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80. (외전) 먼 바다에 있는 낙원(3)
“우리 미유키랑 친하게 지내줘.”
화를 푼 유나가 내게 한 말이었다.
“대신 너무 많이 친해지진 말구.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아까처럼 사귀는 사이라고 보일 정도로 행동하지는 말라는 뜻 같았다.
반드시 그렇게 할 거라고 결심했다.
“이제 가자. 모두 기다리시겠어.”
유나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일어났다.
희고 고운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파고들었다.
꼬옥 쥔 손을 들고 그녀가 웃었다.
“제이 손 크네? 나랑 비슷할 정도야.”
“…발도 큰데.”
“정말?”
“네.”
나는 133cm의 키에 비해서 손발이 큰 편이었다. 그래서 원장님이 늘 ‘사춘기가 되면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클 거야.’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럼 금방 비슷해지겠다.”
유나가 ‘라라라라라라라라’ 노래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그녀의 말에 너무 설레기도 하고, 행복하고, 또 걱정되기도 했다.
“…키 큰 게… 좋으세요?”
“아니.”
“거짓말.”
“아닌데?”
3층과 4층의 계단 사이였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유나가 허리를 굽히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제이가 커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기뻤던 거야.”
그렇게 말했다.
‘천사… 인가?’
세상에 이렇게 착한 식으로 생각을 하는 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나는 그녀의 눈을 빠져들 것처럼 바라보다가, 불현 듯 느낀 아주 이상한 느낌에 황급히 얼굴을 뗐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네. 빠, 빨리 가요.”
나는 손을 당겨 그녀를 재촉했다.
내 몸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꼬추가… 커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야한 것 따윈 안 본다.
머저리가 아니니까.
반 애들은 맨날 야한 것만 보고, 고추가 커지는 걸 농담처럼 얘기하곤 한다.
‘이거 지금 왜 이러는 거야?!’
그런데 지금 내 고추가, 이상할 정도로 빳빳해지려고 하고 있었던 거다.
‘…….’
갑자기 방금 전 유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이가 커지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기뻤던 거야.
김제이 이 미친놈!
천사 같은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해?
‘유나가 천사면… 나는 악마야.’
나는 그렇게 자책하며 유나와 함께 촬영장으로 되돌아갔다.
**
세소코 여중 탐방이 끝난 뒤.
숙소인 료칸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
090-3809-1004 by 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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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게 준 일본 휴대전화 번호를 보고 또 보고 있어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라라라라라라라라♪
료칸 방에 있는 브라운관 TV속.
하얀 원피스를 입은 유나가 나온다.
“어?! 차수진이다! 일본에도 나오네!”
“와, 역시 개쩐다 씨발. 존나 예뻐.”
“벗어라, 벗어~! 원피스가 뭐야아!”
같은 방 애들이 난리법석을 피우며 TV 앞에 모여 앉았다.
나는 유나가 내 손에 꼭 쥐어준 쪽지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으며 멍한 눈으로 화면 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나한테 번호를 줬어.’
게다가 꼭 전화하라고 했다.
안 하면 화낼 거라고도 말했고.
전화 못 받으면, 잠도 안 잘 거라고.
‘…유나…….’
나는 또 다시 헤실헤실 거렸다.
“킹제이 너 아까부터 왜 그러냐.”
개가 짓나? 왜 자꾸 나를 꿈에서 깨게 하려고 하는 거지.
“야 이 새끼야.내 말 왜 자꾸 씹어.”
퍽퍽. 매서운 주먹이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별로 아프지 않았다.
바보처럼 웃음만 나왔다.
“…진짜 맛탱이 갔네? 더위 먹었나.”
“야 나와 봐.”
“어어, 윤수야.”
신윤수가 눈을 가자미처럼 뜨고 뚱한 얼굴을 했다.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명치를 쿡쿡 찔렀다.
“킹제이 개스키야. 너 미유키랑 무슨 일 있었어. 빨리 불어.”
“…미유키? 아무것도 없었어.”
사실은 있었다.
미유키가 이메일 어드레스를 ―일본은 문자 대신 폰으로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되게 이상해― 주고 가기도 했고, 헤어지기 전에 ‘오늘 밤에 또 보자?’ 라고 하면서 뽀뽀도 해줬으니깐.
하지만 그걸 말하면나는 사망이다.
“개소리 말고 씹새야! 빨리 말해!”
“아! 아아! 미친 새끼야! 하지 마아!”
신윤수가 헤드락을 걸면서 나를 고문했다.
“야! 니들 빨리 킹제이 옷 벗겨.”
“큭큭큭! 수치 플레이 가자!”
“야아아아!! 이 씨발롬들아!!”
“내가 다리 잡을게 큭큭! 씨바새끼, 버디 구할 때 10명이나 줄 섰더라?너 오늘 죽어봐 하렘왕 왕자지 새끼야!”
“하지 말라고오오!!”
욕하고 소리치고 발버둥을 쳐도, 133cm인 나보다 덩치 크고 힘 센 놈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일본 전통 옷인 유카타인지 뭔지, 샤워 가운 같은 옷을 입은 탓에 금새 팬티만 입은 모습이 됐다.
“하지! 마, 마아!”
“하아…씨발넘 깡만 쎄가지고. 그니까 빨리 말해! 팬티 진짜 벗긴다?!”
신윤수가 내 볼을 꽉꽉 누르며 협박했다.
“너 킹자지 복도 앞에서 자랑하고 싶냐? 그럼 말 안 해도 되고.”
“…….”
신윤수는 울 학교 1학년 통인최진현과 달리 장난의 정도를 아는 애다.
하지만 빡돌면 그 새끼가 그 새끼.
윤수는 4월 달에 2학년 선배 한 명의 눈깔을 깨트려서 일주일 간 정학을 당한 적도 있었다….
“…미유키가 번호를 줬어. 이메일.”
“이메일? 진짜?”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가리켰다.
“메모는 저 안에 있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애들이 우르르 가방을 뒤져서 쪽지를 찾아냈다.
“와, 진짜네? 이메일이잖아. …헐? 주소가 무슨 소속사 회사 메일 같은데.”
“윤수야 맞다니까. 그 누나 그라비아 모델 맞아. 차수진이랑 같은 소속사.”
“그, 그라비아?!”
‘그라비아’라는 말에 애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멍청이들. 야한 건 더럽게 밝혀요.
“지하 온천문 옆에 컴터실 있던데.”
“휴게실 말하는 거지. 가보자!”
“메일을 보내자~ 그라비아 모델한테!”
흥분한 놈들이 휴게실로 몰려갔다.
나는 나중에 저 새끼들이 또 같은 장난을 칠까봐, 유카타를 벗고 평범한 옷을 입으며 욕을 마구 내뱉었다.
“등신 또라이 얼간이들!”
머저리들인가.
어차피 저녁 먹고 나서 마을 축제 구경할 때 또 만나게 되는데, 뭐 하러 지금 이메일을 보내.
그리고 컴퓨터실? 그런 델 왜 가.
스마트폰을 쓰면 되지.
[▶미추출 권능 의 영향을 자의로 허가합니다.]
“…응?”
방 안에 여름 날벌레가 몇 마리 있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스마트폰? 이름은 그럴싸하네. 그치만 내가생각한 거라도 너무 오바야.’
전화도되고 동영상도 찍고, 랜선 없이 인터넷도 하고, 노트북보다 훨씬 성능 좋은 초소형 이동식 컴퓨터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200X년인 현재,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휴대폰이 나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뭘. 그리고사진이라고 해봐야,디카에 비하면 화질이 훠얼씬 꾸졌다.
‘그치만 조만간 유로파 외계인들이 미래 기술을 전수해준다고 했어. 그럼 그런 기계가 조만간 나올 수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카타 주머니에 든 유나의 쪽지를 입 안에 삼켰다.
꿀꺽.
번호야 이미 외웠으니 상관없지만.
동글동글한 유나의 글씨를 평생 보물로 간직하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절대 안 뺏길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나는.
유나만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기 싫다.
‘유나는… 안 돼.’
**
오키나와 탐방 첫날인 오늘 밤.
식사를 마치고 축제 참가 일정을 준비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정말 미안하다 얘들아.”
몇 시간 전, 담임 선생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지금 당장 귀국하셔야만 했다.
“미안하구나. 선생님이 외아들이라.”
“쌤. 저희는 괜찮아요.”
“맞아요! 다나카 쌤이 계시잖아요.”
“많이 가슴 아프시겠어요, 선생님….”
우리들은 쌤을 위로해드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다나카 졸라 널럴해 보이지 않냐?”
“어,큭큭. 꼰대 담임보다 훨씬.”
“개착하던데? 뭐라고 하지도 않고.”
다나카 선생님.
세소코 여중 교사이자 우리 문화교류 탐방 팀의 일본 측 담당자인 분이시다.
그 분은 딱 봐도엄청 물러보였다.
학생주임인 담임 쌤과 완전 딴판.
“사고 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나카 선생님 말씀 꼭 듣고. 특히 최진현.”
“네!”
“니가 반장이니까 부반장 윤수랑 같이 책임지고 애들 단속해. 알겠지?”
“네.”
“아침저녁으로 전화할거야. 마지막 날에는 귀국 도와주실 쌤도 오실 거고. 그날까지 절대 사고 치지 마. 알겠지?”
“네에~! 걱정 마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쌤!”
담임 쌤이 택시를 타고 사라지신 뒤.
다나카 쌤이 부처님 같은 얼굴로 우리들을 다독이셨다.
“자아! 자곡제일중 학생들. 남은 3박 4일 동안 걱정 말렴. 선생님이랑 우리 세소코 학생들이랑 재밌게 보내자?”
“와아아아아아!”
우리는 신이 났다.
모친상을 당하신 담임 쌤에겐 죄송하지만. 감시자인 담임 쌤이 없으니, 훨씬 홀가분한 기분이 됐던 거다.
“자! 이 거리에서부터 신사까지 마츠리가 시작됩니다. 버디랑 같이 짝을 지어서 자유롭게 탐방해보세요. 대신 마츠리 장소를 넘어가면 안 된다?”
“네!”
다나카 쌤의 인솔 하에, 우리는 세소코 여중 애들과 여름 축제를 즐겼다.
물론, 나는 미야기 미유키와 함께.
“제이야! 이 옷 어때?”
“예쁘다. 일본 옷이야?”
“응! 여자용 유카타. 제이 군 보려주려고 입고 왔지~!”
미유키가 노란색 일본 전통옷을 입고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 모습이 예뻐서, 주변의 반 애들이 나를 질투 섞인 눈으로 째려봤다.
타이라 엘라를 빼면, 유카타를 입은 여학생이 한 명도 없어서 더 그랬다.
“제이야 우리 뭐할래? 링고아메 먹을까? 제이 군은 사탕 좋아하니?”
미유키가 내 손을 꼭 잡고 맛있는 ―솔직히 입에안 맞았다. 일본 음식은 너무 달고 짰다― 축제 음식들을 사주었다.
나는 그녀가 나 때문에 너무 돈을 많이쓰는 것 같아서, 미유키가 귀엽다고 했던 사자 인형을 사주었다.
“미, 미유키 이거.”
“에에에? 그게뭐야?”
“선물….”
“너무해, 너무해! 제이야, 어떡하지. 나 너무 행복해….”
수영을 하다 그을린 미유키의 건강하고 귀여운 얼굴이 빨개졌다. 내 손을 쥔 그녀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안 돼. 여기서 더 친해지면 안 돼!’
나는 낮에 유나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묘해진 분위기를깨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자꾸만 달라붙는 미유키 때문에 나는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미유키 선배.”
축제가 벌어지는 길목을 지나.
‘신사’라는 일본 절로 가던 중이었다.
“어? 엘라구나.”
타이라 엘라 平良エラ.
밀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밝은 갈색머리와 예쁜혼혈 얼굴이 인상적인 1학년여학생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뜬금없지만, 나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엘라의 하얀 유카타가 그녀와 약간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야? 니 버디는 어디 갔니.”
“축제를 구경하던 중에 갈라졌어요.”
“…갈라져? 니가 일부러 떼놓고 온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구요.”
엘라가 나를 힐끔 봤다.
참고로 아까 ‘버디 찾기’에서 그녀는 나를 골랐었다.
“저도 선배들이랑 같이 가도 될까요?”
“아니. 따로 가자.”
미유키가 쌀쌀맞게 거절했다.
예의를 중시한다는 일본 사람 답지 않게, 그것도 하급생을 상대로. 아주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이거든.”
“글쎄.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요.”
“뭐라구?”
미유키가 인상을 쓰며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약간 아프기까지 할 정도로.
“하세요, 데이트. 방해 안 할 테니까.”
타이라 엘라가 양 손으로 손가방을 든 차분한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를 기어코 따라오겠다는 느낌이 드는 분위기였다.
“…1학년 주제에. 제이야, 가자!”
미유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타이라 엘라가 조용히 우리를 따랐다.
“제이 군, 거기 서 봐.옳지! 너무 잘생겼다. 우리 거기서 사진 찍자~.”
미유키는 엘라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하지만 엘라는 그녀의 예쁜 외모와 독특한 분위기처럼, 보통 애가 아닌 것 같았다.
“제가 찍어드리죠.”
“됐거든? 나도 디카로 셀카 잘해.”
“그래봐야 남이 찍어주는 사진만 하겠어요?”
“야, 너! 보자보자 하니까―”
미유키가 크게 성질을 부리려 했다.
나는 마침 미유키가 나한테 너무 친근하게 구는 게 부담스럽기도 해서, 디카를 엘라에게 건넸다.
“엘라 고마워, 부탁할게.”
카메라를 받아든 엘라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지그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미유키가 터져버렸다.
“야! 너 뭐해?! 제이가 카메라를 줬으면 빨리 찍고 꺼져! 방해자 주제에 지금 뭐하는 거야?!”
“하나. 둘. 셋.”
엘라가 미유키를 무시했다.
―찰칵 찰칵
그녀가 정말 성의 없는 태도로 사진을 찍은 뒤, 나에게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제이야.”
“…어.”
“내일부터는 나랑 버디를 하는 게 어때?”
당연히 미유키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으으으! 너 진짜아!”
“미, 미유키 참아! 내 버디는 너야!”
“너 이리 와! 이 앙큼한 1학년 꼬마! 내가 니 버릇을 고쳐주겠어! 운동부 선배 무서운 줄 모르고, 앙?!”
내가 흥분한 미유키를 말리는 사이.
타이라 엘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며 나를 돌아봤다.
“기대할게.”
포말의 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