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133. 제이와 봄꽃 축제 (11)
예선 결승전이 마무리 됐다.
관리 본부를 나와, 제4 야외 훈련장 객석에서 기다려준 지인들이 찾았다.
“오올~ 모지리! 결국 본선 왔네?”
평소엔 쿨하면서 못난 내 일에는 성격 급한 우리 하리가 나보다 더 기뻐하는 기색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슬리퍼에 흰 양말 뭐야. 지지잖아.”
“이거 봐라. 모지리 벌써부터 적폐세력 견제 들어왔어! 오빠 아직 구룡칠봉 된 거 아니거든?”
“딱 기다려 너. 내가 라다은 복수 대신해준다. 빙봉 친위대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아하하! 눼에 눼에~ 그러시던가.”
“새끼, 쪼개기는.”
하리의 가녀린 몸을 안아주었다.
내 가슴에 이마를 꾹 댄 녀석이 물기 배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축하해.”
가식 하나 없는 진심에 가슴이 울컥했다. 애기의 허리를 더욱 세게 감쌌다.
“미안하다. 그 동안 걱정시켜서.”
“지금돈데?”
“어쭈. 본선에서 나한테 지고 울지나 마라 너.”
“모야. 만나면 오빠 나 때릴 거야?”
어떤 경우에도 그럴 수는 없겠지.
내가 화는커녕 짜증만 내도 송아지 같은 눈이 그렁그렁해지는 하리인데.
“아니. 너한테 기권하라고 조를거야.”
“바보냐.”
“우리 꼬맹이. 오빠 바본 거 몰랐어?”
“……알아.”
한참을 안고 있다 녀석을 놔주었다.
마음이 벅차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가 발갛게 변한 하리가, 땀이 식어 끈적끈적한 내 볼을 양 쪽으로 잡아당겼다.
“많이 컸네 김제이. B급도 달고…. 누구 모지린지 아주 잘 컸어… 응.”
“눈치챘냐.”
“치, 오빤 내 눈이 장식인 줄 알아? 척 하면 척이지. 와~드디어 우리 모지리가 일류 창수가 됐네! 원장 쌤 드럽게 좋아하시겠다.”
하리는 티를 안내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내가 본선에 오른 게 어지간히도 좋은지, 삼선 슬리퍼에 삐죽 나온 귀여운 작은 발을 연신 꼬물거렸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을 때나.
‘…….’
혹은 반대로 나한테 아주 미안한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저렇게 입술을 가운데로 모으고발끝을 동동 구르곤 했다.
“그늘로 갈까? 사람들 기다린다.”
“응! 오빠 빨리 와.”
하리가 빙긋 웃으며 하얀 와이셔츠에 감싸인 가느다란 팔을 내 팔에 껴왔다.
‘…뭐야 얘. 나 몰래 보증 섰나?’
[팔짱을_당한_평범한_오빠의_반응.gif]
‘그냥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뒤통수가 싸했지만 오늘만큼은 동생의 애교를 눈감아주기로 했다.
‘사고 친 거면 나중에 자진납세 하겠지. 선사고 후고백이라는 게 문제지만.’
하리와 함께 아이린 선우엘리사가 기다리는 훈련장 옆 그늘에 갔다.
“정말 축하드려요, 오빠!”
“형, 믿고 있었어요. 푹 쉬세요.”
“오빠~! 엘리사도 응원 왔어, 흑흑.”
“모두 와줘서 고마워. 저녁에 내가 소고기 구워줄게. 밤에 3관에서 모이자?”
한 턱 쏜다는 말에 세 친구가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형, 본선 진출 격려금 얼마나 된다고 소고기를 쏘세요.”
“오빠… 엘리사는 안창살 구워줘!”
“좋네요. 오늘 마트에서 소고기 특가전이 있던데. 엘리사 양 위로를 겸해서 맛있는 고기 함께 먹어요.”
“맞아, 우리 엘리사는 아깝게 떨어졌지? 어뜩하냐, 내가 오늘 엘리사 기분 제대로 풀어줄게.”
“흑흑! 역시 제이 오빠밖에 없어. 아이웨이는 놀리기나 하구….”
친구들과 그저께 예선에서 떨어진 엘리사를 위로해주고, 본선에 관한 이야기와 축제 준비의 건을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존나 약해, 여행 동아리의 수치!!
―못생겼다, 아이웨이!!
―47분 경기 타임 실화냨ㅋㅋㅋ 농구 시합인 줄 알았다 아이웨이!!
나를 제한 또 다른 예선 돌파자의 이름이 훈련장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축하한다, 임마.’
나는 어쩌면 다음 주 본선에서 마주치게 될지 모를 친구의 건투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해주었다.
[→아이웨이: 요시모토 등신 상대로 15분 49초?ㅗㅗ 이 대형께서는 콜라의 탄산이 빠지기도 전에 돌아오마ㅋㅋ]
놈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까톡!
―까톡!
―까톡!
―까톡!
―까톡!
[→유니♥: 사랑해 여보ㅠㅠㅠㅠㅠㅠㅠ 느므느므 멋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라라 마르티넥: 정말 축하해 아가야. (아주 아주 커다란 하트 스티커) (눈을 반짝반짝 거리는 캐릭터 스티커)]
[→낸시 드레이크 블랙베리:(꺼어어어억, 하는 이미지 첨부 파일)]
[→미아 파레스: 예선 결승전도 직관 못 가서 미안해 제이야ㅠ 그래도 오늘도 마이튜브 라이브로 열심히 응원했어! 내가축하선물로 마자maza를 해봤거든? 이따 저녁에 같이 먹자 :D]
[→소피아: 오늘도 극히 모던하면서도 절제된 퓨어한 창술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주제도 모르는 섬나라 난쟁이의 음식물분쇄기에 리틀보이와도 같은 드래곤 피쉬 블로를 작렬하셨을 때 이 부족한 메이드의 양자센서는…]
동료들에게도 축하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본선 진출의 흥분이 모두 가시기 전, 친한 사람들에게 모두 정성을 들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시카와 교수님, 아나, 조쉬, 구연하, 잭슨, 에비뉴 할배랑 또 누가 있더라. …아! 나 미쳤나봐.’
그리고 그 대상에, 그 분이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리야.나 잠깐 전화 좀.”
“희망원?”
“어.”
“처언~천히 하고 와.”
하리가 입 꼬리를 씩 올렸다.
녀석의 청순한 얼굴이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꼬꼬마의 그것으로 변했다.
“우리는 누구누구 씨 팬클럽이나 가입하고 있을 테니까.”
“팬클럽?”
“그런 게 있어. 지금 가입하면 가입비 면제래. 뭐, 나중에 가입해도 걔가 설마 나한테까지 삥 뜯겠냐 싶지만.”
[ㅋㅋㅋㅋ]
“아하하하!”
“하리야, 오빠 그만 놀려.”
“크크. 하리 선배님, 이 댓글 좀 보세요. 진짜 웃겨요.”
나는 또 여자들끼리만 아는 얘기가 시작됐구나 싶은 마음에 ―재밌는 점은 이런분위기일 때마다 선우가 늘 잘도 섞인다는 거였다―, 대꾸도 안 하고 훈련장 구석으로 갔다.
‘담배 냄새다.’
내가 희망원에서 가장 좋아했던 공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릿한 악취를 맡으며.
-[…크흠! 어. 제이냐?]
“예, 원장님.저 있잖아요.”
나의 영웅에게.
승전보를 바쳤다.
**
예선 결승전 당일인 어제.
토요일 저녁은 광란의 밤이었다.
―총무, 사람이 너무 많다.
―김제이 또라이야! 너 마늘 구워먹을 거지? 나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야외로가자.
―(끄덕)
부장 낸시와 까칠이 브랜드, 하킴 형님의 권유로 신연 부실 앞마당에 열린 파티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아카데미 내에서 한 명만 빼놓고, 나랑 친한 모든 사람이 부실 앞마당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벌인 것이다.
―와… 여기가 방송국이냐 학교냐.
아이웨이 말마따나 멤버가 워낙 대단들 했다. 얼마 안 되는 우리 남자들은 은근히 주눅까지 들었을 정도.
구룡칠봉만 해도 하리, 아이린, 아나 코스타, 안나 살라예바까지 네 명에.
애욕과 미의 화신 서윤이와 메리 피셜 인간계 최강급 낸시. 그리고 우리 귀여운 미아, 소피아, 엘리사도 함께였다.
―김제이 파티한다며. 술 갖고 왔어.
―아이웨이 서운하다? 왜 이런 자리 있으면서 나 안 불렀어. …근데 너 김제이랑 친해?
설상가상 밤이 깊어가자, 나와 아이웨이의 지인들이 신연 부실로 속속 모여들어 어젯밤은 정말 재미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봄꽃 축제가.
하루 일찍 열린 것만 같았다.
각성을 하지 못했던 탓에, 작년 봄가을 축제는 한 번도 즐겨보질 못했었다.
축제를 구경하다가도 마음이 울적해, 이내 훈련장으로 돌아갔을 뿐.
―이런 게… 진짜 축제 분위기구나.
시원한 온기가 담긴 봄바람을 맞으며.
나는 그날 밤을 참 행복한 기분 속에서 보낼 수 있었다.
**
본선 64강 하루 전날인 일요일.
즉 오늘은, 훈련 일정이 없다.
[하루는 아예 푹 쉬어야지. 70의 정력이 있으니 몸과 마력의 피로는 적다고 해도, 정신의 피로는 남아 있잖아.]
“그러려고.”
―쏴아아아아
샤워를 하며 귓불에서 메리를 떼어내 뽀드득 뽀드득 녀석을 닦아주었다.
우웅, 떨며 좋아하던 메리가 장난기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냐.]
“뭐 어때. 그냥 영화만 보는 건데.”
[본선 전에 이쁜이가 네 멘탈을 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하는 말이다. 고 녀석, 겪어보니까 수녀치곤 성격이 너무 다혈질이야.]
“그건 존나 인정.”
오늘 오전과 오후에는 약속이 있다.
우선 오전은, 킬리 퍼시벌과 영화를 보기로 말이맞춰졌다.
그녀가 먼저 내게 제의를 해왔다.
[→킬러 퍼씨발: 지난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빚을 갚도록 하죠. 부담 갖지 마세요. 담임교수님이 주신 영화표를 당신에게 쓰는 것뿐이니까요.]
말로는 저번에 식대를 대신 내준 빚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내가 볼 땐 그게 다가 아니다.
“걔 영화 같이볼 사람 못 찾은 거 같지?”
킬리 퍼시벌은.
아직 친구가 없다.
[백 프로다. 룸메이트인 육서윤도 그랬잖아? 잘 때 말고는 아카데미 내성당에만 있다며. 담당 신부도 일요일 미사 때만 오는 무인 성당인데, 함께 근무할 동료 성직자도 없을 걸.]
“하긴. 게다가 영화표 유효기한 4월 말까지면 이제 며칠 안 남았지.”
물론 킬리 퍼시벌은 S랭크 헌터에다 명색이 수녀이니, 고작 공짜 영화표 좀 버리면 어떻겠냐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킬리의 나이가 18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담임교수에게 전교 1등을 했다고 받은 선물이야. 의미가 남다를 수 있어. 나만 해도 어떻게든 표 안 버리려고 꾸역꾸역 하리한테 넘겼으니까.’
뭐 어쨌든 이런 연유로 두 시간 뒤에 킬리와 함께 영화를 보게 됐다.
[근데 이쁜이 되게 웃긴다. 아무리 네놈이 꺼려져도 집합 장소를 영화관으로 잡을 건 뭐야. 츤츤력 오지네.]
“내 말이. 어차피 자기도 셔틀 버스 타고 갈 텐데. 같이 가면 좀 좋아?”
―쏴아아아아아…
샤워를 마치고 오랜만에 나름 멋을 부린 뒤 아카데미를 나왔다.
4월 26일 오전 9시 30분.
제주시 백제시네마.
그리하여 나는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세상에… 무슨 10시 영환데 45분에 약속을 잡아. 킬리 센스 없네.’
나는 영화관에서 무조건 팝콘을 사야 한다. 배가 아무리 불러도 그렇다.
팝콘을 좋아해서라기 보단, 그걸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근사한 여가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흐규흐규. 짠내나는이유로구만.]
메리 말이 맞다.
이건 다 내가 가난했던 탓에 생긴 취향이다. 영화관에 오는일 자체가 연례행사인 삶을 살아왔었으니까.
‘그래도 이젠 맘대로 먹어야지. 신연에 절반을 맡겨도 아직 3억이나 있어.’
[배 터져 뒤질 때까지 먹어라. 500원 추가해서 캬라멜 팝콘도 먹고, 버터구이 오징어랑, 가성비 개창렬인 영화관 핫도그도 먹어라.]
‘그래야겠다. 아침도 안 먹었는데.’
관내 매점 팝콘 대기 줄에 서려고 했을 무렵이었다.
“어?”
앞쪽에서 킬리 퍼시벌을 발견했다.
오늘도 평소처럼 정갈한 수녀복을 입고,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그녀를.
‘…뭐야. 수녀도 팝콘 먹나보구나.’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그녀에게 얼른 다가갔다.
“킬리. 빨리 왔네?”
그녀가 깊고 아름다운 회색 눈으로 내 얼굴을 힐끔 본 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군요.”
“팝콘 때문에. 여기 주말에 사람 많이 와서 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이하동문이에요.”
영화를 보려고 팝콘을 사는 수도사.
그것도 굉장히 예쁜 수녀.
이 이색적인 광경이 영화관에서 끌고 있는 어그로는 대단히 컸다.
“야, 저 수녀님 봐. 되게 젊으시다.”
“아주 고우셔. 근데 옆엣놈은 뭔데 수녀님께 반말이야? 싸가지 없이.”
“뭐 어때. 잘생겼잖아. 친군가보지.”
주변 사람들이 연신 우리를 보며 수군거릴 정도였으니까.
“…크흠! 킬리 수녀님, 좌석에 앉아 계시죠.영화를 보여주시니 팝콘은 제가 사겠습니다. 음료는 뭘로?”
“왜 갑자기 말투가 공손해졌죠.”
나는 새삼 킬리에게 미안했다.
“생각해보니까 수녀님 나이를 알고 나서 바로 말을 놓은 게 무례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말에는 존대어가 있죠. 어쩐지, 한동안 내내 예의 없는 말투로 통역 되길래 제 <만물의 소리>가 고장이라도 난 건가 싶었어요.”
“아니, 그게….”
“됐습니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 관습을 따라야죠. 연장자이시니 말씀을 편하게 하셔도 돼요.”
영국에서 오신 수녀님께서 탐탁찮은 기색으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명색이 성검의 계약자가 이렇게나 강단이 없어서야. 메를리누스님께서도 걱정이 참 많으시겠어요.”
[전혀? 얘 은근 상남자야.]
나는 웃음을 머금고 말을 전했다.
“메리가 괜찮다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군요.”
혼자만의 생각에 흠뻑 취한 킬리 수녀가 걱정이 듬뿍 담긴 눈빛을 했다. 그녀가 메리를 보며 성호를 그었다.
“걱정마시길, 성령이시여. 이 주님의 미천한 종이 성스러운 정령께 반드시 진체를 되찾아 드리겠나이다.”
[말은 고마운데, 이쁜이 너 레라지에 못 이겨. 걔는 성배의 신성력이 안 먹히거든. 1600년 전에도 그랬어.]
이번에는 반대로 웃음을 꾹 참고 말을 전했다.
“킬리, 무리하지 말래.”
“…당신, 자꾸 그렇게 장난만 칠건가요?”
킬리가 예쁜 아미에 가는 주름이 만들어졌다.
“성령 메를리누스님께서 당신이 이런 가벼운 행동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시겠어요! 당신이란 사람은 당최―”
그녀가 허리에 손을 짚고, 한 손으로 손가락을 흔드는 수녀선생님 같은 자세로 날 나무라려 할 때였다.
“제이 오빠. 여기서 뵙네요?”
아이린.
이따 오후에 만나기로 한 나의 아이돌이 영화관에 나타났다.
‘와, 오늘도 진짜 예쁘다.’
오늘의 아이린은 유독 아름다웠다.
봄은 여신 같은 노란 원피스를 하늘하늘 입었고, 굽이 높지 않은 하얀 힐이 그녀에게 깨끗한 이미지를 더해주었다.
길고 검은 생머리는 서윤이나 라라 못지않은 극히 아름다운얼굴 옆으로 그림처럼 내려와, 그녀의 가녀린 하얀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린이다! 구룡칠봉 아이린이야!”
“와, 대박 개쩐다. 쟤 사람이야?”
“아아, 저 사람들 이스트 블루 헌터들이구나. 어쩐지, 남자고 수녀고 몸태랑 얼굴이 남다르더라.”
SNS팔로워 수백만의 유명인인 아이린이 자신을 알아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예의바르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빠. 영화를 보러 오셨나 봐요?”
품이 꽤 넓은 노란 원피스임에도 아이린의 G컵 거유의 존재감은 대단히 컸다. 나는 시선 돌리느라 짧은 순간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으응! 이따 너 만나기 전에 잠깐.”
“후흣, 그러셨구나. 저도 오후에 오빠를 뵙기 전에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서 왔어요.”
협회 공인 제주도내 최고의 힐러 아이린이 선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 옆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킬리 수녀님께서는 오늘 제이 오빠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오신 건가요?”
“아… 아, 그게…….”
킬리 퍼시벌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스칸디나비안계열인 라라와는 달라도 그녀 역시 순수 백인인지라, 거의 술에 취한 사람의 그것처럼 빨갰다.
“예, 자매님.”
잠시 말을 고르던 킬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 딴판인 모습으로 아이린의 질문에 대답했다.
“예선전에 지친 김제이 생도에게 여가 시간을 줌으로써, 본선에서 그가 더 영광된 활약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영화 관람을 제의하였습니다.”
…이 수녀님 보소?
지금 누구 아이돌한테 잘 보이려고 이래.
‘아이린은 나랑 더 친하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