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143. 제이와 봄꽃 축제 (21) (143/145)



〈 143화 〉143. 제이와 봄꽃 축제 (21)

반숙녀가 자신이 남긴 거금을 기도  차는 그딴 돈 놀이에 몽땅 날렸단다.

―쾅! 쾅! 쾅! 쾅!

분을 못 이긴 반지원이 테이블을 양손으로 어린아이처럼 마구 쳤다.

“또?!”
“네.”
“다?”
“예 뭐…. 제이가 태어날 쯤에는 누님이 남겨주고 가신 합정동 저택까지도 날린 상태였습니다. 그때가 IT버블이어서 작전주에 두 번 정도 제대로 털리더니, 애 눈깔이 뒤집어지더라고요.”
“…김근.”
“근이도 말렸죠. 이혼 도장까지 찍을 뻔했습니다. 제이가 안 태어났으면 아마 백프로 갈라섰을 겁니다.”

반지원은 생각했다.

‘근이는 숙녀에게 꼼짝 못해. 그런데 이혼? 화가 아주 많이 났었나 보다.’

반숙녀와 피를 나눈 친자매보다도 더 깊은 교류를 나눴던 반지원,
그녀는 주식이라는 스노우볼이 결국, 돈 욕심에 눈 먼 숙녀를 죽음까지 내몰았다는 진실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엘프에다,  때부터 최상급 정령을 사역한 반지원에게 돈이란 ‘그깟 돈’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

‘숙녀. 헛똑똑이.’

반숙녀. 프레이야-지구 간 이어진 균열 던전 속에서 죽을 뻔한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돈 엄청 밝히는 수전노인 주제에 초면인 그녀에게  귀한<천사의 눈물>을 먹이고, 그녀를 주워와 치료해주고, 지구에 대해 알려주고, 직접 이름까지 지어준 인물.

그리고 무엇보다.

반지원의 생명력 절반을 나눠가진 이.

그 사람이 바로 김제이의 친모, 반숙녀였다.
몸 사리고 살았다면 하이엘프의 비술로 얻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못해도 이백 년은 놀고먹고 잘 살았을 사람.

‘숙녀….’

그리고 반지원이 그녀의 사백팔십 년 생애 중 가장 사랑했던 영혼.

“정말 죄송합니다, 누님….”

―드르륵

김웅호가 의자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이며 진심어린 사과를 보였다.

“…숙녀와 근이. 그리고 클랜원들을 모두 잃고… 부끄러움에 찾아뵐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이에게도 차마 누님 이야기를 꺼내질 못 했습니다. 제이가 누님과 만나게 되면…  역시 누님을 마주해야만 했을 테니까요…….”

이미 망가져버린 늙은 전사. 아니, 인간의 눈에 습기가 배었다.
마력회로를 잃어 평범한일반인의 몸이 된 그에게서, 20년 전 강건했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그는 거친 외양과 커다란 덩치를 가졌을 뿐, 평범하게 늙어가는 갱년기의 인간에 불과했다.

“곰탱이.”

하지만 반지원의 눈에는.
그가 여전히 아이로 보였다.

20년 전 혈기왕성한 삼십대였던 김웅호나, 50대의 늙고 삐걱거리는 몸과 마음을 가진 희망원 원장이나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까.


“제이. 봤어.”

 한 마디 말도 없이 김웅호에게 품은 서운한 감정을 정리한 그녀가, 친구의 아들을 입에 담았다.

“왜. 창?”
“…….”

본선 방송을 통해 김제이가 검이 창을 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김웅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쪼르르르

반지원이 찻잔에 녹차를 따랐다.
손은 쓰지 않았다. 동양에서 흔히 허공섭물이라 불리는 수법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가 재차 물었다.

“김근. 대검.”

김제이의 친부는 생전, 양손 대검을 쓰는 C랭크의 검사였다.

“숙녀. 세검.”

양손잡이였던 그의 모친 또한, 두 자루의 얇은 곡도를  D랭크 검사였다.

“아들. 창.”

반지원의 하늘색 눈이 깊어졌다.
그녀가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을 내뱉었다.


“곰탱이. 창.”

늘푸른희망원 원장 김웅호가 무척 송구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됐슴다. 어릴 때부터 저를 워낙 많이 따르던 놈이라.”
“그 애 몸. 검.”
“맞슴다. 지 애미애비와 똑같지요. 그런데 신체적성 결과를 고등학교 때 알게  이후에도 창을 안 놓더라구요.”
“왜.”

김웅호의 흉터배긴 얼굴에 자부심, 뿌듯함. 그리고 걱정과 우려와 미안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제이 그놈이…, 이 못난놈 같은 멍청한 창잽이가 돼서…. 저 대신…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답니다.”


김제이에게 김웅호는, ‘아버지나 마찬가지’라는 말로도 형용이 안 된다.

그는. 김제이의 영웅이다.

김제이의 눈에 그의 늙은 원장은, 지금까지도 그리 보였던 것이다. 무작정 등 뒤를 쫓고 싶은, 그런 사람.

그랬기 때문에 김제이는 그의 무척 우수했던 학업 성취도에 기인한 유수의 집안에서 들어온 입양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순수한 자의로, 그렇게 했다.

소년은 오직 원장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나고자 소망했기 때문에.
타의로 창을 놓게 된 영웅이 못다 이룬 숙원을, 대신 이루어주고 싶었기에.

창을 갈고 닦았다.

―탁

반지원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선언했다.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것일까.
김제이에게 김웅호 같은, SS등급에 도달할 가능성마저 엿보였던 대단한 창수가 될 자질이 안 보인다는 뜻일까.
혹은 1차 목표인 S랭크 창수가 되든  되든, 그것과 상관없이 김제이는 창을 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까.


“안 된대.”


―사아아아아

창문도 열리지 않은 실내에서, 아주 가느다랗고 옅은 녹색을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사아아아아

 부드러운 바람은 친구인 반지원의 기다란 귓가에 머물러 있었다.

“곰탱아. 미안.”

바람의 속삭임을 전해들은 반지원이.
김제이의 우상에게 미리 사과했다.

“너로는. 안 된대.”
“크큭! 누님 그거 아쇼?”

늙은 영웅이 슬쩍 웃었다.

“방금 누님. 누구랑 아주 똑같은 소리를 하셨다는 거.”


**

식사를 마치고 한정식 집에서 나오며, 하리가 기지개를 쭈욱 폈다.

“으으! 두 분 대화가 길어지시네?”

녀석은 마녀복에서 생도복으로 갈아입은 뒤라, 아까 같은 과도한 노출이 없어 보기가 좋았다.

“나누실 말씀이 많겠지. 선우한테 아까 얘기 들었잖아. 20년 간 원장님이 일부러 클랜장님 안 찾으셨다고.”
“흐응….”

하리가, 우리를 배웅 나왔던 선우가 식당 안으로 완전히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원장  너무하네? 진즉  좀 해주지. 그랬으면 오빠 다른 건 몰라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돈 벌면서 입시 준비한다고 개고생하진 않았을 거 아냐. 대체 시간을 몇 년을 버린 거야?”
“또 그 소리 한다. 지는 추천 입학했다 이거지. 너 입시 요강이나 아냐?”

하리의 말은 완벽한 헛소리다.

나는 이미 10대 때 이스트 블루 입시를 총  번이나 떨어졌었다. 그리고 우리 아카데미는 실기 과락으로 떨어졌을 경우, 2년간은 재응시를  한다.

마지막으로 떨어진 게 고3 졸업할 때쯤이었고, 작년이 22살 때였으니 딱히 시간 낭비라고 할 건 1년 정도 뿐이다.

“그리고 사회생활도 큰 도움이 됐어.”

나는 4대 헌터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필기 및 면접 동시 만점자다.
그리고 이것은 헌터 회사에서의 재직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뤄내질 못했을 위업이다.

“니네 황금세대 때문에 이스트 블루 입학컷이 미친 듯이 올라갔잖아. 면접 만점 아니었으면 난 절대 입학 못했어. 당장 작년 입학자 중에 각성유력자는 나 혼자였잖아? 올해는 아예 없고.”
“그래도.”

하지만 하리는 원장 쌤이 여전히 야속한지,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친자매보다 돈독했다며! 성까지 같고, 클랜장님 이름까지 오빠 엄마가 지어줄 정도면. 오히려  챙겨준 게 더 미안하겠다. 응! 당연히 그렇지. 나라도 그래.”
“사정이 있으셨을 거야.”
“그 사정. 내가 맞춰봐?”

하리와 길이 갈리는 중앙 광장.
녀석이 발을 크게 걷어  하얀 비둘기들을 날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원장 쌤. 반지원 클랜장한테 오빠 뺏길까봐. 무서웠던 거 아닐까?”


당연히 그런 면도 컸을 거다.
늘푸른희망원이 생기고 나서는 완전히 멋진 모습을 되찾으셨지만. 그전, 내가 기억하는 예전의 원장 아버지는 거의 폐인에 가까우셨다.

―고맙다 제이야. 아저씬 너 때문에 산다.

이 말은 항상 술에 쩔어 계셨던 원장 쌤의 말버릇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원장님은 우면산 사태로 몸만 망가지신 아니셨다. 클랜이 파산하면서 재산까지 많이 날린 상태셨다.

즉, 나만 원장님 덕에  게 아니라.
원장 아버지도 나를 의지하셨던 것.

‘맞아, 그랬지. 원장님도 힘들었지.’


그리고 그가 내게 기댔단 사실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생각해왔다.


“그럼 오히려 잘  거잖아.”
“응?”

하리의 어깨를 잡고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쌤이 나를 반지원님께 보내버렸으면. 우리 하리랑 이렇게 못 만났잖아.”
“…….”
“너랑 나랑 원장 쌤이랑. 셋이 이렇게 가족처럼 못 지냈잖아. 안 그래?”

김하리金昰理.

늘푸른희망원 원장 김웅호의  번째 아이. 원래부터 이름이 있던 나와는 달리, 원장 쌤께 성과 이름까지 받았다.
녀석의 죽은 어머님은 태생이 부랑자였던 탓에, 하리 역시 호적 등록이 안 되어있었으니까.
그런 녀석의 눈시울이 급격하게 붉어졌다.

“…흐윽……!”

그리곤 구슬 같은 눈물을 보였다.

‘뭐야.’

내가 뭐 특별한 말 했다고 이래.
오늘따라  유독 예민하네.

“왜 울고 그러냐. 너 미쳤어?”
“닥… 쵸….”
“아 이 새끼. 생리도 아니면서.”

행인들로 가득한 중앙 광장.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리를 꼭 껴안아주었다. 쪽팔림보단, 꼬맹이가 우는 게 더 마음 아팠으니까.

“누가 울어도 된다고 했어, 앙?”
“…….”
“앞으로  허락 맡고 울어라 너.”
“…오빠.”
“응.”

 허리를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감고 눈물을 보이던 하리가.

“미안… 해.”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야!”

하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녀석이 청록색의 짧은 생도복 치마를 펄럭이며, 환한 미소를 짓는 군중들 사이를 힘껏 내달렸다.

“이따 봐! 경기 조심하고.”

나는 너무 많이 예뻐서 학교를 절대 혼자 보낼 수가 없었던, 그 어린 시절의 꼬꼬마를 배웅하는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리야. 안 미안해도 돼.’

사랑하는 사람끼린, 가족끼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아니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너와 원장님만큼은.

얼마든지 그래도 돼.

**

나는 듯이 뛰어 기숙사에 도착했다.

사실은 아까 원장님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방으로 달려가고 싶었는데, 계속 참고 있었으니까.

“오셨습니까, 주인님. 택배물을 수령하여 주인님의 방 안에 모셔두었습니다.”
“고마워 소피아! 점심 먹었니?”
“누구 말씀이라고 거르겠습니까. 또한 주인님. 잠시 뒤인 오후 2시 경, 각성자 특별수사 2팀장이신 이정엽님께서 본 3기숙사를 재방문할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주인님께 별도로 언질을 드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응응! 알겠어, 쉬어 소피아!”

소피아의 말을 듣는  마는 둥 하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띠띠띠 띠리리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다시 닫았다.
벌써부터 기대를 가득 품은 마음에 손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미쵸따. 어뜩하냐?”
[이 몸도 떨린다. 빨리 까보장!]

단 둘이 되자마자, 그간 말수를 줄이고 있던 낄낄빠빠의 화신 메리가 촐랑대며 말을 붙였다.

“니가 까줘. 나 떨려.”

침대 위에 곱게 올려진 노란색 길쭉한 택배 상자를 보니 진정이 안 됐다.
메리가 귓불에서 떨어져 나오며 둥실둥실 상자에 다가갔다.

[자연 포경이라 고래도 안 잡아본 쉐키가 냅다 까달라니. 커여운데?]
“빨리!  적응해야 된다고. 대기실 가기 전까지 이제 2시간 남았어.”

진짜 그렇다.
아무리 내가 평소 써온 모든 창들이 원장님 것의 레플리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적응 시간은 당연히 필요하다.

[서두르지 마! 여유 없는 쥬지는 인기가 없는 법이야. 또 좆뚜기 3분 쥬지  봐야 정신 차릴래?]
“알았다. 경건하게 기다린다.”

―지익 지지지직

한손장검 크기로 커진 메리가 택배 상자를 대신 까주었다.
나는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아이의 마음으로 다리를 덜덜 떨며 책상 의자에 앉아  모습을 보았다.

[오우? 때깔 죽이는데. 리폼했네.]

포장을  깐 메리가 하얀색 금속성 창대가 인상적인, 원장님의 장창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날아다니는 검이, 지보다  배는 창을 균형을 정확히 맞춰 나르는 광경은 썩 신기했다.

[홀홀! 받아라 이눔아. 이 할미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대존엄현자님.”

―탁!

양손으로 원장님의 창을 쥐었다.

“와… 이걸 내가 써보게 되네.”

창은 메리 말대로, 마지막에 봤던 3월  모습과 썩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를 위해 정이 잔뜩 드셨던 투왕나무 창대를 새것으로 교체하시고, 조금의 녹도 슬지 않은 날을 더욱 예리하게 갈아주신 듯. 창은 아주 근사했다.
창대에는 원래도 그랬던 것처럼, 멋들어진 한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애각창涯角槍>

옛날에 상산 조자룡이 썼다고 알려진 창을 모티브로 만든 명기다.
중국의 무기 명가 <산동별곡>에서 현역 시절 원장님을 위해 특별히 선물해주었다는 창이 바로 이것.

창날이 양쪽으로 조금 갈라져있기는 하지만 폴암이라곤 절대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동양적 고전미가 느껴지는 스피어가 바로 이 애각창이다.

‘언제 봐도 존나 멋있네.’

이 창이 내겐, 전설의 무기다.

내 인생에서 그 어떤 무기보다 먼저 본 것이 바로 이 창이다.
현역 시절 원장님 영상을, 영화를, 만화를, 드라마를, 그리고 빅터 프리먼 같은 창수들의 영상을 감명 깊게 봤을 때마다.
원장실로 달려가 이 창을 우러러보곤 했었던 것이다.

날 부분의 재질과 예기만 끝내줄 뿐 부가 효과도 없었고. 창대는 바뀌어서 탄소강화섬유로 된 일반 등급이었지만.
그게 뭐 어떤가?
연습용 장창보단 최소 20배는 좋다.

―붕붕

[얏! 전등 깨져. 등짝 맞을래?]
“미안, 미안.”

좁은 방에서 창을 휘둘렀더니 메리가 희망원 여자쌤들처럼 잔소리를 해댄다.
나는 잽싸게 전투복을 갈아입고 빨리 공터로 나갈 준비를 했다. 훈련장에  시간은 없었으니까.

―끼익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문을 밀었다.
나는 우리 하리가 다시 건가 싶어서 반가운 마음에 일어났다. 하지만 들어온 이는 영 다른 사람이었다.

“어이~! 악마사냥꾼.  지내셨나?”

내 방을 찾은 이는 이정엽이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아니, 저번보다 더 근사한 정장을 입은경찰 선배님.
근 한 달 만에 본 그는 여전히 꽤나 매끈한 면상을 하고 계셨다 씨발.

“팀장님이 어쩐 일이세요? 하연주 기자님한테 오신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짭새! 오랜만이다. 구천현녀 썅년이랑 채널은 복구했냐?]

우리가 인사를건네자, 그가 방에 들어오지 않고 엄지로 계단을 가리켰다.

“일단은 권지후 때문에. 겸사겸사 축제 건도 있고. 근데 후배님, 나가려던 참 아니야?”
“맞아요. 나가시죠.”

나와 메리와 이정엽은 기숙사를 사와, 인적이 드문 샛길을 따라 대경기장 쪽으로 향했다.
하리나 아이린, 서윤이보다도 더 유명인인 이정엽이 폭풍 어그로를 끌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박 사박

소나무 숲이 우거진 학내의 오솔길.
구둣발 아랑곳 않고 솔방울을 밟으며 이정엽이 빙그레 웃었다.

“이놈의 학교는 언제와도 너무 커. 무슨 놈의 학교가 국립공원 속에 있어.”
“제 말이요. 학교 오랜만이시죠.”
“어.  삼년 됐나. 졸업한 직후에는 후배들 본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다 부질 없더라고. 졸업하면 씨발 그냥 사회인이야. 옛날의  감성이  나와. 크으…! 나도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참고로 그는 아카데미 내 불법무기 소지 관련 점검 및 본선 해설을 겸해서 아카데미를 찾았다고 한다.
요즘 휴직계 내서 존나 한가하다고.

“창 근사한데. 새로  거야?”

그가 아까부터 유심히 보던 내 창에 대해 물었다.

“저희 원장님이 물려주셨어요. 명색이 상대가 그 조쉬 맥킨진데, 연습용 장창으로 상대할 거냐고.”
“그야 그렇지. 솔직히 나도 너한테 톡은 안 했는데, 예선 본선 보면서 진짜 욕 많이 했다.”

백수 이정엽이 중지를 튀어나오게 만 주먹으로 내 등을 쿡 찍었다.

“후배님 임마.  그거 능욕이야, 능욕! 남들은 못 해도 구색이라도 맞추려고 무기를 빌려서라도 나오는데, 너는 임마 연습용 장창이 뭐냐?”
“지송합니다. 눈 테러해서.”
“그건 그렇고. 자신은 있어?”

자신.
그 조쉬를 이길 자신감은 있냐, 라.

“절대 지지 않으려는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
“…뭐?”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이정엽이 리젠트 머리를양 손바닥으로 다듬으며 인상을 썼다.

“야  솔직한 놈아. 뻥으로라도 이길 거라고 해야지! 당장 승부 앞둔 자식이. 그런 정신머리로 어떡해?”
“당연히 이겨야죠. 지지 않는다는 건, 이긴다는 뜻이잖아요.”
“…그래. 니 성격 원래 조금 뜨끈미지근한 거야 내가 잘 알지.”

피식 웃은 그가 손등으로 내 배를 툭툭 치며 응원을 건넸다.

“이기셔 후배님. 명색이 악마사냥꾼이신데, 고작 S랭크인간에게 지면 면이 서시겠어?”
“뭐에요. 팀장님도 S급이잖아요. 그것도 플러스  개.”
“나 끝났다고 했잖아.”

그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킨 뒤, 자신의 모가지를 두 번 그었다.

“현녀님한테. 완전 차였다.”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쯧. 어쩔 수 없지.”

나는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을 우려해, 바로 화제를 바꿨다.

“참. 그런데 오늘 해설하신다면서요.”
“그럼! 후배님, 너 시간 없겠다. 빨리 걸으면서 얘기하자.”

유쾌한 성품인 이 팀장이 금세 표정을 밝게 만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따 너랑 니 여동생은 편파 해설 해줄 테니까 염려 놓아. 너 몰랐지. 내가 원래 내 라인은 무지 챙긴다?”

넉살이 너무 좋아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언제부터 팀장님 라인이에요?”
“걱정하지 마 임마. 썩은 줄이니까.”
“썩은 줄을 그럼  잡으라고 해요?!”
“그럼 나 혼자 죽냐,  섀끼야!!”
[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나 나나 소리 없이 웃었다.
하여간 이정엽 이 사람은 진짜, 성격이 하도 좋아서 이세계 한복판에 떨어뜨려놔도 잘 살 것 같았다.

“크흠! 근데 있잖아, 후배님?”
“말씀하세요, 선배님.”

그런데 그때 이정엽 팀장이.

“윤이랑 아나운서. …이쁘든?”
“…….”
[…….]

느닷없는 자살 예고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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