에 놓여있던 은색 판을 밟아버렸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고 있던 촬영장에 그 소리가  들려버렸다.

“누구야?! 누가 조명판 밟았어!”
“죄송합니다! 감독님, 저에요!”
“뭐야, 미야기구나.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해.”
“아하하….”

미야기 미유키가 어색한 얼굴로 단발머리를 긁적였다.
교실에서 촬영 중이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우리에게 쏠렸다.


“미유키? 우리 미유미유 왔니.”

그녀를 발견한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어?!  사람!’

입이 떡 벌어졌다.

―라라라라라라라라~♪

왜냐하면, 지금 환한 미소를 머금고 미유키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는 여자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라라라라라라라라~♪

너무나 익숙한 이온 음료 배경음악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흘렀다.
지금도 TV를틀면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광고 속에 나오는 바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유나!'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아니지, 사람은 맞나?

세상에서 우리 하리만큼 예쁜 사람이 있을 거라고 단 한 번도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와아, 지인짜… 예쁘다…….’

허리 위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가 샴푸 광고에서 막 나온것처럼 찰랑거렸다.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는 얼굴은 TV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현실 같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세소코 여고 세일러복은 무척 짧고 몸에  붙어 있었는데, 미유키나 다른 고등부 누나들보다 어쩐지 더… 더… 막 그랬다.

촬영장 한 가운데에서 따가운 조명과 카메라 플래시를 받고 있던  여자는.
천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너무 예쁘고 아름답고… 그리고…….

‘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애……!’

친구들 어깨너머로 본 야한 자료들에 나오는  누구보다도훨씬 어른스러운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165cm인 신유수보다  커 보이는 키 때문인지 하나도 둔해보이지는 않았지만, 너무… 으으… 몸매가… 그랬다.

“미유키. 왔으면 들어오지 않구.”

유나라는 연예인 이름을 쓰는 여자가 아침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미유키의 볼을 정답게 쓰다듬었다.

“언니…. 방해될까봐 그랬죠.”
“우리 미유미유가 이렇게 마실 것도 사왔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유나 누―.

‘…….’


나는 저 여자를 누나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

그리고 그 감정을 품은 순간.

눈앞에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 단일 개체한정 시동]


미유키가 잡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 이상한 글자는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음?”

그때, 쑥스러움을 타는 미유키를 달래주던 유나라는 여자가 나를 향해.

“우리 친구는 누구… 니?”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거의 수직으로 들었다.

야구 모자를 벗고, 그녀의 깊고 크고 예쁜 눈을 보면서 대답했다.

“제이. 김제이에요.”
“…그래? 나는 유나라고 해.”
“안녕하세요.”
“…….”

유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옅은 분홍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다가.

봄 햇살보다 더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응. 만나서 정말 반가워, 제이야.”

**


―찰칵! 찰칵찰칵찰칵

나와 미유키는 유나의 촬영현장 구석에서 조용히 그녀를 구경했다.
촬영 스태프 아저씨들과 누나들이, 세소코 여고 교복을입고 있는 그녀를 이렇게 저렇게 찍어댔다.

“어때? 우리 언니 진짜 예쁘지.”

미유키가 당연한 사실을물었다.
유나는 내가 태어나 본 사람 중 가장 예뻤다.
하지만 나는 하리가 같은 질문을 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것과 완전 똑같이 말해주었다.

“별로. 니가 훨씬 예뻐.”
“…히히, 거짓말쟁이.”

미유키 누나는 기분이 좋은지,  무릎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아까 수영장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5분  쉬었다 가겠습니다!”

촬영이 잠시 멈췄다.

뜨거운 카메라 조명 때문에 땀이 났는지, 유나가 화장을 새로 받아야했기 때문이었다.

“미유미유랑 제이랑 사이가 참 좋네?”

그녀가 의자에 앉아 우리 쪽을 보며 생긋 웃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게―”

“당연하죠! 제이 군은 제 버디거든요. 제가3박 4일 간 챙겨줄 거예요!”
“어머~ 잘 어울린다. 완전 풋풋한 연상연하 커플 같애.”
“그러게. 지금까지는 미야기가 나이보다 성숙해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같은 중학생인 김 군이랑 있으니까 이제야 15살 같다. 보고만 있어도 예뻐.”

스태프들이 우리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고, 미유키가 꺄악 꺄악 소리를 내면서 나를 껴안았다.
말할 타이밍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안 되는데….’

뭐가안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미유키를 창피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 여기 봐봐, 사진 찍어줄게.”
“제이 군 정말… 너무… 귀엽다. 우리 집에 데려가서 같이 살고 싶어.”
“미야기 얼굴 빨개진 거 봐! 쟤 제이 군 진짜 좋아하본데?”
“코디 언니이이!”
“하하하하! 미야기,  조심해라! 어릴  스캔들 나면 이미지 복구 힘들어~.”

아저씨랑 누나들이 나와 미유키를 놀렸다. 미유키는 무척 쑥스러워하면서도 내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하아…….’

나는 울고 싶어졌다.
창피해서가아니다.
어딜 가든 따라오는  껌딱지 하리 때문에 이런 일은자주 경험했으니까.

단지….

“응! 저엉말 정말 잘 어울리네.”

유나.

한결같은 웃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그녀의 예쁜 눈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손에서 짙은 땀이 나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찰칵! 찰칵!

나와 미유키를 찍는 사진사 아저씨가 완전  받으셨는지, 오버를 했다.

“미유키, 제이 군! 둘이 뽀뽀해봐!”
“에에에…?”
“뭐 어때,  다 어리잖아. 나중에 사진 보고 누가 물어보면 제이 군은 소학생이라고 하고. …읏짜!”

아저씨가 책상 위에 올라가 제대로  자세까지 취하시며 우릴 재촉했다.

“지금 구도 되게 좋거든? 사물함 위에 앉아 있는 어린 커플! 딱 좋아!”
“……제이야.”

미유키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유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장을 해주던 메이크업 누나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에? 유나 상. 거의 다 됐는데.”
“아하하! 죄송해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녀가 메이크업 누나를 살짝 껴안아준 뒤 교실을 나갔다.

‘안 돼!’

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생각을 했다.

“저, 저도! 화장실  다녀올게요.”
“…응? 그러렴. 남자는 1층이야. 교무원 화장실. 빨리 와? 아저씨랑 미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재빨리 복도로 나갔다.

매앰매앰. 바보 같은 매미 소리가 서늘한 여자고등학교 복도에 울렸다.

짧고 딱 붙는, 그럼에도 청순해 보이는 세일러 교복을 입은 유나가.
창가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타악 타악

맨발에 신은 유나의 하얀색 실내화가  여름의 여고 복도 바닥을 때렸다.
무척 경쾌하지만 어쩐지… 듣기좋지 않은 고무 마찰 소리가 울렸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불편한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타악 타악

유나는 같은 층에 있는 학생용 화장실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을 타고 1층까지 내려갔다.

“…….”

4층에서 1층까지.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목적지(?)인 교무원용 남자 화장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랬다.

―타악

유나가 때가 하나도 안 묻은 새하얀 실내화를 곱게 붙이며 멈춰 섰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가니?”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화장실 가려고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
무작정 그녀를 따라온 거였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 가려고 온 거. 아니었어?”
“네.”

유나가 몸을 돌렸다.
너무 크고 이상야릇한 그녀의 가슴이  머리 위에 사알짝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녀가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아.’

코앞에서 본 그녀는 너무 많이 아름다웠다.
꼬맹이인 나만큼이나 작은 저 조막만한 얼굴에 저 예쁜 눈 코  귀가 다 붙어 있다니.
연예인 화장 때문인지, 하리나 미유키와는 비교가  될 정도로 성숙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제이야.”
“…네.”
“그러엄?”

유나가 찰랑이는 생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녀가 윗니로 분홍색 아랫입술을 아주 살짝 문 뒤에, 물어봤다.

“그럼? 왜애… 교실에서 나온 건데?”
“…죄송… 해서요.”
“뭐가아?”

나는 울 것 같았다.
글썽글썽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을 나도 모르게 살짝 껴안았다.

“죄송… 해요. 죄송해요… 미유키랑 친하게 안 지낼 게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래야  것 같았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유나는 내 행동을 싫어하지 않는  같았다.

―토닥 토닥

그녀는 내 울음기가 잦아들 때까지 내 등을 포근히 쓰다듬어주었으니까.

유나의 얼굴을 놓아주자.

그녀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는. 봐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알했어, 라이코스.”

그녀가, 그제야 웃었다.



애욕의 화신 lv.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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