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99. 제이의 라이벌 등장(5)
우리 소피아가 3관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그녀의 고풍스러운 커다란 갈색 여행 가방은, 놀랍게도 마법이 걸려있는 고급품이었다. 안에서 옷, 기념품, 책을 비롯한 수많은 물품들이 끝을 모르고 쏟아져 나왔던 것.
“짐이… 많구나?”
나는 살짝 질린 눈으로 소피아의 개인 물품들을 바라봤다.
특히… 어마어마한 양의 총들을.
―철컥
소피아가 분해되어 있던 샷건을 조립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리샤르 가의 개로 일하는 동안 부업moonlight으로 수입을 올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해당 가방을 구매하였습니다. 자잘한 짐들이 많아 눈을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주인님.”
“뭐가 죄송해. 그런 거 아니야.”
책을 빈 책장에 꽂아주며 소피아의 이사를 도왔다.
총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서 하도록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응, 소피아.”
고개를 돌리자, 아주 예쁜 초등학생 모습의 메이드 소녀가 송구함이 담긴 얼굴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소피아의 시선 끝에는 내가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서윤이에게 추천을 받아서 산, 그럭저럭 괜찮은 질의 화구들.
“얼마 하지도 않는데 뭐. 부담 갖지 마. 오히려 난 네가 리샤르 가문에서 화구를 가져올까봐걱정했었어.”
“고약한 너구리들에게 받은물건은 무엇 하나 들고 오지 않았으니 염려놓으시길. 제 물품은 오로지 저의 급료와 보너스, 그리고 부업을 통해 구매한 저의 순자산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는 이 귀여운 메이드 로봇이 리샤르 가에 소박한 앙심을 품은 게 웃기기도 하고, 너무 깍듯한 모습이 불편하기도 해서 이삿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소피아.”
나의 메이드에게 다가갔다.
몹시 작은 키보다 살짝 큰 스툴 덕에, 하얀 스타킹에 싸인 소녀의 다리가 허공을 가지런히 밟고 있었다.
“우린 이제 가족이야.”
“가족… 이요.”
“응.”
무릎을 꿇고, 소녀의 하얀 손을 잡고, 손등 위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이런 행동이 에바 리샤르에게 4년간이나 괴롭힘을 당해온 소피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을까 싶어서.
아주 나이 어린 동생을 부드럽게 달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소피아도 선우가 불편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메이드 로봇의 파랗고 긴 트윈테일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반선우님Owner께서는 에바 리샤르에 비하면 천사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좋은 고용자이시고, 훌륭한 인격자이십니다.”
좋은고용자.
뒤에 말도 맞지만 이 말도 진짜다. 선우는 소피아를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
먼저, 아카데미 학장과 쇼부를 봤다.
권력가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우리 4대국제헌터아카데미에서는 본래 사용인을 둘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선우가 소피아를 데려오기 위해 학장과 쇼부를 봐, ‘아카데미가 고용한 3관의 임시 사용인’이라는 명목으로 소피아를 3관에 입주시켰다.
둘째, 소피아의 처우를 올려주었다.
본래의 계약서대로 EU 최저 임금을 받고 있던 소피아의 급료를 대폭 올려주었다고 한다.노동 강도 역시 엄청나게 낮아졌다고.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둘은, 서로 친해지려는 마음이 아예 없어보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선우는 나와 소피아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 배려의 실체는 ‘형님이 새로 생긴 장난감과 실컷 놀게 해드려야지’ 뭐… 이런 느낌에 가까운 것이었다.
“소피아. 선우는 널 싫어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물론입니다. 반선우님은 하이엘프의 피를 이으신 하프엘프이시니까요.”
소피아가 다 안다는 눈빛―나노테크놀로지가 적용된 초고성능 센서 덕이겠지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가 대놓고 낯을 가려서, 다른 사람에게 옆을 잘 안 줘. 대신 선우 몫까지 내가 소피아 마음 채워줄게. 응?”
우리 희망원 애기들한테 해주듯이, 작디작은 소피아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한 번 살짝 뽀뽀를 해주었다.
이에, 나의 작은 소녀가 옅게 웃었다.
“이 부족한 메이드의 주인님은 참으로 로맨틱하신 분이시로군요.”
“내가? 그냥 약간 자상한 것뿐이겠지. 말했다시피 내가 여사친이 많아. 우리 소피아처럼 말이야.”
“여사친이란 무엇인가요.”
“여자 사람 친구.”
“친구….”
그 순간이었다.
―철컥!
나의 메이드가 손에 쥔 개조식 대헌터용 베레타92A1의 조립을 마쳤다.
“잠깐 실례―”
그녀가침대 위에 고이 올려놓아져 있던 자신의 첫 그림, 『처녀작』을 끌어안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지금으로부터 41초 전,주인님께서는 저를 이라 칭하셨습니다.”
소녀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기 입력 된 명제를… 수정할까요.”
나는 지금 깨달았다.
너무 귀여운 것을 보면, 내가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
소피아가 온 이후로 사흘이 흘렀다.
일상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부족한 메이드의 요리가 입에 맞으시는지요. 원하시는 음식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길.
―습도 조절과 주인님의 프라이빗 시크릿을 위해. 속옷과 트레이닝복 하의는 방에 건조해두었습니다.
―효율적인 먼지 제거를 위해 총 1개의 대형 셀로판 테이프를 해당 전용 용도로 전환하였습니다. 재고에 여유가 있어 내린 판단이니, 원상복구를 원하시면 말씀해주시기바랍니다.
선우와 내가, 훈련/공부/노는 것 외에 할 일이 하나도 없어져버린 것!
“소피아! 그녀는 신인가!”
[쎅쓰, 쎅쓰! 존나 좋다! 부드러웤ㅋ!]
―우우우우우웅!
원래의 장검 크기로 돌아간 메리와 함께 뽀송뽀송해진 이불 위를 뒹굴었다.
요즘 개인적인 일로 바쁜 메리 또한 소피아가 준비해준 깨끗한 천 위에 몸을 떨며 좋아했다.
“와… 집에 여자 하나 있다고 아주 그냥… 삶의 질이달라지는데?”
자주 빤다고는 빨았지만 그래도 옅은 땀 냄새가 배어있던 베개 커버, 이불, 침대보는 완전 새것 같은 향기가 났다.
방 인테리어도 꽤나 바뀌어서, 허전한 느낌이 들었던 내 방은 인터넷 자랑글에서도 볼 법한 썩 예쁜 모습이었다.
‘라라한테 자랑해야지.’
―찰칵
사진을 찍어여자친구 ―나는 이 말을 할 때마다 꼴렸다. 34살 초동안 초미녀 섹시 의사가 내 여친이라니…―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다시 메리와 함께 침대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로리 마망 보살핌으로 가버렷!]
“소피마마아~!”
갓갓갓 소피아는 정말로 엄마 같았다.
우리 희망원 여자 쌤들이 그래주셨던 것처럼, 아주 섬세하게 나와 선우의 삶을 보조해주었던 것이다.
‘존나 좋다 진짜! 이제 졸업까지 요리 빨래 청소에서 영영 해방이다!’
하루에 최소 1시간. 일주일 평균 약 10시간 이상을 잡아먹던 집안일이다.
그리고 집안일이라는 게 막상 하려고 들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 안 그래도 시험기간에 돌입한 마당에 부담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으햨! 콜라에 얼음도 넣어줬네. 마트에서 얼음틀 사왔나 봐.]
“그러게. 그거 누가 잃어버렸었는데.”
메리가 몸을 작게만들어 컵 속의 콜라 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며 좋아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바쁜 개인 사업에 몰두 중이신 파트님께 물어봤다.
“너 근데 요즘 뭐하길래 바쁘냐.”
[악마 군주의 종적을 찾고 있었지. 이 몸의 할 일이 그거 말고 더 있냐?]
“찾았어?”
[의심 가는 놈은 있다.]
“누군데.”
뽀글뽀글 탄산 기포가 올라오는 콜라에 둥둥 뜬 녀석이, 검 끝으로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부산 연쇄 살인사건이라고 쳐 봐.]
―톡 톡톡
뉴스 포털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부산 연쇄 살인 사건 범인, 부산 살인 사건 마피아 등의 연관 검색어가 떠올랐다.
‘이건가.’
동영상이 첨부된 뉴스를 클릭해 해당 영상을 시청했다.
―3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새벽 3시 경. 부산의 해운대구의 한 골목길에서. 두 명의 남성이 피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해운대. 부산의 핫 플레이스다.
경범죄가 많이 일어나지만 그만큼 행인의 수도 많아, 살인 같은 중범죄가 쉽게 벌어지기는 어려운 곳.
―경찰은 해당 사건의 용의자를. 최근 세간에서 ‘부산 연쇄 살인마’로 지칭하고 있는. 헌터 출신의 신원불명 용의자와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뉴스 화면 안으로 cctv영상이 보인다.
모자이크가 덧씌워진 화면 안에는, 절대 일반인으로 볼 수 없는 몸놀림을 가진는 ‘뛰어난 각성자’가.
맨 손으로 사람 목을 잡아 척추 뼈까지 뜯어버리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용의자는, 여성으로 추정됐다.
“심한데.”
이 사건은 두 가지 지점이 너무했다.
하나는 실력.
목뼈는 연약하고 척추까지 한 번에 뽑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놀라운 근력 수치와 인체에 대한 이해, 섬세한 마력 사용 없이 사람 목을 잡아 척추 뼈까지 뽑아낼 순 없다.
S급 이상의 근접 전투계열 헌터조차 이런 일을 눈 감고 벌일 수는 없다.
[두 번째는 광기지.]
메리가 내 말을 이어 받았다.
[허가를 얻어 피해자들의 아카식 레코드도 열람해봤다. 원한 살인이 아니야. 죽은 이들은 평범한 20대 일반인 남성이다. 저렇게 죽을 원한이 없었어.]
“쾌락 살인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 경찰은 마력 폭주에 의한 고유능력의 영향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발표했다. 저건 마력의 힘이 아니야.]
마력도, 정령력도, 신성력도, 염동력도 아닌데 사람 모가지를 잡고 척추 뼈까지 뽑아 올렸다, 라.
답은 하나다.
“악마 군주의 권능….”
그것도 숙주의 침식이 심해져서.
실제계에까지 직접 권능을 행사하는.
[후보는 여럿 있다. 33위 가프, 38위 할파스 등등. 절대악 성향의 악마 군주일 가능성이 높아. 아주 골치 아파졌어. 저건 평범한 인간들이 추적해서는 쉽게 못 잡아.]
“왜.”
[숙주가 자신 안에 깃든 악마 군주의 존재를 자각해 버린 것 같다. 힘에 취한 상태인데, 이성은 깨어있지. cctv에 숙주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는데도 아직까지 못 잡는 이유는, 숙주가 남의 모습으로 의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야.]
메리가 끔찍한 가정을 남겼다.
[최악의 경우, 두 개 이상의 악마 군주가 복합된 양상을 띠고 있을지 모른다.]
절대악 성향. 놓아둘 경우 100퍼센트 확률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악마 군주들. 게다가 숙주가 해당 악마의 권능을 자기 봊대로 휘두르고 다닌단다.
설상가상 강대한 한 악마 군주가 다른 군주의 권능을 병합해서 더 강해진 상태일 수도 있다고.
‘아 짜증나.’
속이 타들어갔다.
고작 C급 헌터인 내가 최소 S랭크 이상의 강적과 실제계에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때문만이 아니었다.
“…하필 시험 기간인데 저 지랄이네.”
아카데미 중간고사. 그게 문제다.
지금은 시험 기간 한 주 전이다.
아무리 내가 1학년 때 학점을 오지게 많이 들어놨다곤 해도, 모범생인 내가 시험 전주에 딴 짓을 하는 걸 쉽게 용납할 수 있을 리가.
[그래서?]
메리가 내게 판단을 넘겼다.
이 새끼는 늘 이런다. 파트너라면서 중요한 판단은 나한테만 맡긴다.
뉴스화면에서는 피해자 가족들의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 우리 착한 아들을… 주, 죽인 그 악마 같은 녀, 년을… 흑! 꼭, 제발, 꼭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윽!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산이라.’
**
화요일인 오늘은 정기 모임이 있는 날. 방에서 나와 신연 부실로 향했다.
‘씨발년. 성질 좀 죽이고 살지.’
괜한 짜증에 부산 연쇄살인마를 향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메리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로 나를 달랬다.
[그게 되면 그년이 신검 캄비온의 계약자가 되어도 이상하지않겠지. 네놈처럼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가졌는데도 좆밥처럼 자제하고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어쩌라고. 아, 그년 대체 언제 잡아.’
[혼자서는 힘들다. 도움이 필요해.]
‘이번에도 선우?’
[반쪽이가 베스트이긴 하지.]
귓불에 메리를 붙이고 녀석과 부산행에 관한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외출 가십니까.”
파, 무, 마늘, 고기 등의 식재료가 든 장바구니를 들고 오던 소피아와 마주쳤다.
“우리 소피아 오늘도 마트 갔구나?”
“네. 어제오늘이 할인 행사가 있는 날인지라, 이틀 연속 장을 봤습니다.”
발걸음을 그대로 돌렸다.
가녀린 메이드의 작은 어깨를 쓰다듬은 뒤, 3관까지 대신 짐을 들어주었다.
“용무를 보셔도 괜찮은데.”
“니가 좋아서 그래.”
[이 몸도 그렇다, 깡통 계집아.]
순도 백퍼센트 진심에 소녀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가늘게 웃었다.
“소피아를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부터 고마워할 필요 없어. 앞으로 더 많이 좋아할 거니깐. 아 참, 소피아.”
“네, 주인님.”
“발받침이랑은… 다 맞아?”
말을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작아졌다.
소피아가 오기 전에 편의를 봐주려고 싱크대와 냉장고 밑에 발받침을 두거나, 집게와 청소도구를 사다놓는 등 이런저런 준비를 했었다.
‘그래도 외향이 너무 어려보이니까. 소피아가 우릴 도와주는 게 고맙고좋으면서도 미안하네.’
똑똑한 소피아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치마양끝을 들어 올리며 예쁘게 인사를 해왔다.
“이 메이드의 심장에 박힌 영구기관이 있어 힘이야 부족할 일이 없습니다만. 주인님의 섬세한 배려 덕에 자잘한 수고를 덜어 하루하루 행복한 마음으로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봉급 받고 계약에 따라 일하고 있는 거니까 오지랖 떨지 말라는 뜻.
나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딸랑
기숙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식탁 위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인사를 하고 다시 신연 부실 건물로 향하려 참에, 소피아가나를 불렀다.
“주인님. 오늘은 말씀하셨던 동아리 활동을 하러 가시는지요.”
“응. 일요일에 학교 안내해주면서 보여줬지? 그 붉은 벽돌 건물이 우리 신연 제1연구소야. 어제 저녁을 같이 먹었던 낸시와 미아가 운영진이지.”
“주인님.”
소녀가 조용한 말투로 의외의 부탁을 해왔다.
“혹시 이 부족한 메이드가 연구소를 방문할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요? 반선우님께서는 오늘 저녁을한라산 국립공원 내 영맥 근처에서 해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되지! 지금 같이 가자.”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뒤, 소피아의 손을 꼭 잡고 신연으로 갔다.
**
“안 된다.”
단칼에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