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98. 제이의 라이벌 등장(4)
라라의 말을 한줄 요약하면 이거다.
나는 결혼 생각이 없으니.
생각 있는 넌 다른 여자 만나도 좋다.
논리의 화신인 독일 사람에다가, 핏줄은 오픈 마인드가 일상인 스칸디나비안 아니랄까봐 쿨내가 진동을 했다.
라라의 성격 상 백프로 진심일 거다.
예전에 그녀 집에서 잘 때,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 없다는 말도 했었고.
[친구도 없는 여잔데 결혼은 무슨.]
더구나 라라의 ‘김제이 외의 인간에겐 관심 없어’라는 식의 무신경한 태도를 생각해보면.
내가 여자를 만든다고 해서 그녀가 맞불을 놓을 것 같진 않았다.
‘잘 된 거긴 한데….’
분명 내 입장에서는 베스트다.
분위기에 휩쓸린 것도 있고, 그동안 라라와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걸 해소하고 싶어서 냅다 고백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 감정적이었지.’
돌이켜보면 나답지 않은 짓이었다.
한 눈 안 팔고 잘 하겠다?
그건 육서윤이나 아이린과의 미묘한 관계를 떠나서, 아직도 봉인해야 할 악마 군주가 63마리나 남은 시점에 절대로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큰 잘못이야. …많이 당황했나보다.’
육서윤에게 라라와의 섹스를 들킨 일이 내 생각보다 훨씬 충격이었던 모양.
결과적으로는 라라가 내게 자유를 줌으로써 해결됐지만, 나는 나답지 않게 무책임한 고백을 하고 언약을 내뱉은 사실을 크게 반성했다.
‘…서윤아.’
그리고 그제야.
육서윤이 걱정됐다.
이제는 하나 남은 내… 썸녀가.
[→나: 서윤아, 나 퇴원했닼ㅋ 오늘도 네일 공부 잘 했어? 이쁘게 됐는지 나도 보여줘ㅋㅋ –1]
평소였으면 보내는 즉시 사라졌을 숫자는,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
[우효~ 역쉬 집에 오니까 좋다!]
하루 만에 돌아온 방은 어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내 할 일이나 하자.’
생각만 해도 좋은 우리 라라나, 아까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서윤이의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상태창을 열어 변화를 확인했다.
〓〓
[계약자: 김제이]
실제계 등급: C- / 공상계 등급: E
[신체능력]
근력48
체력58
민첩53
마력60
정력50
[고유능력]
공상 침식 lv.1
[보유권능]
no.16: 성감 고조 lv.Max
no.26: 원령 초환 lv.1
no.32: 애욕의 화신 lv.Max*
no.34: 녹육의 축복 lv.Max
no.37: 불사조의 눈물 lv.Max
no.44: 보물찾기 lv.1
no.45: 뇌신 lv.1
no.49: 타락천사의 순수 lv.1 (new)*
no.69: 인드라이브 lv.5
[보유CP]
67
〓〓
새로 추출한 권능은 타락천사의 순수.
‘CP는 20이 늘었구나. 신체능력이나 나머지는 전부 똑같아.’
이번에는 새로 얻은 권능 상세보기를 했다.
〓〓
[no.45: 타락천사의 순수 lv.1]
45번째 악마 군주 크로셀의 권능.
외부에서 연유한 모든 종류의 정신 간섭에서 사용자의 정신을 보호한다.
〓〓
아까 메리는 이 정신 내성과 관련한 권능이 상당히 쓸만하다고 했다.
원래 천국의 능품천사였던 크로셀.
그녀는 무려 수천 년 간이나 악마 군주로 낙인찍힌 뒤 소유하고 있던 마검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줄곧 천사의 순수한 본성을 간직해왔기 때문에, 그 결과 새롭게 얻을 수 있었던 권능이라고.
[포말의 마안이 추출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역시 무리였어. 그래도 꿩 대신 꿩이다. 레벨을 적당히만 올려도, 앞으로 두 번 다시 환상따위에 미혹될 일은 없을 테니까.]
결심을 굳혔다.
“메리.”
[쎅쓰.]
“한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CP효율이 낮아져서 신체등급을 올리기도 애매하잖아. 그리고 정신 내성 상승은 언제나 환영이야. 최면이나 환각, 암시 혹은 기억 조작. 이러한 정신계열의 힘들은 상대하기 대단히 까다롭거든.]
파트너의 동의가 떨어짐과 동시에 해당 권능을 만렙으로 올렸다.
[▶54CP 사용: 타락천사의 순수 lv.1 -> 타락천사의 순수 lv.Max]
[▶잔여CP: 13]
CP가 바닥을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정신 내성을 반드시 끝까지 올리고 싶었다.
‘두 번 다시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
내가 어떤 일을 해놓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대단히 찜찜한 일이었다.
크로셀의 환상 건이야 감정적으로는 다 털어버렸지만, 앞으로 또 같은일을 경험할 순 없는 노릇.
…이런 젠장. 그 생각하니까 또 억울하네.
‘시발! 차수진 찌찌! 내 기억 돌려줘!’
―똑똑
―김제이. 나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들어와.”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검은 숏컷 헤어에 커다란 왕뿔테 안경과 무표정하지만 예쁜 얼굴. 흰 박스티 아래 거대한 I컵 폭유와 맨다리를 훤히 드러낸 파란색 돌핀 팬츠가 인상적인 낸시 드레이크 블랙베리.
“총무는 생존 신고가 늦다.”
그녀가 내 방을 방문했다.
“지금 막 왔어. 니네 안 잤네?”
“미아는 잔다.”
“넌.”
밤낮이 바뀐 놈들이라 그렇게 물었더니, 낸시가 라면 국물 묻은 티를 쭉 빼며 안경을 닦았다.
“어제 육 주임과 라라 수석 연구원에게 받은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지금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 두 사람이 어제 던전 빠져나와서 바로 보고 올린 거야? 그거 공식 연구 주제도 아니었잖아.”
하얀 아랫배와 귀여운 배꼽이 훤히 보이는 낸시에게서 눈을 돌리며 물었다.
‘무신경한 새끼.’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니플패치만 붙인 탓에 팅팅 흔들리는 폭유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야! 왜 앉아. 너 바지에 또 과자 부스러기 묻혀왔지?”
“총무는 조용히 한다! 자랑스러운 신연의 총무인 김제이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사이, 근면한 우리 연구원들은 자발적으로 소논문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해온 것이다!”
버럭 소리를 지른 낸시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빨리 이실직고하는 편이 좋다.”
“뭘.”
“트라우마 고스트 안에서 어떤 환상을 봤는지를.”
그녀의 말대로 했다.
“기억이 안나.”
“하나도?”
“정말로. 그냥 평소 자고 일어난 거랑 똑같애.”
“안타깝다!”
낸시가 눈치로, 내가 진짜 기억을 못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대체 어떤 규칙성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육 주임 일행에게는 좋은 환상이 보였고. 왜 총무 김제이에게는 아무런 환상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어젯밤 후속 탐사를 갔던 이시카와 레이 교수 일행은 어째서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나는 졸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자문하는 낸시의 말에, 중요한 사실을 눈치챘다.
‘서윤이가 보고서를 가라로 냈구나. 아니면 수진 누나가 내 얘기를 비밀로 해줬거나. 둘 중에 하나야. 둘 다 일 확률도 있고.’
육서윤은 아마도 꿈속에서 수호천사 차수진과 조우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후사정을 조금이라도 들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낸시가 상황 파악을못 하고 있는걸 보면, 서윤이가 보고를 의도적으로 누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뭐, 이대로 미궁에 빠지겠군.’
낸시와 미아에게 악마 군주와 관련한 비밀을 더 오래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힘내.”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프다….”
“그럴 것 같았어.뭐 해줄까?”
“그냥… 밥.”
“알았으니까 자. 나 밥 먹고, 니들꺼 챙겨서 따로 빼둘 테니까.”
“총무 방에만 오면… 잠이… 잘 온… 다…….”
낸시의 눈이 가물가물했다.
‘아휴, 넌 진짜.’
그녀의 뿔테 안경을 빼주고,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려 제대로 눕혀주었다.
얇은 이불을 덮어줄 때까지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던 낸시가 내가 방을 나서려 할 때, 한 마디를 했다.
“…불 좀.”
에라 이년아.
―딸깍
**
하루가 지나 일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드디어.
소피아가 오는 날이다.
나의 귀여운 메이드 로봇 소녀가 3월 31일까지인 계약 완료일보다 사흘 먼저 찾아오겠노라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
그러나 무지무지설레고 좋아야할 내 기분은 상당히 다운되어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나: 내일 혹시 뭐해? 별일 없으면 나랑 같이 중도에서 셤 공부할래? –1]
[→나: 서윤아… 니가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얘기 좀 하자. –1]
[→나: 자니? –1]
[→나: 깼니? –1]
서윤이가 내 톡을 이틀간이나 씹은 것이다. 당연히 전화도 받지 않았고.
“망했는데?”
오랜만에 들른 선우의 방.
의자에 앉아 톡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더니, 선우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소피아 씨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 때문에 그러신 거에요?”
선물. 이제부터 아카데미에 함께 살 예정인 소피아를 위해 내가 준비한 화구를 말한다. 물감, 이젤 뭐 이런 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받은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쩔 수 있겠어? 어차피 좋은 것도 아닌데.”
“그런 것치곤 정성을 참 많이 쏟으셨어요.”
“…그냥. 귀엽잖아.”
소피아. 곧 있으면 만날 그 소녀를 생각하니 그나마 미소가 지어진다.
‘이제 곧 만나는구나.’
『101명의 창부들』 속에 숨어든비네를 잡을 때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종래엔 선우와 주종 임대 계약을 체결한 유로파산 안드로이드인 그녀가, 온다.
이제 막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보 화가 꼬맹이가, 오고 있다.
‘…더 좋은 걸 샀어야 됐나.’
불안감에 괜히 이젤과 캔버스만 만지작거렸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서윤이에게 추천을 받아 산, 그럭저럭 괜찮은 화구들을.
‘소피아는 리샤르 집안에서 좋은 화구를 썼을 거 같은데. 내가 괜히 서로 불편해지는 짓 한 거 아닌가 몰라.’
내 표정이 구렸는지, 녹안녹발의 하프엘프 친구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괜찮을 거에요, 형. 소피아 씨가 형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처럼 보였었거든요.”
“그런가.”
선우가 질투도 안 날 정도의 예쁘장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럼요. 임대 계약자인 제가 아니라 형한테 ‘주인님’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만 봐도요.”
“야! 그건….”
선우의 말에 지금까지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던 그 말이 생각났다.
―주인님.
―열 번의 밤이 지나간 뒤. 이 부족한 메이드가 아카데미로 주인님을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만나 뫼시게 될 그날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이 말이 떨어진 직후, 나와 선우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곧바로 소피아와 작별했다.
그리고 나는 일부러 선우에게 이 화제를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건 너무 아니잖아!’
선우가 무려 한화 1800억에 가까운 돈을 주고 데려온 소피아다.
그런데 날더러 ‘주인님’ 어쩌고 하면서 녀석보다 더 친근하게 굴면, 아무리 착한 선우라도 빈정이 상할 일.
“형.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요.”
“응, 말해.”
선우가 진지한 얼굴로 날 불렀다.
녀석은 자기 방임에도. 그리고 1년 내내 따스한 봄 날씨인 아카데미 안임에도 썩 두꺼운 진녹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전 오히려 좋은 걸요.”
“뭐가.”
“소피아 씨가 저보다 형에게 더 큰 정을 느끼시는 듯한 모습이요.”
“왜. 또 낯가리니?”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선우가 날 볼 때의 따스하고 귀여운 눈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감정 없는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소피아 씨에게는 영혼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아요. 생명이, 아니시니까.”
녀석이 다시 따사로운 눈길로 나를 보며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정이 안 가요. 저한테는 말하는 로봇 청소기나. 겉모습과 행동이 사람과 똑 닮은 소피아 씨나.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거든요.”
“아아…….”
뭔 말인지 알겠다.
‘…맞아. 선우의 절반은 하이엘프였지. 게다가 녀석은 정령사야.’
선우가 날 대하는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까먹을 때가 있지만, 녀석의 긴 귀를 비롯한 여러 부분들은 절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외모만 봐도 그렇다.
인간 남성은 2차 성징이 지나고 나이가 듦에 따라, 선우처럼 저런 여성스러운 외향을 유지할 수가 없다.
호르몬 주사를 맞아봐야 골격 문제 때문에 대체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선우는 여자라고 하면 100명이 모두 ‘그걸 말이라고 해?’라고 할 정도로 여성스러워 보이는 애다.
하물며 단순한 겉가죽이 이런 정도인데, 다른 부분은 오죽할까.
생명과 영혼의 존재에 민감한 하이엘프의 피를 이어 받은 녀석의 특성상, 아무리 고성능 안드로이드인 소피아라도 녀석에겐 깡통 로봇이랑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맞아. 그래서 프레이야의 하이엘프 종족은 유로파와 사이가 안 좋지. 엘프들이 일방적으로 유로파인들을 괄시하니까.’
나는 그냥, 선우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면서 웃어주었다.
“갚을 거야. 안 떼 먹어, 새끼야.”
“아하하! 기대할게요, 형.”
맑게 웃은 선우가 휴대전화를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오셨네요. 갈까요?”
“그러자.”
선우와 함께 3관을 나섰다.
햇살 좋은 3월 말의 교정을 지나 아카데미 정문으로 걸었다.
“어? 저기 오셨다. 소피아 씨!”
나보다 눈이 훨씬 좋은 선우가 메타세콰이어 길 끝, 점으로 보이는 뭔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또한 마력으로 안력을 강화해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똑같네.’
바다를 닮은 파란색 트윈테일 생머리.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한 치의 구김 없는검정 메이드복과 하얗고 청결한 에이프론.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흰색 스타킹과 코가 둥근 검정 구두.
마지막으로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아름다운, 초등학생 저학년 같은 귀여운 얼굴까지.
―또각 또각
―드르르르륵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반선우님. 그리고 주인님.”
자신만큼이나 큰, 고풍스럽게 생긴갈색의 직사각형 여행 가방을 끌고 온 소피아가.
치마 끝을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오늘부로 유통지인 지구 상호명 EP-F-00001 양산 초기 테스트 제품, 개체 모델명소피아가. 두 분의 일상을 책임지고 보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반가워요, 소피아 씨.”
나도 그랬다.
“이스트 블루에 온 걸 환영해, 소피아.”
소피아도 그런 것 같았다.
“주인님의 학교는 아름다운 곳이로군요.”
소녀의 입가에 옅은 기대감을 품은,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