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114. 제이와 달콤한 미인주 (7)
“심장이 꿰뚫리다니. 다시 짖어봐.”
킬리 퍼시벌은 차가운 분노를 드러낸 하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하리가 아닌 나를 나무랐다.
“김제이 당신… 알면 알수록 웃기는 사람이군요? 이런 괴물 같은 여동생을 곁에 두고도 그 따위 위험한 행동을 했었다니 정말 실망이네요! 나는 또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고…. 당신은 그 아서보다도 못한 사람이에요!”
[이쁜아! 그 욕은 너무 심하잖아!]
잠자코 있던 메리가 킬리에게 토를 달았을 때였다.
“야.”
하리의 목소리가.
지극히 가라앉았다.
“너. 이리 와봐.”
녀석이 천천히 우수를 들어올렸다.
―고오오오오오오오
마봉魔鳳 김하리의 오른쪽 집게손가락에 눈에 선연히 보일 정도의 검은 마력이 빠른 속도로 밀집되기 시작했다.
‘안 돼! 저건 안 돼!’
나는 다급했다.
지금 하리가 쓰고 있는 기술은 녀석이 독자적으로 개발해 특허 출원까지 앞두고 있는, 대인살상 전용 마법이다.발동 제한 보유 마력이 무려 95에 달하는, 초고위급 살상마법.
“마법사 주제에 지근거리에서 권사에게 싸움을 걸어? 웃기지도 않는군.”
짜게 웃은 킬리 퍼시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웅
그녀의, 지옥 대공작 단탈리온을 패죽였던 주먹에 아주 고밀도의 신성력이 글러브처럼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싸우지 말고 말로 풀어!’
마음이 너무 다급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변 모든 벤치가 들려버릴정도로 강력한 마력방출 때문이었다.
―드륵! 드르르륵!
내가 가진 61의 마력도 근접전사치고 많은 편이었지만, 하리가 보유한 97의 마력은 SSS랭크 대마법사의 그것과도 같다.
나는 움직이기는커녕 차마 입을 벌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
―고오오오오오오
―우우우우우우웅
S랭크를 진즉 초월한 막대한 마력과.
S랭크를 한참 넘은 고도의 신성력.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유형화된 검고 하얀 두 힘이, 전선을 형성하며 힘겨루기를 시작하려 했을 때였다.
“하리야! 제이 오빠!”
정적을 깨는 맑은 목소리가 우리의 우측에서 들려왔다.
“후흣! 하리야, 이거 봐라? 본관 특제 클럽 샌드위치. 내가 네 개나 사왔어! 오늘은 운이 아주 좋은 것 같아!”
그녀는 아이린이었다.
품 안엔 사기 더럽게 어려운, 선착순으로만 파는 샌드위치가 든 갈색 종이백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짙은 청록색 체크무늬가 옅게 들어간 타이트하고 짧은 생도복을 섹시 큐트하게 입은 모습으로 우릴 향해 발랄하게 뛰어오고 있는.
이 김제이의 영원한 아이돌.
“아아, 날씨도 너무 좋구. 시험도 잘 봤구. 오늘은 행복한 날인 것 같아.”
“…치, 행복은 무슨. 너 살찌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
―고오오오…
―우우우웅…
갑작스런 외부인의 출현에, 하리와 킬리가 동시에 힘을 거둬들였다.
“어머. 두 분 설마 다투고 계셨었나?”
우리 앞에 다다른 S랭크 힐러 아이린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참고로 그녀는 지난달에 S급에 도달했지만, 하리와 졸업시기를 맞추기 위해 이사실을 숨기고 있다.
“어쩜 이렇게 짙은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아주 본격적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린이 맑고 투명한 두 눈을 끔벅끔벅 뜨다가, 멍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물었다.
“제이 오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아이린은 싸움을 아주 싫어한다.
극히 우수한 힐러인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지, 천성이 너무 고와서 사람들 간에 갈등이 벌어지는 꼴을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싸움이 날 때마다 도도도 뛰어가서 말리는 그녀는, 그야말로 인간 갈등분쇄기나 다름없을 정도.
“아무 일도 없었구나? 그럼 좋네요.”
투명하고 선한 웃음을 머금은 아이린이 종이백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오빠, 드세요. 이거 드셔보신 적 엄청 오래 되셨죠?”
“응. 작년 겨울인가? 아이린이 줬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사기 너무 어렵더라구. 고마워 정말. 시험 끝나고 우리 또 영화보기로 했지? 내가 그때 정말 맛있는 거 사줄게.”
내가 싸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맞장구를 쳐주자, 아이린이 고마움의 감정이 듬뿍 실린 눈웃음을 쳤다.
“후흣. 기대할게요. 자, 하리도.”
“너는 맨날 뭘 이렇게 사와. 그렇게 돈 막 쓰다가 우리 클랜 언제 차릴래?”
“뭐 어때. 맛있으면 됐지.”
“하여간 입맛은 고급이어가지구. 나중에 너한테 클랜 통장은 절대 못 맡기겠다. 먹다가 잔고 거덜나겠네.”
“그때는 또 벌면 되지 않겠어?”
미식가 아이린이 빙그레 웃으며 농담―사실은 100% 진담이다―을 했다.
“음, 아직도 하나가남았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회색 눈을 깜박깜박뜨며 어색하게 우리 옆에 서 있던 킬리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수녀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혹시 괜찮으시면 샌드위치 하나 어떠세요? 본관 6층 매점에서만 파는 가정식 클럽 샌드위치인데, 아주 맛이 좋거든요.드셔보시겠어요?”
155cm인 아이린이라, 둘 사이에 거의 20cm에 가까운 키 차이가 났다. 그녀가 고개를 이마안큼 들고 킬리 퍼시벌의 눈을 보며 물었다.
“어, 어… 그게….”
아이린이라는 아이의 캐릭터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착해서 당황한 듯, 킬리 수녀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자, 자매님께… 여,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릴게요.”
―타닷
샌드위치를 받아든 뒤, 등을 돌려 빠른 보폭으로 사라져버렸다.
“므야.”
하리가 샌드위치를 배어먹으며 어이없다는 듯 킬리의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으음! 아이린 새 추종자얌?”
“얘는. 그런 말하면 못 써.”
“황당하잖아. 내 뚝배기 당장이라도 깨버릴 것처럼 사납게 굴던 여자가.”
“내 말이.”
하리 말마따나 나도 킬리 쟤는 대체 뭔가 싶었다.
아무튼 갈등이 해소됐으니 잘 됐다.
나는 하리, 아이린과 함께 벤치에 앉아 4월의 햇살을 맞으며 점심을 먹었다.
“언제 먹어도 이거 진짜 맛 특이해. 소스를 뭘 쓰는 거지?”
“모르겠어. 여쭤 봐도 사장님께서 절대 말씀을 안 해주시더라구.”
“얘들아, 음료수 사왔어. 하리는 콜라, 아이린은 사이다 맞지?”
우리 셋이 사이좋게 샌드위치를 박살냈을 무렵이었다.
“오빠.”
“어?”
내내 웃고 떠들던 하리가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통보했다.
“밤에 나 좀 봐.”
그 눈빛에서 절대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이런 젠장.’
내가 왜 ‘갈등이 모두 해소됐다’고 생각했었던 거지. 정작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그래. 이따 보자.”
“방에서 기다릴게.”
“오빠, 안녕히 계세요. 오늘 남은 시험도 꼭 잘 보시구요?”
“응, 아이린이랑 하리도 시험 잘 봐.”
본관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배웅해주며, 나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안고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냐 이걸.’
하리에게 비밀이 뽀록나게 생겼다.
**
전공인 창술 시험을 잘 치렀다.
“좋아! 확실히 각성을 하고 나니까 실력이 피어나는구만. 잘했다! 다음!”
월요일인 오늘은 2학년 전공과목인 본국창법II의 초식을 테스트하는 날.
내 창술에 평소 불만이 참 많던 에비뉴 할배가 날 칭찬할 정도로 시험을 괜찮게 봤다.
‘시험 끝났으니까 이제 가봐야겠네.’
시간은 어느덧 오후 다섯 시 반.
나는 땀에 젖은 몸으로 연습용 장창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내 방으로 갔다.
―띠띠띠 띠리릭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서 하리가 잠을 자고 있었다.
짧은 생도복 치마와 마법시료가 묻은 흰색 와이셔츠가 올라가든 말든. 내 베개 하나를 베고, 나머지 베개 하나를 옆으로 끌어안은 자세로 색색 꿈나라 여행에 빠져있었다.
‘귀여운 놈.’
우리 하리는 객관적으로 라라나 서윤이, 아이린 못지않은 절세미인이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아이와도 같았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겨울잠을 자듯 옆으로 웅크려 자는 모습이 웃음을 나오게 했다.
“너는 역시 자는 게 제일 예쁘다.”
소피아가 새로 빨아 장에 넣어둔 얇은 여름용 이불을 꺼내 덮어주었다. 열이 많은 하리라서, 두꺼운 이불을 덮으면 이내 걷어 차버리곤 했으니까.
―쏴아아아아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밖으로 나왔다. 하리가 자고 있는 덕에 그냥 빨개 벗고 나와서 드로우즈를 입었다.
“으음….”
그때, 하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반바지와 반팔 티를 입으며 눈짓을 하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에서 물을 따라, 구석에놓아둔 미지근한 물과 섞어서 주었다. 찬물 때문에 배탈이 나면 안 되니까.
“자.”
“아아―.”
“야 임마.”
침대 위에 올라가 하리의 목을 받쳐주고 물컵을 대주었다. 애처럼 꼴깍꼴깍 잘 마시는 모습을 보니까, 또 물 마시는 걸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넌 대체 언제 클래.”
“내가 뭐.”
“됐다. 말을 말자.”
우리 하리는 목이 말라도 식사 때가 아니면 어지간해선 물을 잘 안 마시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녀석이 500ml는 되는 물을 원샷하고 나서야 침대에 바로 누웠다.
“오빠.”
“짖어. 왕왕, 하고.”
하리가 돌직구를 던졌다.
“토요일에 한 번. 죽었었어?”
“…….”
죽었냐, 고…… 물어보네.
[말 선택 잘해. 김하리는 너의 가족이다. 어설프게 대하면 서로 상처가 돼.]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농담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메리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긍정이 떨어짐과동시였다.
“역시 그랬구나.”
또르르.
하리의 옅은 갈색을 띄는 눈에서 가느다랗고 투명한 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잠깐 동안 눈물을 보인 녀석이 바로 누운 자세에서 천장을 보며담담하게 자신이 느꼈던 점을 고백했다.
“금요일부터 이상했어. 마음이.”
“오빠한테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어.”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인류 최초의 SSS급 헌터이자 모든 인류가 존경하는 신세기의 어머니 김혜린 사후. 최고의 마력 재능을 가졌다고 세상 모든 이들이 말하는 우리 하리다.
녀석의 ‘느낌’은 그냥 느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다.
우주의 마나가 세상에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하리의 마력회로에 속삭이듯 전해주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하리는 내가 부산에 가 있는 동안,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끈질기게 톡을 해왔었다.
“누가 그랬어?”
하리가 바싹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단탈리온이라는 놈이야. 72악마 군주 중에 그놈, 알지? …나는 그놈들을 봉인하고 있어. 시스터 킬리는 그 와중에 만나게 됐고. 그녀가 날 구해줬지.”
“어떻게.”
“응?”
질문을 이해 못해서 묻자, 하리가 눈을 살짝 깔아 나를 올려다봤다.
“72악마와 같은 개념화된 존재들은 현실에 쉽게 현현할 수 없잖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빠가 그 새끼한테 당했냐구.”
“음, 하나하나 말해줄게. 얘기 길어질 것 같은데 물 더 마실래?”
“오빠는 누워 있어.”
하리 말대로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러자 녀석이 몸을 돌리고, 내 귓가에 손을 뻗어 귀걸이인 척 하고 있던 메리를 살짝 집어.
“물은. 니가 좀 갖다 줄래.”
허공에 던져버렸다.
[…………………헐.]
아주 깜짝 놀란 메리가 바닥에 떨어지려던 몸을 허공에 둥둥 띄웠다.
나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예상 못했던 정체 파악과 커밍아웃에, 메리가 말까지 더듬으며 어설픈 농담을 했다.
[…우, 우효오! 니 여동생 진짜 대박인데? 제주도내 제일마법사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걸 수도?]
우웅우웅, 하는 녀석의 모습에 하리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안들리니까 말해도 소용없어. 물이나 갖다 줘. 너도 에고 소드면 우리 오빠 쫄따구인 건 맞을 거 아냐.”
[야! 우린 파트너쉽 관계거든?!]
―화아아아아앗!
메리가 한손장검 크기로 돌아와 하리에게 물을 갖다 주었다.
하리는 “고맙다”하고 짧게 말한 다음, 메리의 검병을 톡톡 치면서 “확실히 작은 게 더 예쁘네. 커지니까 녹슨 게 많이 보여서 꼬져보여.”하고 말했다.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
내가 멍한 얼굴로 묻자, 하리가 물을 한 번에 원샷한 뒤 대답했다.
“오빠가 얘를 귀에 차기 전부터.”
“…다음이 아니라, 전?”
“그래, 이 모지리야.”
하리가 베게에 얼굴을 대고, 옆으로 날 마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겨울방학 때부터 오빠한테 암시가 걸려 있었거든. 한… 년초부터? 그런데 오빠가 얘를 귀에 차고 다니자마자 암시가 사라졌어. 그 직후 각성을 했고, 오빠의 본래 자질을 고려해봤을 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게 강해졌지. 전부 얘 덕분인 거 맞아?”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몸의 암시를 간파했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
하리가 우웅우웅 떠는 메리를 품에 안으며 조용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무튼 얘가 범상치 않은 애겠구나 싶었어. 그리고 얠 만나고부터 오빠가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더라고. 그걸 보면서, 심령이 연결된 에고소드랑 얘기를 하고 있겠구나 싶었어.”
“…그랬… 구나.”
다 알고 있었네. 엄청 뻘쭘하다.
역시 하리는 하리야.
“오빠.”
“응.”
하리가 환하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어때. 나 방금 좀 섹시했어?”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하리 옆구리에 간지럼을 태웠다.
“그래! 니 팔뚝 개굵다 이년아! 어떻게 그렇게 나한테 시치미를 떼?!”
“꺄아아아! 오빠 하지 마아! 오빠 쫄따구한테 나 베인다구! 꺄아아아!”
[안 베거든?! 넌 이 몸을 뭘로 보냐?!]
한참을 셋이 놀다, 내 여러 사정들을 얘기해주다, 치킨을 시켜먹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3학년인 하리는 애초에 시험이 거의 없었고, 나 같은 경우는 내일 셤이 효자과목인 헌터법이라 여유가 많았다.
그러다 악마 군주 얘기를 넘어, 이번에는 내 여자 얘기까지 화제에 올랐을 때였다.
“오오… 라라 교수님에 이어서 육서윤까지. 울 모지리 지인짜 대단한데…?”
하리가 많이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응. 그러네. 진짜 많이. 대단…하다.”
내가 라라-서윤이와 동시에 정식으로 사귀게 된 게 많이 의외이긴 했나보다.
녀석이 원래 안 먹는 퍽퍽살까지 뜯어먹으면서 연신 감탄을 토해냈으니까.
“운 좋게 그렇게 됐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해. 아무리 악마 군주 건이 얽혀있다지만, 라라랑 서윤이가 뭐가 아쉬워서 나랑 사귀냐. 기적이지, 기적.”
나는 아까 하리가 내게 건네준 닭 날개를 뜯어먹었다. 그러자 하리가 히죽히죽 웃으며 날 놀렸다.
“그럼 아이린은 어쩌게. 포기야?”
“몰라. 이미여자가 둘이나 생겨버렸는데 어떡해 그럼.”
“왜 둘이야? 공상계라는 곳에서 다른 여자들도 덮쳐야 한다며? 섹스 섹스 파워 섹스!”
“그거 하지 마! 니가 메리냐? 넌 얼굴값 좀 해 제발.”
“크크크크!”
[ㅋㅋㅋㅋ]
한참을 웃던 하리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불렀다.
“오빠.”
“왜!”
“오빤 근데, 그거 아직 모르지.”
“뭐.”
녀석이 웃겨 죽겠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아래층을 가리켰다.
“오빠 비밀. 설마 나만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어?”
“…뭐?”
하리가 생도복 치마 아래로 뽀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치킨을 뜯으며 핀잔을 줬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 모지리야. 신연 부장이랑 부부장. 보이는 거랑 다르다구. 걔네 보통 아니라니까?”
……설마.
“이그.어쩌면 신연에 오빠를 끌어들인 것도, 우연이 아닐 수 있어. 응! 다른 데가 아니라 ‘그’ 신연이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다.”
“…우연이 아니면.”
하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걔들이 알겠지.”
**
다음날 새벽이 밝았다.
누워서 같이 시험공부를 하다가 깜박 잠들어버렸는지, 품속에서 하리가 눈을 감고 색색 가는 숨을 흘리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은 나이를 먹어도 바뀌는 게 없어. 다른 사람들이랑 잘 때는 어떡하려고….’
자다 더웠는지 속옷만 입고 있는 녀석의 몸을 이불로 잽싸게 감싸주었다.
그리고 씻지도 않은 채 방을 나왔다.
‘있겠지.’
목적지는 1층.
“니들 여기 있었냐.”
식당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신연 부장 낸시와 부부장 미아가 꾸벅꾸벅 졸며 연구 자료를 보고 있었다.
“미아, 보급병이 왔다.”
“제, 제이… 아, 안녕. 이틀 만에 보, 보네? 부, 부산은… 어, 어땠어?”
손을 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니들…혹시 내 비밀 알고 있었냐?”
“비밀?”
낸시가 검은 뿔테 안경을 벗고졸린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안경을 쓰며 아주 대수롭지않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언급한 비밀이라는 것이 혹시.”
“신연 총무 김제이. 즉, 최근 발생한 주요 신이 사건들마다 아주 깊숙이연관되어 있는 이스트 블루의 생도인‘그’와 관련해.”
“신연 지도부에서 극비리에 연구 중인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면. 알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이사건연구부 부장.
낸시 드레이크 블랙베리가.
“그도 그럴게 우리 신연은―”
빙그레 웃었다.
“총무 김제이. 널 위해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