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08. 제이와 달콤한 미인주 (1)
킬리 퍼시벌의 몸 안에 성배가 있단다.
[목적은 추후 부활할지 모를 72악마 군주들을 구축하기 위해서였겠지.]
무려 1600년 간 이어진 숙원이란다.
‘와아… 내 라이벌 더럽게 쎈데?’
같은 목적을 가진 경쟁자의 출현.
이건 호재이면서 동시에 악재다.
호재인 이유는 간단하다.
악마와 언데드 한정, 순간적으로 SSS랭크에 육박하는 기량을 발휘하는 실력자를알 게 된 것. 그 자체가 굿 뉴스다.
악재인 이유는 조금 복잡하다.
킬리가 무지막지한 신성력으로 숙주와 악마 군주를 격퇴해버리면, 높은 확률로 권능 추출이 불가능해질 거라는 것.
즉, 킬리의 등장으로 인해 내가 강해지는 속도가 느려질 가능성이 생겼다.
―다음 역은 해운대. 해운대입니다.
버스에서 내렸다.
육서윤이 고이 잠들어 있을 레지던스 호텔로 향하며, 향후에 닥칠 우리의 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킬리 퍼시벌은 아마도 아까 단탈리온을 많이 봐준 걸 거다. 이정엽을 죽이지 않고제마를 행해야 했을 테니까.]
‘안 봐줬으면?’
[죽이는 게 편했겠지.]
방에 들어가기 전, 허기를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빵을 먹었다.
삼원 고기 호빵.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윤이네 회사 제품이다.
‘그럼 다음에는 정말 사정 안 봐주고 숙주 뚝배기를 깨버리거나, 악마를 완전히 태워버리려나. 그렇게 되면 권능 추출도 제대로 못 할 거고?’
[그럴 가능성이 높다. 네놈도 알다시피 싸움이라는 건 적당히 봐주는 쪽이 훨씬 어렵잖아.]
‘음… 난감해졌네.’
상태창을 열었다.
〓〓
[계약자: 김제이]
실제계 등급: C / 공상계 등급: E
[신체능력]
근력49 ▲
체력59 ▲
민첩54 ▲
마력61 ▲
정력50
[고유능력]
공상 침식 lv.1
[보유권능]
no.16: 성감 고조 lv.Max
no.26: 원령 초환 lv.1
no.32: 애욕의 화신 lv.Max*
no.34: 녹육의 축복 lv.Max
no.37: 불사조의 눈물 lv.Max
no.44: 보물찾기 lv.4
no.45: 뇌신 lv.2
no.49: 타락천사의 순수 lv.Max
no.69: 인드라이브 lv.5
no.71: 심안 lv.1 (new)*
[보유CP]
205
〓〓
일주일 간 큰 진전이 있었다.
시험 기간임에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근민체가 다 올랐고, 가장 중요한 마력은 아까의 전투로 1이 상승했다.
나는 이제 비로소, 마이너스 딱지를 떼고 완연한 C랭크 헌터가 되었다.
‘마력 같은 경우는 S++급 신체를 가진 단탈리온과 정면 승부를 한 덕이겠지. 뇌신을 자주 쓴 영향도 있을 거고.’
가장 고무적인 건, 쓸만한 권능의 레벨을 많이 올려놓은 상태임에도 이번 일로 CP를 203이나 벌었다는 점.
‘흠… 그래도 뭔가 부족한데.’
이 성장 속도라면 아마도 가을 전까지 반드시 B등급에 오를 수 있을 거다.
뇌신 같은 사기적인 권능이 있으니, 승급 테스트를 잘 받으면 올해 중에 A랭크 판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S급은 언제 다다를 것인가.
나는 오늘.
‘진짜’ 죽을 뻔했다.
나도 안다. 지구 전체에 S랭크 이상의 강자들은 고작해야 1만 여명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대부분의 악마 봉인은 지금까지 그랬듯 공상계에서 이루어질 거라는 점도.
S++급의 신체와 마력을 가진 단탈리온 같은 놈과 실제계에서 싸울 일은, 아주 많진 않을 거다.
메리도 확언을 해주었다.
[네놈 말이 맞다. 한동안은 그럴 거다.]
하지만 걱정됐다.
한동안은 진짜 ‘한동안’일 뿐이니까.
그러니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고.
‘…몰라 씨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 새로 얻은 권능도 내일 보자.’
[이미 12시가 지났닼ㅋㅋ]
‘큭큭! 그럼 이따가. 킬린지 킬런지는. 앞으로 만약에 거슬리면 확! 그냥.’
[확 그냥 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 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친해져야지 뭐 어쩌겠어? S등급한테 걔길 수도 없잖아. 성배를 갖고 있는 여자라 애욕의 화신도 안 먹힐 텐데.’
[대찬성이다!]
내 말에 메리가 크게 좋아했다.
[이 몸은 퍼시벌의 자손이 좋아. 원탁 년들 중에서 이 몸과 가장 친했던 계집이 바로 퍼시벌이었거든.]
‘그래? 그럼 특별히 더 노력해볼게. 널위해 내가 뭘 못 하겠어. 킬리 발가락을 빠는 한이 있더라도 친해져야지.’
아니다. 그건 포상인가?
[오빠야 자상함에 메리 거기야가 큐웅큐웅 떨린다아이가~! 억수로 고맙대이!]
‘메리 너 사투리 존나 못한다.’
[맞낰ㅋㅋㅋㅋㅋ]
―딸랑
남은 우유를 단숨에 비우고 방으로 올라갔다.
**
―띠띠 띠리리
호텔 방에 서윤이는 없었다.
“얜 또 어디 간 거야.”
현관에는 금요일에 신었던 킬힐이 없고, 오늘 신었던 육서윤의 스니커즈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그녀의 캐리어가 아무렇게나 열려있는 걸 보니, 옷까지 갈아입고 외출을 한 모양.
‘찾을 때 찾더라도 일단 씻자.’
그녀 걱정을 잠시 접고 샤워를 했다.
―쏴아아아아아
뜨거운 물에 머리를 데우고 땀과 피를 닦아내자 그제야, 몸이 떨려왔다.
구멍이 뚫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에서는 핏물이 배어나와 하수구로 흘렀다.
‘…….’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까 단탈리온에게 한 번 터졌던 심장이 미칠 듯이 뛰며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아까 한 번 죽었다고.
샤워기 물을 맞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에 쏟아지는 온수를 맞으며, 떨리는 손과 욱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죽었다. 나는 오늘… 한 번 죽었어.’
아까 나를 위해 화를 내주었던 킬리 퍼시벌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당신,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요?! 여기는 공상계가 아니라 현실이라구요! 죽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현실!
죽음. 공상계에서의 죽음과 현실에서의 죽음은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첫 번째 죽음인 발키리 때는 뭐가 뭔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넘어갔다.
두 번째 죽음인 비네의 공상계. 이때는 일주일 가까이를 패닉 속에 살았다.
그리고 세 번째인 오늘. 실제계인 현실에서의 죽음은…….
“…하아.”
내게 초조함을 안겨 주고 있다.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대단히 위험한 일에 뛰어들고 말았다는, 삶의 감각이 울리는 경종.
반드시 더 빨리강해져야만 ‘진짜’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자기 예언.
[그렇지 않다. 72악마들은 잡졸이 아니라 무려 ‘군주’다.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놈들이라는 뜻이야. 오늘 같이 계획적 음모를 세우는 일은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정말 고생했다. 푹 쉬어.]
“그래, 너도 자. 많이 피곤할 텐데.”
―쏴아아아……
샤워를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삶의 흔적이 밴 반팔과 반바지 입고, 따뜻한 티백 녹차를 마시자 그나마 좀 살것 같았다.
―까톡!
톡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이정엽.
[→이정엽 팀장: 우리 악마 사냥꾼님께서는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으시나? 일어나자마자 서른 통이나 걸었는데! (화난 이모티콘) 설마 너 나 차단했냐?]
[→이정엽 팀장: 현상금 국고에 전액 환수하고 싶으면 계~속 연락 씹으셔ㅎㅎ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꼭 전화줘. 그리고오늘은 고생 많았다 후배야.]
다행이다. 그는 내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눈을 뜬 모양이었다.
게다가 현상금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까, 조서를 어떻게 꾸며 써서 제출할지 나랑 상의하고 결정할 모양.
‘공을 나랑 나눌 생각이구나. 역시 이정엽은 사람이 됐어. 거짓이 없다.’
내가 그에게내일 전화하겠다는 답장을 보낸 뒤, 부산 야경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띠띠 띠리리
카드키 찍히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어? …빠야아…….”
육서윤이었다.
그녀는 금요일에 입었던, 대단히 섹시하면서도 귀여운 타이트한 분홍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육감적이라는 단어로 차마 형용이 안 되는 폭발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개꼴리는 옷을.
도도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얼굴에는 그날과 마찬가지의 화사한 엘프 화장을. 머리에는 내가 참 세련됐다고 생각한 하얀 꽃 머리 장식을 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말 그대로 풀세팅.
감히 말하지만, 내게 서윤이의 이 모습은 지구에서 가장 예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극히 내 취향이었다.
“우리 서윤이 야밤에 그렇게 꽃단장을 하고 어디 갔다 왔어?”
“그, 그게에….”
육서윤이 어쩐지 무척 부끄럼을 타며 금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유니느은… 병문안을… 와, 왔어요….”
병문안을 갔다 왔다고? 이 시간에? 누구를?
나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누군데. 아는 분이 아프셔?”
“…으응. 그, 그 사람이 누구랑 싸웠대. 그래서 마음이… 안 좋을 거래요.”
서윤이가 금발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한 태도로 현관에 서 있었다.
12cm킬힐 덕에 더 길고 탐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맨다리는 긴장을 머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싸움? …그리고 병문안이라고?’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설마 서윤이 너, 지금 이정엽 팀장님 병문안 갔다 오는 길이니?”
“응? 그게 누구에요.”
“있잖아. 낮에 같이 본 잘생긴 경찰.”
“……뭐라구?”
이런 젠장. 지뢰를 밟았나 보다.
애교를 잔뜩 머금고 있던 육서윤의 아가 고양이 같던 얼굴이, 한 순간에 차가워져버렸으니까.
“허!”
서윤이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잠시 옆을 보다가, 킬힐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또각또각. 그녀의 하이힐이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리는 소리에 나는 심장이 다 덜컥했다.
168cm지만 킬힐을 신은 덕에 훌쩍 커진 육서윤이 내 앞에서, 거의 눈높이를 마주보며 항의했다.
“여기서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와?”
나는 빠르게 변명했다.
“아니! 아픈 사람이 있다길래. 지금 이 팀장님이 부산 살인마 잡으시다가 병원에 입원하셨거든. 그래서… 아픈 사람이 이정엽… 그 사람인가 했지.”
“멍청이! 이런… 멍청아…….”
서윤이의 송아지처럼 맑고 큰 눈이 순식간에 물기를 머금었다.
“너잖아아, 너어! 아픈 사라암!”
…나? 아픈 사람이 나라고?
“그럼… 병문안 갔다 왔다는 건.”
“바보야아!”
서윤이가 앙증맞은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울먹울먹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내가 언제 갔다 왔다고 해써어! 왔다고 해찌이! 오빠는 왜 사람 말을 그대로 안 듣는 거야아!”
아.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구나.
―유니는 병문안을 왔어요….
갔다 온 게 아니라, 왔다는 거였네.
그것도 자기 이름을 귀엽게 부르는 애교까지 부려가면서.
“씨잉…….”
그녀가 억울함이 한가득 담긴 얼굴로 정말 서럽다는 듯이 항변했다.
“킬리 수녀님이, 오빠 아프다구 해가지구…. 그래서 나는… 오빠 힘내게 해줄라구… 오빠 올 때까지, 카페에서… 기다렸는데…….”
결국, 서윤이의 하얗고 뽀얀 볼을 타고 투명한 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색한 분위기도 풀고오…! 오빠두 달래주구… 그러려구 했는데에……! 어뜨케 나한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어!”
우리 순둥이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작은 머리를 마구 도리질 쳤다.
“이정엽?! 그런 사람 몰라, 몰라아! 그게 누군데에! 낮에 카페에서 만난 경찰 때문에 유니가 얼마나 짜증이 났었는 줄 빠야가 알아?! 빠빠야 앞에서 나한테 추근거려서 화딱지 나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아!”
“우리 애기 이리와.”
육서윤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마음을 오해한 게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지극히 예쁜 모습으로 내게 투정을 부리듯 화를 내는 게 지나치게 사랑스럽기도 했다.
서윤이의 부러질 듯 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씨이….”
그녀가 못 이기는 척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억울해 주게써어. 나 진짜 화나….”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이게 뭐냐구우… 부산 와서 빠빠야랑 아무것두 못 하구… 사이는 더 안 조아지구……. 뭐야아 이게에…….”
서윤이의 향기 나는 금발머리에 입술을 맞추며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하얀 머리장식이 따스한 할로겐 등에 반사되어 빛났다.
“서윤아.”
“왜!”
“너, 나… 좋아하니.”
“…….”
파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서윤이가 아주 잠깐 동안 몸을 떨다가, 이내 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지극히 행복한 기분에,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내가 라라와 이미 사랑하는 사이인데도?”
“…어쩔 수 업짜나…….”
내 여자가고개를 들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서윤이의 깊고 아름다운 눈은 옅은 질투와, 그보다 더 큰 사랑이 담겨져 있었다.
“유니는… 빠빠야 꺼잖아요.…OT때, 꿈속에서… 그렇게… 약속해짜나….”
아.
‘서윤이가 알았구나! 설마 했는데.’
크로셀의 환상을 통해 서윤이는 수호천사인 차수진과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 그때 아마, 나와 있었던 일을 차수진이 딸에게 말해주었던 것 같다.
‘서윤이가… 알아버렸어…….’
긴장과 감동과 흥분에 사로잡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알고, 있었어?”
“으응.”
서윤이가 내 입술에 살짝, 붉은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모두. 전부. 다. 알아요.”
“…….”
그런데도 나를 좋아한다, 라.
완전히 발기한 극대자지 때문에 뒤로 빼고 있던 허리를 당겼다.
반바지 너머로, 나노소재로 만들어졌을 서윤이의 타이트한 분홍 원피스 감촉이 느껴졌다.
“!”
묵직한 성기의 감촉이 낯설었는지, 서윤이가 흠칫 놀라 내 눈을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크고 탱탱하며 조금의 처짐도 없는 꿀덩이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도망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