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135. 제이와 봄꽃 축제 (13)
이스트 블루 대경기장 출전자 대기실.
총 64명의 본선진출자들이 추첨 행사를 진행할 행사 관계자들을 기다렸다.
“조쉬, 마시겠나.”
“땡큐 타이런. 컨디션은 어때.”
“평소와 같다.”
“그거 안 좋은 뉴슨데?”
“다른 놈에게 떨어지지 마라. 졸업하기 전에 결승에서 한 번은 붙어야지.”
“하하! 나도 그러고 싶은데, 김하리가 허락을 쉽게 안 해줄 것 같네.”
“동감이다, 드래곤 같은 년. 작년 가을과는 비교조차 안 돼.”
묵룡 타이런 오닐. 유룡 조쉬 맥킨지.
“하리야. 아이린은 어디 있을 거래?”
“몰라. 요리연이랑 보고 있지 않을까. 넌 생리 끝났어?”
“약 먹었지 바보야. 그리고 목소리 좀 줄여, 창피하지도 않니?”
“이즈비니~쩨Извините!”
마봉 김하리. 섬봉 안나 살라예바.
“다은아. 저기 TV 왼쪽 봐봐. 니 팬들 되게 많이 왔다. 올해는 플랜카드가 더 화려해졌는데?”
“비, 비웃지마! 그들은 단지 화자가 죽음의 신, 혼돈의 파괴자가 되길 바라는 가련한 영혼들일 뿐이라구!”
“그냥 친구들 왔다고 한 게 왜 비웃는 게 되는지 모르겠네.”
화봉 아나 코스타와 빙봉 라다은.
아이린을 뺀 현 구룡칠봉의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대기실을 울렸다.
“여유들이 넘치시는군.”
“언제까지 저렇게 구나 보자고.”
“타이런만 아니면 돼. 타이런만.”
“김하리 개 같은 년…너 두고봐.”
예선을 돌파한 B랭크 이하 생도들.
그리고 학내에서만큼은 구룡칠봉 못지않게 유명한 A랭크 경쟁자들이, 대화 없이 홀로 전의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긴장을 녹이고 있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만한 놈이 없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아까 하리가 건네준 껌을 씹었다.
아직 추첨도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팽팽하게 당겨진 대기실의 공기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이 중 나보다 랭킹이 낮은 놈은.
단 한 명도 없다.
악마의 권능을 딱 한 번만 쓰고 예선을 돌파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결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목이 탔다.
―드르륵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의외의 인물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여기들 계셨구나? 아하하! 일찍 온 보람이 있네~.”
그는 나와 메리가 잘 아는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본선진출자 생도 여러분!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저는 SBC 기상캐스터 겸 아나운서로 재직 중인 윤이랑입니다!”
자간의 숙주로 추정되는 윤이랑.
그녀가 대기실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
윤이랑.
지상파 채널인 SBC의 기상캐스터이자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비각성자다.
하지만 올 스물여섯인 그녀의 얼굴은 생기를 머금은 꽃망울처럼 어리기 짝이 없었다.
‘실제로 보니까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하다. 몸매가 늘씬해서 그렇지, 얼굴은 엘리사 정도로 어려 보여.’
어두운 금발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싶은 우리 귀여운 엘리사는 얼핏 보면 중학생 정도로 보인다.
노안이 빨리 오는 백인임에도 체구가 작고 젖살이 여전히 통통해서 그렇다.
그러나 윤이랑은 엘리사와 달랐다.
“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구나. 제가 오늘부터 육일 간 봄꽃 축제 본선의 사회를 맡게 됐어요. 여러분들의 멋진 활약, 생생히 전달해드릴 테니까 염려 푹 놓으세요. 아셨죠?”
간드러지는 듯하지만 또렷하고 맑은. 그리고 듣고만 있어도 큰 신뢰는 주는 성숙한 목소리.
분홍색 여성 정장을 화사하게 입은 몸의 태는 한창 물이 오른 20대 중반의 섹시하면서도 지적인 그것이었다.
10대의 귀엽고 순수해 보이는 얼굴과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어른스러움.
윤이랑은 상반된 매력을 동시에 가진 여자였다.
[숙주가 맞다. 확률은 100%. 자아는 유지 중이지만 침식이 꽤 진행됐어.]
메리의 확언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관찰했다.
윤이랑의 보는 사람이 다 힘이 나는 듯한 넘치는 생기는, 남성의 정액을 영약화 한다는자간의 권능이 아니고서야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와~ 정말 다들 선남선녀들이시다! 저 이스트 블루 생도 분들 너무 팬이어서, 평소에도 기사나 SNS 항상 찾아보고 있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면 악수 부탁드려도 될까요?”
윤이랑이 생도들에게 다가와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대기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는 현 학내 랭킹 1위, 묵룡 타이론 오닐.
“안 될 거 없지.”
228cm 130kg인 거구의 흑인 남성이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손을 내밀었다.
윤이랑이 반색을 하며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을 쥐고 흔들었다.
“꺄악~! 묵룡님이시구나! 실제로 뵈니까 너무 훈남이시다. 혹시 타이론 씨, 사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재작년부터 팬이었거든요. 그때 결승전에서 브라운 씨 꺾으셨던 거 보고 너무 감격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작년에는 16강에서 발렸는데 뭘. 내가 진룡이었던 시절도 옛말이다. 나는 결국 놈에게 따라잡혔어.”
얼핏 들으면 시큰둥한 것 같았지만 윤이랑의 아부가 듣기엔 좋았는지, 타이론이 흔쾌히 촬영을 허락했다.
윤이랑은 마치 스타를 만난 여고생 팬처럼 좋아하며 묵룡을 비롯한 다른 본선 진출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아이웨이님! 예선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슉슉슉! 샷샷샷! 극진절권도! 진짜 너무 멋있었어요.”
“…가, 감사합니다 누님!”
생도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
추첨을 진행할 학장이 오기 전까지 시간도 있었고, 묘하게 당겨져 있던 분위기도 풀려서 대기실 공기는 훈훈했다.
하지만 모든 생도가 윤이랑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마봉 김하리님?! 와… 정말 너무 아름다우시다. 올해 열아홉이셨죠. 어쩜 그렇게 피부가 좋으세요? 역시 어리셔서 그런가.”
“네.”
“…아하하. 개그 센스도 참 좋으시네!”
우리 하리처럼 유명인에게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생도도 있었으니까.
라다은의 경우에는 더했다.
“천재 사령술사 라다은님. 뵙게 돼서 반가워요. 악수 괜찮으실까요?”
“조심하세요.”
“…네?”
“적당히 하지 않으면 청자는 심연에 먹혀버리고 말거에요. 청자의 가장 깊고 어두운 구멍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재능 있는 네크로맨서이기 때문일까.
라다은은 심지어, 악마 군주에게 침식당하고 있는 윤이랑에게 알 듯 말 듯 한 경고까지 건넸다.
[감 좋은데. 네 여동생의 라이벌로 불릴 법하다. 저 정도 육감이면 2차 각성으로 공상계와 관련한 고유능력을 얻을 가능성도 있겠어.]
‘라다은이 육감적이긴 하지.’
라다은은 츤데레 중2병 성격과는 반대로,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진보라색 생머리와 새끈한 몸매가예쁜 여자였다.
“역시 소문처럼 정말 재미난 분이시네요! 같은 여자라고 이리도 챙겨주시니, 과연 신세기가 바라는 여성상다우세요. …자아, 다음은?”
라다은의 뼈 있는 중2병 멘트를 부드럽게 넘긴 윤이랑이,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김제이 생도. 저 윤이랑이에요.”
“반갑습니다. 사회 잘 부탁드려요.”
“인상이 너무 좋으시다. 예선전도 감명 깊게 봤어요. 각성하신지 이제 세 달 되셨다던데, 사실이세요?”
“네. 운이 좋았습니다.”
“그러시구나아. 나도 그 운 좀 나눠받았으면 좋겠다.”
내 손을 굳게 잡고 흔든 그녀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느낌으로 눈웃음을 치면서.
“그럼. 우리 나중에 봐요?”
내 손바닥을.
간질이고 갔다.
‘설마.’
대단히 짧은 순간이었다.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다른 생도들이나 그녀의 매니저, 학내 관계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찰나.
하지만 나는 분명히뭔가를 느꼈다.
‘이거 도끼병 아니지?’
[떽뚜. 끼부린 거야.]
방금 검지로 내 손바닥을 야릇하게 긁은 행동. 이건 나와 메리가 생각할 때 명백한 시그널이었다.
나 너 마음에 들어.
너는 나 어때?
이런 느낌의.
‘애욕의 화신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닌데. 이렇게 갑자기 신호를 줄지는 몰랐네. 너무 적극적인데?’
[잘 됐지 뭐. 침식이 꽤 진행 돼서, 실제계에서 저년을 따먹어야 할 수도 있다. 일단 공상계에서 시도 해보고, 안 되면 그땐 dm 보내 봐.]
‘디엠이 뭔데.’
[다이렉트 메일. 요즘 연애는 인스타 dm부터 시작해, 이 문찐 자식아!]
‘쪽지라고 하면 되지 지랄들은. 난 인스타나 SNS 그딴 거 안 한다고.’
어쨌건잘 됐다.
자간의 숙주인 윤이랑이 제발로 아카데미에 온 것도,발랄한 그녀 덕에 나의 긴장이 풀린 일도.
“학장님 오십니다! 생도 분들 모두 착석해주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부터 생방이에요?”
본선 추첨을 기다리며,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젠장, 크크큭!’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나와 메리는 존나게 웃었다.
“…큿.”
“랑블리라더니 귀엽네.”
“하아, 이놈의 인기.”
많은 남자 생도들이 자신의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윤이랑을 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난 년이구만.]
자간의 숙주 윤이랑.
그녀는 마성의 여자인 듯했다.
“제이야! 나 대박이다. 이 대형께서 어쩌면 아나운서 섹파 생길지도 몰라.”
…그것도 꽤나 잡식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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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 1차전 대전 상대가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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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전 7번째 대전)
검술전공 권지후 vs 창술전공 김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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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랭크 검사 2학년 권지후.
나와 사이가 좆같이 안 좋은 놈이다.
이 등신 새끼와 내가 왜 사이가 안 좋은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권지후의 베프는 요시모토 겐지다.
요시모토. 그저께 예선 결승에서 내게 진 그놈. 내 아랫니에 임플란트를 박게 한 개새끼.
그 요시모토가 내 강냉이를 털었을 때, 권지후도 함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놈이 요시모토를 부추긴 거다.
“이야 대진운 보소!”
추첨 실황이 끝나 카메라가 꺼졌다.
실실 웃는 권지후가 대기실을 나가며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이따 보자?”
“말하는 시체라. 라다은이 불렀나.”
“크크큭! 고맙다, 고마워!”
권지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감사를 표하며 방을 나갔다.
7번째 대전인 나와 놈의 결투는 아마도 5시에서 6시 사이에 치러지지 않을까 싶다.
본선 1차전은 3시부터 연이어 치러지는데, 고위 헌터들의 특성 상 승부가 대개 빠르게 결정 나기 때문이다.
“오빠. 괜찮겠어?”
하리가 내게 다가와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물었다.
윤이랑에게 추파를 받아 잔뜩 신이 났던 아이웨이도 표정을 굳혔다.
“호되게 당할 수도 있어. 저 새끼 니 성격 알잖아. 항복 안 할 거라는 거.”
랭킹전은 본선과 예선이 판이하게 다르다. 본선부터는 본인의 전투 의지가 부상 정도보다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유는 고위 랭크에 오른 헌터 개인의 자유의지를 안전보다 중시하기 때문.
강자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예우를 보이는 거다. 좀 과하긴 하지만.
아무튼 이 때문에 정부와 헌터 협회의 공증이 들어간 각서를 작성해야만 본선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괜히 4대아카데미랭킹전에 열광하는 게 아니야. 자극적이니까. 그리고 헌터 협회는 일부러 선혈이 낭자하는 혈투를 중계하는 거다. 비헌터들에게 헌터들의 두려움을 새겨주려고.’
작년 가을 노스 그레이에서는 랭킹1위가 랭킹2위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죽는 사람도 간혹 나온다.
이스트 블루에서는 작년 봄에 구룡칠봉 한 놈이 하리에게 불타 죽어, 하리가 실격을 당할 뻔했었다.
마력 폭주로 인한 사고로 판정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뜻밖의 후견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살인죄로 구속됐을 거다.
눈 먼 어린 짐승들이 벌이는.
야만의 살육제.
4대헌터아카데미의 꽃인 랭킹전을 비하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뭐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기면 되지.”
“오빠.”
평소처럼 생도복이나 마법사용 로브가 아니라, 강화 보호구가 장착된 전투복을 입은 하리가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 새끼 강해. 오빠도 알잖아.”
“알지. 권지후 유명하잖아.”
권지후의 학내 랭킹은 무려 149위다. 나와 약 1만 등 차이.
놈의 어머니는 국내 2위클랜인 블루울프의 공대장을 맡았던 전직 SS급 헌터. 지금도 블루울프의 임원이다.
전용무기도 아마 끝내주는 거겠지.
“그래도 이길 거야.”
하지만 나는 대현자 메리의 파트너다.
신검 캄비온의 소유자이며, 악마 군주의 권능을 사용하는 봉인주체다.
그리고 나는.
‘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
일급 창수다.
검을 쥔 자가 일만일 간의 수련 끝에 도달하는 경지를 훌쩍 뛰어넘은.
천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 창술을 갈고 닦아온, 괜찮은 창병.
그러므로 대인전에서의 나는, 몬스터를 잡는 헌터로서의 나보다 강하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이다.
“하리야. 나는 삼천 일 간 창을 쥐었어. 권지후가 지 엄마 뱃속에서부터 검을 휘둘러왔어도 해볼 만해. 랭크 하나 차이는 감당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