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82. (외전) 먼 바다에 있는 낙원(5)
“안녕?”
유나가 해님처럼 환하게 웃으며 쑥스럽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제이… 보러 왔어.”
하늘을 날 것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울 것 같았다.
“…….”
나는 입술만 삐죽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유나가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그럼. 나 안 반가워?”
“…….”
아주 반가웠다.
근데, 너무 너무 많이 반가워서 오히려 반갑지가 않았다.
내가 작고 볼품없어서.
“…그냥요.”
“왜?”
“보고 싶었는데….”
“으응. 싶었는데?”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유나가 내게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에에?”
지하로 내려오던 아줌마가 우리를 멀뚱멀뚱 보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유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안고 있었던 것을 들킨 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리 와볼래?”
그녀가 나를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동전을 넣어 작동하는 컴퓨터가 놓인 곳이 아니라, 여자들이 잠을 자는 여성 휴게실로.
―철컥
문닫히는 소리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유나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하얀 원피스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이리 와.”
“…….”
“얼르은.”
“…….”
“응, 예쁘다.”
그녀가 다리 사이로 나를 품고, 내 등을 감싸 안아주었다.
무지무지커다랗고 포근한 가슴이 내 가슴에 닿아서 엄청 찌그러졌다.
유나가 오똑한 코로 내 코를 문지르고, 내 볼에 아주 부드럽게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죄송해요.”
“뭐가?”
“그냥 다.”
유나가 눈과 눈 사이를 찌푸렸다.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왜요?”
그녀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손가락을들어 내 입을 세로로 막았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까.”
아…….
좋아하는… 사람 ‘들’…….
“…유나도 내가 좋아요?”
“그러엄.”
“얼만큼?”
유나가 아주 아름답게 웃었다.
그녀의 볼이 바알갛게 달아올랐다.
“비이밀.”
나는 그녀의 입에 내 입술을 댔다.
유나가 너무 많이 예뻐서 그랬다.
“!”
깜짝 놀란 그녀가 잠깐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아까 그랬던 것처럼 내 등을 쓸어주었다.
입술로는 내 입술을 오물오물 아가처럼 씹어주면서.
―쪼옥
짧은 뽀…. …키… 키스가 끝났다.
나처럼 눈을 꼭 감고 있던 유나가, 별빛이 쏟아지는 검은 눈동자를 깜박이면서 내 볼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제이야.”
“네.”
“정말로 내가 미유미유보다 안 예뻐?”
아… 어제 우리 얘기를 들었구나.
“아니요.”
“치.”
“유나가 우주에서 제일 예뻐요.”
“…정말요?”
나는 유나의 가늘고 긴 목을 잡고 그녀의 이마와 볼과 코와 입술에 입을 맞췄다.
“…….”
아까보다 훨씬 얼굴이 빨개진 유나가.
“정말… 인가보네.”
우주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
첫 키스.
유나는 아까 아침에 료칸 지하 휴게실에서 했던 키스가 첫 키스라고 했다.
―저두요.
나는 꼬꼬마 하리랑 자주 해왔던 뽀뽀는키스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이 그랬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엄마 아빠랑 한 뽀뽀를 첫 키스라고 안 치잖아.
―그럼 제이랑 나랑 똑같네?
―기분이 좋아요.
―…나두요. 정말 행복해….
유나는 자신의 첫키스와 내 첫 키스를 교환한 것이 너무 설렌다고 했다.
―제이한테서 레몬 향기가 났어.
그녀는 내 입술에서 시고 쩡한 레몬 맛이 아니라, 설탕을 많이 부어 달콤한 레모네이드 같은향기가 났다고 했다.
―유나는 체리 향기가 났어요.
―체리향 립글로스를 발라서 그래.
―…….
―아하하하! 정말 너무 귀여워!
유나는 부끄러움을 타면서도 그런 농담을 했다. 그러면서 나를 한참동안 껴안고, 허벅지 위에 앉힌 뒤에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나 어쩌면 좋지. 제이가 너무 좋아요. 마음이 하나도 주체가 안 돼.
―저두요. 가슴이, 이상… 해요.
―어떡해… 안고 있는데도 안고 싶어요. 닿고 있는 데도 더 가까이 원해.
그녀 눈에 천국이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꿀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우리의 정다운 시간을 끝낸 사람은 휴게실로 들어온 외부인이 아니었다.
이른 오전이라그런지 여자 휴게실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제이야. 왜 그래?
―…타, 탐방을…… 가야 돼서.
범인은 나였다.
탐방을 가야한다는 핑계로유나의 부드러운 허벅지에서 엉덩이를 뗐다.
―…….
고추가… 커져버려서…… 그랬다.
유카타 아랫부분이 꼴사납게 튀어나온 몰골로 계속 그녀 옆에 있기 창피했다.
어른 것인 유카타가 너무 헐렁해서, 이따금 아주아주 커진 고추가 갈리진 옷 사이로 툭 하니 튀어나오기도 했다.
―…….
유나도 내 몸의 변화를 알았다.
그녀가 눈을 아래로 깔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조용히 말했다.
―…잘…… 다녀와….
그렇게, 바보 같은 내가.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를 망쳐버렸다.
**
유나와의 행복했던 아침 데이트가 머저리 같은 나 때문에 엉망이 된 뒤.
나는 오키나와 국제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탐방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이야~! 나 왔지롱! 오늘은 친구들 데리고 왔어.”
그나마 슈리성에서 미유키와 만나 늦게나마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아~ 서로 인사해. 진현, 윤수! 이쪽이 레나고, 이쪽이 아유미. 수영부 후배들이야. 둘 다 무지 예쁘지?”
“안녕하세요. 니가 진현 군이구나? 잘 생겼다. 나랑 아유미는 2학년이야.”
“윤수야 반가워! 우리 재밌게 놀자.”
최진현과 신윤수.
이 또라이들이 왜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서 나한테 살갑게 굴었는지 알았다.
미유키가 여자들을 데려온 거다.
그것도 자기 못지않은 예쁜 누나들로.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메일 주고받더니 저 얘기를 한 거였구나.’
갑자기 나타난 미모의 여자들 때문에 최진현과 신윤수의 인중이 길어졌다.
원숭이 같은 놈들.
“안녕! 난 진이라고 해. 키랑 얼굴은 삭았지만 이래봬도 아직 1학년이라구?”
“아유미 누나 반가워. 난 윤! 미유키의 버디인 우리 제이랑 절친이야.”
우리 여섯은 슈리성 탐방을 시작으로 오후 일정을 모두 함께 소화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방문한 과일랜드 같은 곳에서도 모두 함께였다.
―부우우우웅
세소코 섬으로 돌아오는버스안.
미유키 누나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미유키 고마워.”
“뭐가?”
“나 때문에 괜히누나 친구들까지 데려온 거 같아서. …아니야?”
미유키의 예쁘게 그을린 볼에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몰라? 미유미유는 제이 군이 무슨 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나는 미유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녀는 그라비아 모델에다 외향적인 성격이었지만, 아주 착했고 불량 학생도 아니었다.
‘고마워, 누나.’
내 눈빛을 받은미유키가 한동안 장난을 치며 내 기분을 풀어주더니.
돌연, 자신들의 새 파트너들에게 정신이 팔린 최진현과 신윤수를 보며 인상을 썼다.
“저 멍청이들 웃는 것 봐. 레나랑 아유미도 제이 군이 좋다고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실실 웃네. 자기들 파트너는 금세 내팽겨 치고. 정말 꼴불견이라니까.”
오늘 하루를 함께 보내며, 미유키는 진현이와 윤수를 아주 싫어하게 됐다.
두 놈. 특히 최진현이 나를 대놓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걸두 눈으로 보고 난 직후부터였다.
“탐방 동안 제이 군은 아무 걱정 마. 미유키가 남은 이틀도 꼭 지켜줄게.”
그녀가 내 이마를 자상하게 쓸어주며 방긋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안긴 자세로 기댔다.
‘…어? 근데 쟤 아직도 안 갔었구나.’
그러던 중.
대각선 방향에 홀로 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
그 아이는 타이라 엘라였다.
최진현의 버디였던 1학년 여학생.
윤수의 버디는 오늘 아침, 아유미와 레나가 온 걸 알고 집으로 가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짝이었던 윤수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충격 받아 울기까지 하면서.
―흐음… 엘라는 그럼 선생님이랑 버디할까?
―아니요. 혼자서도 괜찮아요.
하지만 엘라는 짝도 없이 혼자서 줄곧 우리 여섯의 근처를 빙빙맴돌았다.
―제이 군. 내가 사진을 찍어줄게.
이따금 여섯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면서, 하지만 그 이상 가까워지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렇게 우리의.
정확히는 ‘나의’ 주변을 맴돈 것이다.
‘엘라가 오키나와 국회의원 집 딸이라고 했지. 무지 부자라서 그런가, 자존심이 엄청 센 것 같아.’
오늘 레나랑 아유미가 말해준 건데, 타이라 엘라는 오키나와에서 오랫동안 큰 권력을 누려왔던 집의 딸이란다.
<타이라 가문>이라고 하면 오키나와 주민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기대할게.
나는 어제 엘라가 나와 버디가 되길 기대하겠다는 그 말이 떠올라 죄책감을 느꼈다.
그 감정을 지우려고, 미유키의 품속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제이 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히히, 애기 같애. 제이는 정말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미유키랑 이정도로 친해진 것도 유나에게 충분히 미안하다.
‘엘라는 안 돼. 미유키는 그래도 유나에게 허락을 받았잖아.’
하지만 타이라 엘라와도 친하게 지낼수는 없다. 그건 약속을 깨는 거니까.
―부우우우웅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짝 없이 홀로 앉은 타이라 엘라는 무심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
탐방 이틀째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으러 다 함께 지하온천으로 향했다.
“오늘 조올라 잘했다, 킹제이.”
신윤수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씨익 웃었다.놈은 오늘 하루 아유미와 함께 한 게 아주 마음에 든 듯했다.
“그래. 킹제이 덕분에 레나랑 만났으니까. 레나 진짜 귀엽더라.”
최진현 역시 웬일로 내게 시비를 털지 않고 지나갔다. 놈 또한 레나 누나랑 친해진 사실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야! 저기 봐! 차수진이다!”
“오오~! 진짜네? 목욕하러 왔나봐!”
그때, 애들이 지하 복도 한쪽으로 몸을 딱 붙이며 길을텄다.
유나가 왔다는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남색 유카타를 예쁘게 입은 그녀가 나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진짜 존나게 예쁘네 씨발….”
누구 것인지 모를 그 말이 조용하기 짝이 없는 지하 복도에 울려 퍼졌다.
유나가 그 말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안 되지 안 되지. 그런 말은 못 써.”
그녀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그 멍청이의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주의를 주었다.
“다시 말해볼래? 착하게.”
“……어, 어어….”
최진현과 신윤수의 따까리인 일진 놈이 어버버 거리다가, 침을 꾹 삼키고 대답했다.
“…너무… 예쁘세요, 누나.”
“옳지. 고마워?”
유나가 그놈의 머리를 아주 살짝 쓰다듬어주었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짱 부럽다! 수진 누나가 머리 쓰다듬어줬어! 대박!”
“동우 저 자식 머리 안 감겠는데?”
“누나! 저도요, 저도!”
“그래. 우리 다 같이 악수할까?”
“네에에에!”
유나가 복도를 지나며 우리 반 애들과 차례대로 악수를 했다.
나는 질투가 났다.
유나는 나랑 제일 친한데.
머저리들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자, 이제 마지막이네?”
그때 유나가 내 앞에 다가왔다.
퉁명스런 얼굴로 고개를 들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너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 우리 제이는 그거 말구.”
“…어어?!”
“!”
우주에서 제일 예쁜 우리 유나가.
내 이마에 키스했다.
다른 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녀의 입술이 내 땀에 젖은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유나가 허리를 펴고, 내 볼을 쓰다듬으면서 반 애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우리 제이랑 친하게 지내줄 거지? 누나한테 제이가 참 소중하거든. 그래 줄 거지?”
입을 쩌억 벌린 애들이 말도 내뱉지 못하고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착해. 우리 제이가 제일 그렇지만.”
유나가 손가락으로 내 코를 아주 가볍게 집은 뒤, 여탕으로 들어갔다.
“…….”
“…….”
“…….”
이놈들의 침묵은 이런 거였다.
유나. ‘그’ 차수진이, 우리 반 땅꼬마 샌드백 김제이랑 친한 사이라니.
“…말도 안 돼……!”
“킹제이 개새끼야! 어떻게 된 거야?!”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을 잠시 받아들이지 못하던 애들이 성난 얼굴을 하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모, 몰라!”
나는 후다닥 남탕으로 도망쳤다.
“모르긴 뭘 몰라 씹새야! 야! 저 새끼 잡아.”
“킹제이 뒤졌어, 너 일로 안 와?!”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14명의 머저리들이 탈의실로 들이닥쳤다.
‘으… 괴로워! 그래도 절대 말 안 해!’
차수진 누나랑 어떻게 알게 된 거냐 부터 시작해서. 무슨 사이냐, 소개 좀 시켜줘라 등 별의 별 말이 오고갔다.
하지만 나는 머저리들이 불알을 잡아당기든, 간지럼을 태우든, 이빨로 팔을 깨물든 뭔 짓을 해도 입을 다물었다.
“지랄들 그만하고 그 새끼 놔 봐.”
상황은 반장이나 1학년 통인 최진현이 정리했다.
그가 내게 헤드락을 걸고 있던 신윤수에게 턱짓을 했다. 놈이 팔을 풀었다.
“김제이 일어서.”
나는 그렇게 했다.
놈이 시켜서가 아니라, 계속 탈의실 바닥에 누워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너 차수진이랑 무슨 사이야.”
놈의 눈이 뱀처럼 차가웠다.
아마도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제일. …아니지, 아니지.
이 우주에서 제일 예쁜 여자인 유나에게 특별취급을 받은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에 몹시 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니가 알아서 뭐하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