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112. 제이와 달콤한 미인주 (5)
―[이정엽입니다. 누구십니까아.]
“접니다. 재수 없는 악마 사냥꾼.”
―[이놈의 자식아! 늦다, 늦어!]
이정엽이 소리를 꽥 지르며 어제 왜 톡을 씹었냐는 둥, 자기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냐는 둥, 한 번에 엄청나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잘 들으세요. 헷갈릴 것 같으면 녹음해서 다시 들으시구요.”
나는 빠르게 상황을 요약했다.
71위 악마 군주 단탈리온이 이정엽이 모시는 여성 신인 <구천현녀>를 숙주로 삼았고, 그 탓에 빙의 상태였던 이정엽이 단탈리온에게 몸을 빼앗겨 의식을 잃어버렸던 것이라고.
아마도 할파스와 말파스는 단탈리온의 오더에 따라, 나를 잡기 위한 함정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에 왔던 것 같다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스터 킬리라는, 나도 잘 모르는 클레릭이 우리를 구해줬다고.
―[황금여명십자회의 실천자라. 그렇게 된 거였군. 아놔 이거, 후배님 앞에서 기절이나 하고. 쪽팔린데? …혹시 내가 너 죽일 뻔 하지 않았었냐.]
“헛소리. 그게 왜 팀장님 때문인데요? 단탈리온 그 개새끼랑, 그놈이랑이상한 거래를 튼 현녀 잘못이지.”
―[쿨한 새끼. 말이라도 고맙다 임마.]
고위 강령술사인 이정엽은 내 부족한 설명에도 빠르게 전후 사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전달했다.
―[후배님아. 근데 니 선배 큰일 났다?]
“왜요.”
―[구천현녀님과의 연결이 끊어졌어.]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주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아주. 완전히. 끊겼다.]
“정말요?!”
이정엽이 모시는 신인 구천현녀와의 연결이 끊어졌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무리 해도 강신이 안 돼. 비상금 털어서 제사까지 지내도 마찬가지야.]
이 팀장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현녀님께서 날 거부하시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현녀님과 나를 잇는 패스pass가 완전히 끊어진 느낌이랄까.]
“혹시 킬리 수녀가 단탈리온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신 건….”
―[쓰읍~! 그건 아냐. 절대 아니야.]
이정엽이 쯥쯥, 하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냈다.
―[그 수녀 분의 영향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어. 뭐… 예전부터 조만간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긴 했는데.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라진 것뿐이야. 니 잘못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
왜 걱정이 안 될까.
구천현녀는 무려 서왕모급 여신이다.
그 대단한 도교 선계에서 군신으로 이름 높은 고위 신. 그리스 로마 신화로 따지면, 군신 아테나에 비견된다.
‘큰일인데.’
이정엽이 만약 앞으로 구천현녀의 강신을 하지 못한다면, S++급였던 그의 전투력은 S-급까지도 강등될 수 있다.
“좋은 방법 없어요? 랭킹 지키셔야죠. 팀장님 나가리 되면 top500에 한국인 13명밖에 안 남잖아요. 팀장님 덕에 처음으로 종합 국가 랭킹 5위 안에 들었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순위 좀 밀려나면 어때.]
대한민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국가 헌터 공무원 이정엽이 피식 웃었다.
―[한동안 휴직 신청하고 게임이나 하면서 놀려고. 생각도 정리할 겸.]
“쉽게… 정리가 되시겠어요?”
―[아무렴. 초딩 때부터 22년을 모셨던 분인데, 어렵겠지. …그래도 보내드려야지. 이미 그럴 분위기기도 했고.]
이정엽이 남자답게 각오를 내뱉었다.
나도 그의 의지를응원해주기로 했다.
―[참. 조서는 내가 후배님 말을 적당히 꾸며서 쓰면 되거든? 대신 너 경찰서 출두하기 전에 우리 몇 가지 말 좀 맞춰놓자. 너 현상금 챙겨주려면, 니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어.]
“네, 말씀하세요.”
―[우리 후배님. 너는 대중들에게 니 정체를 숨기고 싶은 거지?]
당연하다. 이번 봉인 임무를 통해 한동안은 꼭 그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은요.”
―[좋아. 그럼 넌 익명의 체포자로 하자. 대신 다음주 중에 나랑 아주 친한 입 무거운 기자 한 명 대표로 보낼게. 사건이 워낙 크다보니까, 기자들 입장에서 이 인터뷰를 절대 놓칠 수가 없거든. 수고 좀 하는 대신 내가 너 현상금 전액 다 챙겨주는 걸로. 오케이?]
익명의 체포자. 그럼 대충 각이 나온다.
내 신고에이정엽이 출동을 했는데 위기에 빠져 정신을 잃었고, 결국엔 내가 막타를 쳤다는 그런 시나리오겠지.
“알겠어요. 소설 좀 쓰죠 뭐.”
―[좋았으. 그럼 이따 제주도 내려가기 전에 경찰서만 잠깐 들러. 아 참! 그 전에 현상금 입금할 계좌부터 보내고. 니 신원조사 때문에 추적 들어갈 거다? 괜찮지?]
“그럼요. 이따 점심에 봬요.”
전화를 끊고 계좌번호를 보냈다.
그리고 현상금이 대체 얼마나 되길래 자꾸 챙겨준다 말하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뭐 한 천만 원 되려―’
―탁! 타닥…
너무 놀라 폰을 떨어뜨렸다.
[히야~! 할파스 말파스 그 버러지 새끼들이 하여간 많이 죽이긴 했지? 부산에서만 근 40명. 홍콩에서 백 명 훌쩍 넘게 죽었으니, 꽤나 대사건이었다.]
메리의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집어 들었다.
―『경찰청, 부산 연쇄 살인마 현상금 6억으로 인상 - 고액알바 노리는 헌터들의 이목을 끌고 있어.』
―『부산 살인마 단순 신고 시 생사여부 불문하고 1억의 현상금 부여. 4월 초까지의 현상 모집 기간이 지난 뒤에는 대형 헌터 클랜에 사건 의뢰 예정.』
―『국내 2위 헌터 클랜 <하얀 그림자들> 고위 관계자 曰, “현재 특임대가 부산으로 출장 대기 중이다. 보수? 그딴 것은 필요 없다. 우리의 목표는 부산 연쇄 살인마의 목.”』
―『추정 S랭크의 각성자, 부산 연쇄 살인마의 현상금은 무려 6억? - 한국 헌정 역사상 11번째로 높은 금액.』
―『홍콩 지방정부 현상금 반액 부담 및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전달 - “우리 홍콩의 자매 도시인 부산의 시민들께 심심한 위로가 되었으면”』
6억.
씨발… 무려 6억이다.
이정엽이 나를 ‘익명의 체포자’로 한다고 했으니까, 단순신고 포상금인 1억이 아니라… 6억이… 들어온다.
[참고로 현상금은 면세 대상이다.]
“…….”
나는 포효를 참지 못했다.
―정엽아!! 사랑한다!!
**
샤워를 마치고 서윤이를 깨웠다.
막 잠에서 깬 그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섹스는 꾹 참았다.
“히잉… 유니 못 걷겠어여….”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스스로 가누지도 못하는 앤데, 어떻게 안겠는가.욕조에도 내가 안아서 넣어주어야 할 정도였다.
“빠야! 물기 다 말랐어요. 이제 눈 감아~. 실눈도 뜨면 안 대?”
“그럴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나는 서윤이의 머리를 말려주는 것 외에는 그녀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빠빠야아.”
“응, 자기야.”
“우리 이제 나갈까여?”
청스키니 바지와 흰 셔츠.거기에 베이지색 가디건을 곱게 입은 서윤이가 침대에 앉아 나를 올려다봤다.
“유니 걸을 수 있겠어?”
“우우….”
서윤이가 운동화 신을 발을 땅에 붙이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뗐다.
그러다 결국 의자에 손을 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리가 넘무 아파요.”
“미안해. 나 때문에.”
“으응! 아니야.”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옷 위로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어제 마안~이 안긴 덕분에. 빠빠야가 아직도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안에 있는 게 유니도 좋았어?”
“……그러엄.”
서윤이가 발그레한 얼굴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 꺼야가 진짜로 완전히 내 꺼가 된 것 같아서 얼마나 행복했다구.”
“아… 귀여워 미칠 거 같다 정말.”
삽시간에 발기해버린 자지를 서윤이의 아랫배에 딱 붙이며 가녀리면서도 풍만한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내 여자가 내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내 뺨에 뽀뽀를 해왔다.
“유니가 미안해. 어제 등도 많이 할퀴구… 머리카락두 뽑구… 욕도 하구….”
“아니야, 좋았어. 자기야말로 내가 미안해서 어떡해? 심한 욕도 너무 많이 하고, 엉덩이도 때리고. 무지 많이 괴롭혔잖아.”
“맞아. 이 나쁜 빠빠야!”
서윤이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 양 볼을 쭉쭉 잡아당겼다.
“너무해! 정말 너무너무너무해!”
“근데 왜 웃어.”
“…그, 그래두… 좋았으니깐….”
그녀가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얼굴로 나한테 무차별적인 애교 폭격을 퍼부었다.
“유니느은. 빠야 꺼라서어. 빠빠야가 어떻게 해줘두우, 다아 좋으니까안.”
…아 씨발. 나 이러다 얘한테 홀려서 일상생활을 못 하겠네.
서윤이의 스키니 바지에 감싸인 엉덩이를 가볍게 만지며 얘기했다.
“자기야. 지금 자기가 애욕의 화신 만렙을 적용받는 상태거든. 세기로는 5레벨 정도지만. 참고로 평상시에 나는 2레벨, 자기 껀 3레벨 정도야. 아스모데우스 봉인 전에 자긴 4레벨쯤이었고.”
“응! 빠빠야가 어제 말했던 그거?”
간밤, 서윤이에게 내 악마 봉인과 관련한 비밀을 다 털어놓았다.
내가 어떤 권능이 있고, 서윤이가 어떤 악마의 숙주였고, 놈을 봉인한 지금조차 그녀가 여전히 lv.3에 해당하는 애욕의 화신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응. 근데 우리, 사랑을 나눌 때 말고는 아무래도 lv.max를 안 켜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묘한 습기가 느껴지는 서윤이의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만지며 속삭였다.
“울 애기. 지금도 젖었잖아. 그치?”
“……몰라아….”
서윤이가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픈 몸으로도 당장 나를 받아줄 것처럼, 내 엉덩이를 꽈악 잡아당겼다.
“너무 좋아아…. 오빠가 좋아요….”
“응. 그런데 자꾸 그 상태면 아무것도 못 할 수도 있잖아? 생활도 불편할 거고. 그러니까 앞으로 사랑을 나눌 때만 만렙을 켜놓을게. 자기도 그게 좋지?”
“빠빠야 마음대로 해.”
서윤이는 아무래도 좋은 듯, 내 결정에 토를 달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 단일 개체 한정 시동 해제]
만렙을 off했다. 이제 평소처럼 lv.2의 권능만 적용된 상태.
나는 혹시나 바뀐 강도에 서윤이의 기분이 급격히 다운될까 염려 돼서, 한참동안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빠빠야.”
“응?”
그렇게 5분쯤이 지났을까.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거어, 언제 끌 거야? …유니, 기분이 이상해져요….”
“…….”
“…아으으응, 오빠아!”
혹시나 해서 서윤이의 스키니 청바지 안에 억지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직도 젖어있다. …그것도 아까보다 훨씬 더.’
손을 빼고, 눈을 끔벅끔벅 뜨면서 내 여자에게 물어봤다.
“자기야. 뭔가 바뀐 기분 같은 거… 없어?”
“바뀐 기분? 빠야, 이미 아까 전에 그거 껐었구나?”
“응. 5분도 더 전에.”
내게 소중한 곳을 만져져 얼굴이 크게 상기된 서윤이가 귀엽게 눈을 굴려 뭔가를 생각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라니?”
그녀가 내 입술에 사랑이 듬뿍 담긴 키스를 하며 아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애교를 부렸다.
“그걸 켜나, 안 켜나. 유니가 항상 빠빠야를 최~고로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다행이라구!”
…당황스러움에 말이 안 나왔다.
방을 나서기 전, 테스트를 해보았다.
[▶ 단일 개체 한정 시동]
[▶ 단일 개체 한정시동 해제]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체크아웃 시간인 12시까지 서윤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변화를 확인해보았다.
“우리 언제까지 해야 대? 내 빠야 배고프자너. 유니가 맛난 거 사줄게여.”
“…….”
하지만 똑같았다.
어젯밤 최초로 만렙을 그녀에게 적용했을 때 이후로, 서윤이의 태도엔 지금까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미 호감도 만렙이라는 거지.]
메리가 이 상황을 분석해주었다.
[애욕의 화신 만렙은 ‘지금 당장 상대의 아이를 갖고 싶을 정도의 치명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이미 육서윤이 그런 사랑을 네게 품고 있으면, 만렙이나 아니나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냐?]
…이게 그럼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갑자기 내 여자가 무지 걱정됐다.
“서윤아.”
“웅!”
“자기… 참을 수 있겠어?”
뭘 참을 수 있겠냐는 지는 뻔했다. 서윤이는 똑똑한 애였으니까.
“응. 잘 참을 수 있어.”
그녀가 부끄러움을 타는 어린 소녀 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빠빠야가 날 앞으로도 마니마니 사랑해줄 거란 걸 아니까.”
“응. 물론이지.”
“크크크! 만세에~!”
서윤이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그녀 안에 숨겨진 섹시함이나 뜨거운 몸과 너무도 상반되게 느껴져서, 나는 새삼 그녀에게 반했다.
서윤이의 가장 사랑스러운 면은 그녀의 신비로울 정도로 다채로운 고양이 상 얼굴이나, 폭발적인 몸매 등의 외면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천千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성격.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육서윤은 행동 하나하나가 남자를 홀리는 데에 타고난 것 같았다.
‘큰일 났다. 라라가 주는 안정된 설렘이랑은 전혀 느낌이 달라. 서윤이는 요녀야…. 얘는 진짜 우물이다….’
나는 무슨, 구미호나 서큐버스한테 홀리는 기분이 들어서 차라리 지금 당장은 얘 얼굴을 안 보기로 했다.
안 그러면 계속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어질 것 같았다.
“이제 가자. 업어줄게, 자기야.”
등을 돌리고 허리를 굽혔다.
서윤이는 옷을 다 입고 난 1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걷지 못 했다.
숫처녀의 몸으로 간밤에 내게 너무 많이 시달린 탓이었다. E급 헌터인 그녀였음에도 지금까지 못 걸을 정도니, 내가 간밤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됐다.
“네에.”
우리 애기는 정말로 아가였다.
둘 다 다 큰 성인이라 창피할 수도 있을 텐데, 그딴 건 상관없다는 듯이 아주 기쁘게 내 등에 업혔으니까.
방을 나서며 내 꺼에게 주의를 줬다.
“우리 애기. 이제 예쁜 얼굴 가릴 마스크 쓰셔야죠?”
“웅. 여기, 잘생긴 빠빠야도 쓰세요.”
“나는 왜?”
“치.”
서윤이가 시크하게 웃으며 내 귀에 마스크 고리를 걸어주었다.
“오빠가 안 창피하면 괜찮구.”
…내 여자 말을 듣기로 했다.
**
호텔 근처 유명한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부산경찰서에 들렀다.
이정엽을 만나 이런저런 절차를 밟은 뒤, 근처 카페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서윤이와 합류해 공항으로 갔다.
―부산발 제주행 JA901 여객기의 탑승이 곧 시작되오니 승객 여러분들…
그리하여 도착한 부산공항.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가 되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6시가 넘을 듯.
“빠빠야.”
“응.”
“유니 안 무거워?”
―드르륵 드르륵
한 손으로는 서윤이를 업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캐리어를 끌었다. 내 가방은 그녀의 캐리어 위에 올라간 상태.
하지만 힘든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
‘6억. 6억. 6억. 6억. 6억.’
나에겐 지금 엄청난 버프가 걸려 있으니까.
“니 남자 창쟁이잖아. 힘 엄청 쎄.”
“안 무겁다곤 안 하네?”
“크큭! 깃털인 줄 알았어 바보야.”
“나아나아~♪ 나나아~♪”
아까 내가 사준 소고기 점심이 맛있었는지, 서윤이가 양 다리를 동동 구르며 내 머리에 입을 쪽쪽 맞췄다.
“아 눈꼴셔. 누군 연애 안 하나. 왜들 저래 공항에서? 차라리 모텔을 가지.”
“미쳤나봐. 여자 끼 너무 부린다. 재수 없어 진짜. 가슴만 존나 커가지구.”
“남자 새끼 힘 죽인다. 헌턴가 봐.”
우릴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눈치가 보였다.
나와 서윤이는 잽싸게 움직여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렸다.
“…어? 빠빠야! 저기. 저기 봐봐.”
크로아상과 커피를 맛나게 먹고 있던 때였다.
우리 두 사람의 시야에, 익숙한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킬리 수녀님! 안녕하세요.”
“미다 자매님, 여기서 또 뵙네요.”
“…….”
킬리 레베카 퍼시벌.
검은 수녀복과 검은 베일을 쓴 섹시한미녀 수도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야 얘… 설마 나 따라온 거?’
내 불편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두 여자가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수녀님도 제주도로 돌아가세요?”
“네. 일정을 모두 마쳤거든요.”
“그러시구나. 수녀님 혹시 빵 좀 같이 드시겠어요? 따뜻해서 맛있는데.”
“감사해요, 미다 자매님.”
“…….”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킬리의 합류를 바라만 봐야 했다.
‘킬리가 제주도로 간다고? 얘는 집도 없나. 왜 이렇게 싸돌아다녀.’
[ㅋㅋㅋㅋㅋㅋ]
우리의 불편한 동거는 제주도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수녀님, 아카데미에 가시는구나? 혹시 학내 성당에서 또 미사를 보세요?”
아카데미셔틀 버스 안에서도.
“그렇답니다. 앞으로도 우리 미다 자매님과 또 뵐 수 있을 거에요.”
“신난다. 우리 매일매일 봐요, 네?”
“후흣. 그럼 저야 감사하지요.”
“…….”
그리고 학교에 도착해서까지 킬리는 우리와 떨어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어머! 수녀님, 저랑 설마 같은 방이세요?! 어떻게이럴 수가 있지. 대박이다, 우리 방 3명이라서 딱 한 자리 남아있었거든요.”
“이 모든 인연이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이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다음 날.
“주목. 중간고사를 앞두고 갑작스럽겠지만 좋은 소식이 있단다.”
시간은 월요일 1교시 직전.
중간고사 시험을 보지 않는 대신 수업진도를 나갈 거라는 담임교수의 아침조회를 겸한 HR 시간이었다.
<편입 생도: 킬리 레베카 퍼시벌>
“편입생이다. 우리와 같은 4대국제헌터아카데미인 영국의 웨스트 화이트West White에서 온 친구야. 킬리?”
“시스터 킬리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수도사의 신분이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2년 간 공부하게 되었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킬리 퍼시벌.
이 이상한 여자가.
전학을 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