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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2회 (2/189)



〈 2화 〉2회

묘란에게 있어서 이름 모를 초보자를 사냥하는  따위는 일상이었기에 박한길을 죽인 사실은  시간만에 기억 속에서 사라졌어야 했다.


그러나.

"흐엑!?"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끔찍한 환영에 묘란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자 채팅창에서 곧바로 반응이 돌아온다.


-응?  그래?
-또 저러네 ㅋㅋㅋㅋ
-오늘따라 발작이 심한데? 무슨  있어?
-가슴 보여줘.
-여관 주인 덩치 좋던데?  드포(드림 포인트)면 떡치는 거 볼 수 있음?


눈앞을 스쳐지나간 환영을 모르는 척 하느라 묘란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식은땀 흘리는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게임 속인데 아프긴...차라리 귀신을 봤다고 해라.
-인포자에겐 현실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럼 아플 수도 있는 거 아냐?

인포자란 인권 포기자의 줄임말이다.


-아님. 인포자는 잔병치레 없는 걸로 알고 있음.
-그래? 우와 좋겠다~
-그럼 너도 인권 포기햌ㅋㅋ
-그건  ㅋㅋㅋ


"여러분! 전 신경쓰지..으아억!?"

또 다시 피칠갑을 한 환영이 눈앞을 스쳐지나가자 조건 반사처럼 공포에 질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야? 뭔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ㅗㅜㅑ..가슴 출렁이는 거 봐.
-볼 줄 모르시네. 이럴 땐 저 짓눌린 엉덩이를 봐야지.
-ㅋㅋㅋ다들 스트리머 좀 걱정해줘라 ㅋㅋㅋ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 개웃기넼ㅋㅋㅋ

"으...여, 여러분...안 되겠어요.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바, 방종할게요!"


-??
-뭐?
-그건 아니지 묘란 짱!
-적어도 받은 드포 만큼은 해야지?

"정말 죄송해요! 나중에 벌충 할 테니까요!"

고개를 꾸벅 숙인 묘란은 황급히 방송을 끄고 자신의 두 어깨를 끌어안았다.

"으, 으으으...? 대, 대체  이러는 거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환영.
뭉개지고 잘려나간데다 색체가 옅고 창백했지만 그것이 오늘 죽인 초보자의 얼굴이라는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허나 의문인 것은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나 커다란 공포를 느끼느냐는 것이다.
피와 상처에는 익숙하다...아니,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광경을 보고 두려워할만한 감성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초보자의 얼굴은 자신이 직접 뭉개고 잘라내지 않았던가. 남이 한 것을 봤다면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지만 스스로가 만들어낸 얼굴에 공포를 느낄 리 없었다.

"무슨 일이...벌어지고 있는 거야, 젠장..!  초보자 자식, 괴상한 캐릭터 특성이라도 가지고 있던 건가...?"

짐작가는 건 그것 밖에 없었기에 묘란은 벌벌 떨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그 자식을 어떻게든 찾아내서...햐아악!?"

 다시 그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자 묘란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며 허리가 곧추선다. 전율과 소름이 전신을 내달리자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다.
마치 누군가가 척추를 따라 뜨끈한 한숨을 퍼붓고  입김이 달라붙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오한에 머리털까지 쭈뼛 서버렸다.

"하악...! 하악..!"


거칠어진 숨결과 핏기가 가셔 퍼렇게 물든 채 울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끊임없이 흐르는 식은땀과 한없이 내려가는 체온.

"이상해...이상하다고..! 이렇게나 무서울 리 없는데..!"

그녀가 처음 드림아웃에 접속해 끔찍한 꼴을 당했을 때도 이와 같은 종류의 공포를 느낀 적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지금 시스템적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조장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에서 그녀의 뇌를 스캔한 드림아웃의 인공지능 '라온'이 스킬에 걸린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그녀의 뇌를 건드려 공포에 질리도록 만든 것이다.

어디까지나 물리적으로.

윤리적, 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겐 인권이 없었다.
심적, 육체적 충격이 필터링 되지 않고 전달되기에 현실의 몸, 특히 뇌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신경 써주는 인간은 없었고 그러한 두뇌 활동은 마석 채취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두뇌가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마나 또한 활발하게 순환하기에 마석의 생성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상태 이상 '공포'에 걸렸습니다. 스텟이 일시적으로 감소하고 일부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됩니다. 저주가 풀리지 않으면 상태 이상은 계속 강해질 것입니다.]


"뭐...!? 저주!? 역시 그 자식이 무언가 한 거구나!"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묘란은 힘겹게 걸음을 내딛으며 초보자 마을로 향했다.
그가 그곳에서 부활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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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아웃에서의 고통은 현실의 10%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내 아들내미가 잘려나가는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한 것이었다.
뇌가 타올라서 익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고통의 연속.
그게 고작 10%라니 말도 안 된다. 사기당한  아냐?

"...돌아가고 싶다..."

초보자 마을에서 부활한 나는 길거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떨궜다.
벌써 의지가 깎여나갈 것만 같다.


"젠장...안 그래도 얼마 없던 드포가 줄어들었잖아."


캐릭터가 죽으면 곧바로 다른 곳에서 부활할 수 있는 건 편리한 기능이지만, 나는 다른 리스폰 지역을 밝혀두지 않았기에 초보자 마을에서밖에 부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죽음 패널티가 뼈 아프다.
일정 레벨 하락, 아이템 랜덤 드랍, 그리고 골드와 드림 포인트의 30% 감소.
어차피 가진 것도 없었기에 레벨과 아이템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드림 포인트는 아깝기 그지 없었다.

당장  곳도 없도 현금으로 변환할  있는 것도 아닌데 왜이리 아까운 걸까.

"에휴...아, 그러고 보니 스킬이 새로 생겼었지. 그거나 볼까."


의욕 없는 손가락질이 상태창을 불러냈다.


"어디 보자...새로운 스탯이 생겼네? 원한? 뭐야 이 찝찝한...으음, 설명 같은 거 없나? 아, 이건가."


[원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힘은 당신의 불길한 힘의 무한한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이걸 설명이라고 써놨냐? 젠장, 스킬이나 보자. 엔딩에 저주랬지? 이거로군."

[엔딩]
죽음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죽음은 만끽할  있는 자유 이상의 사상으로 거듭나 막대한 영향을 끼칠  있도록 승화되었습니다.

-이 스킬의 위력은 스텟 '원한'의 보정을 받습니다.
-이 스킬은 당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의 감정 상태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동되며 그 외의 방법으로는 발동되지 않습니다.

[저주]
당신의 증오가 누군가를 상처입히길 원하는 지경이 되었을 때 내뱉은 말과 행동이 저주가 됩니다.

-스텟 '원한'이 높을수록 먼 거리에서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텟 '원한'이 높을수록 많은 수에게도 동시에 스킬을 사용할  있습니다.
-이 스킬의 위력은 스텟 '원한'의 보정을 받으나 사용자의 감정이 그 위력을 결정적으로 좌우합니다.
-이 스킬은 사용자가 임의로 발동할 수 있으며 원하는 형태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반드시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가 클수록 스킬의 위력이 강해지며 만약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시 저주는 당신에게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저주의 대가는 사용자가 가진 재화와 아이템, 고통, 드림 포인트, 그리고 목숨 등이 해당됩니다.
-저주는 대상이 죽지 않는 이상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주는 특수한 스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주의 항아리]
저주의 주인인 당신은 저주를 당신의 몸에 담아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를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음..."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렸다.
뭔데 이 음침하기 짝이 없는 스킬들은. 정말 기분 더러워지는 스킬들만 쏙쏙 골라놨네.
게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알려주는 설명이 한 개도 없잖아.

"하아..이게 전부 생명 경시인지 뭔지 하는 캐릭터 특성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드림아웃 인생은 절망으로 점철되리라.
RPG 게임에서 레벨을 올리지 못한다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웬 이상한 스킬이나 생기고...그러고보니 죽기 직전에 저주 스킬이 발동됐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슨 효과가 있는 스킬이지? 대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건  목숨으로 지불된 건가?

"생각하니까  빡치려하네...빌어먹을...개같은 년! 내가 레벨을 못 올리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네게 복수해주마! 처죽여버리겠다고! 반드시!"

[스텟 '원한'이 소폭 상승합니다.]
[스킬 '저주'를 발동하려면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스킬을 발동하시겠습니까?]


"아...!?"

귓가를 울리는 인공적인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화가 부추겨졌다.


"대가를 지불하겠냐고!? 그래! 지불하겠다! 얼마든지 가져가!"


내키는 대로 지껄인 직후, 손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의 살결이 쩌억 벌어지더니 시뻘건 피가 줄줄 터져나왔다.


"으아악!?"

후회막심이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10%가 아닌  같은데?

[스킬 '저주'가 발동되었습니다. 당신의 원한이 향하는 대상에게 스킬이 적용됩니다.]

"에휴, 그래그래. 레벨 1짜리의 스킬로 뭐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년을 저주할 수 있다니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기도...응?"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어느새  주변으로 웅성거리는 인파가 모여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자네 괜찮은가? 피가 나고 있는데."
"왜 자기 손을 못살게 구는지, 쯧쯧..."
"누구 회복 마법 써줄 사람 없어? 아니면 포션이라도!"
"젊은이, 아무리 인생에 비관해도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부모가 슬퍼하지 않겠나."
"....."

한 마디씩 하며 걱정하는 면면들은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했다.
아마 초보자 마을에 사는 엔피시들인 모양이다.


"괘,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괜찮긴 무슨! 가만히 있어 보게!"
"내가 회복 마법을 사용하지! 힐!"


지나가던 마법사  명이 스킬명을 외치자 그의 손이 새하얗게 발광하더니 손에 났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
"괜찮은가?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게."
"혹시 힘든 일 있으면 저 앞에 있는 술집으로 오게나. 얘기 정도라면 들어줄  있으니...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네. 젊을 때는 방향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는 법이지."
"아하하하..."


마음 속에 스며드는 듯한 상냥함이다. 메말랐던 마음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만 같다.
사람보다 엔피시가  상냥하고 친절하다니...이상한 기분이다.
현실에서도 이런 친절은 받아본  없는데 설마 이런 지옥 같은 게임속에서.


"윽...!"
"이런이런...괜찮으니 진정하게."
"쯧쯧, 얼마나 힘들었으면...너무 슬퍼하지 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몸을 해치는 건 어리석은 행위야. 일단 차분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

드림아웃의 엔피시들은 모두 이런 건가? 아니면 여기가 초보자 마을이라서?
뭐가 됐던 시큰해지는 코끝을 억누르기 위해 얼굴에 잔뜩 힘을 줘야만 했다.

"크으윽...!"
"울고 싶으면 울게나. 아무도 흉볼 사람 없으니."
"힘들 때 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우리도 모두 그러했다네."
"이거라도 마시겠나?"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위로와 격려의 말에 나는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래, 차라리 시원하게 울..크허억!?"

내게 말을 건내던 인자한 인상의 중년이 느닷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으아아악!?"
"꺄아아아아!"
"살인이야!"
"경비병을 불러!"

안온하고 따스한 입자로 가득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급박하고 오한이 이는 위기감으로 가득찬다.

"어...?"
"차, 찾았다...! 이 자시익..!"


묘란이라고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금 죽인 엔피시의 등에서 단검을 빼내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게 단검을 겨누었다.


"다, 당장..! 내게 걸린 스킬을 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이런 씨발...!"
"뭐, 뭐...!?"
"죽여버린다. 이 빌어먹을 년아..!"

숨길 수 없는 분노로 시야가 새빨갛게 물든다.
살면서 이토록 분노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가 악물리고 붉게 물든 시야가 격렬히 흔들린다. 꽉 쥔 주먹에서 핏물이 베어나온다.
상상속에서라면 이 여자는 내게 벌써 수백 번은 죽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내게 그럴 힘을 없었지만 말이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자 그녀는 비웃음과 황당함이 뒤섞인 얼굴로 가소롭다는  나를 내려다봤다.

"이, 이게 쪼렙 주제에 깝치고 있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죽여줄게. 몇 번이고,  번이..!? 꺄, 꺄아아아아아아악!!"
"!?"


말하다 말고 갑자기 끔찍한 비명을 내질러서 깜짝 놀랐다.


"허억, 허어억...! 끄, 끄륵..!"


눈이 붉게 충혈되고 안색이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린 그녀는 거품까지 물며 손발을 바들바들 떨더니 마침내 단검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오로지 간절함과 두려움 밖에 없었다.

"미, 미안해! 내, 내가 잘못했어...이제, 이제 견딜 수가..."
"응...?"
"주, 죽어..! 이대로라면 정말 죽어버리고 말거야! 무, 무서..살려 줘. 무서워! 너무 무섭다고! 아아아아아악! 다가오지 마아아앗! 히익! 히이이이익!"

꿈틀꿈틀 기어 내 바짓가랑이를 잡은 그녀는 홀로 지진이라도 견디는 것처럼 파들파들 떨며 더없이 애절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이토록 두려워 하는 걸까. 왜 내게 사과하는 거지?


"...설마.."

짐작가는 거라고는 내 음침한 스텟과 스킬 뿐이었다.
저주에 걸려서  꼴이 된 거야? 나보다 레벨도 한참 높을 텐데?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녀의 애원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흐어어엉~! 잘못 했어요! 죄송해요! 훌쩍! 제가 다 잘못했으니 제발..! 흐극..!"

유리구슬처럼 굵은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은 본래의 미모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져 있었다.

"자, 잠깐. 너무 흔들지 말아줄래?"
"용서해주세요오오~! 흐아아아아앙!! 으윽, 으아아아아!! 히이이이익! 꺄으아아아!?"
"......"


실시간으로 미쳐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기분이다.

"제발요..제바아알!! 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죄송해요! 이렇게 빌게요! 흐그아아아아!!"
"아니,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어느새 그녀를 향한 분노는 사그라들어 있었고 당황과 황당함, 약간의 측은함만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어디 보자. 분명 저주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 인공적인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초록색 창이 나타났다.

[저주는 특정 스킬이나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저주의 주인은 저주의 위력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호오?"

배운 적도 없는 정보와 감각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신비한 감각.
마치 뇌에 정보를 직접 주입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 건가?"

그녀의 어깨를 짚자 기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저주의 기운인가?
주입된 감각대로 묘란의 몸에서 날뛰는 '저주'를 빨아들이자 그녀는 조금씩 공포에서 해방되어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군...윽!?"


비유하자면 고슴도치가 천적을 상대로 가시를 바짝 세워올릴 때와 비슷할 것이다.
강렬한 오한이 등골을 훑어내리더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으헉...!?"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환영. 그것은 분명 고문 당할 때의  얼굴이었으나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가시가 뾰족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정신력이니 뭐니 하는 걸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격정이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으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까진 막을  없었다.

[스킬 '저주의 항아리'에 의해 저주가 일시적으로 봉인됩니다.]


인공적인 목소리와 동시에 내면을 잠식해가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그라들자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한껏 움츠렸던 어깨를 펼 수 있었다.
과연, 이런 공포를 계속해서 느꼈다면 이렇게나 이성을 잃는 것 또한 이해가 간다.

"후우, 아무튼..."


감각적으로는 저주를 다시 그녀에게 보내는 것도 자유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에게로밖에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그녀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롱이 연결돼 있어 그곳으로만 '저주'라는 정체불명의 에너지가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하아, 하아, 훌쩍, 흐윽, 후우우...."

전신이 식은땀과 흙으로 더러워진 그녀는 더 이상 두려움이 일지 않자 엄청나게 안도한 모습으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야."
"네, 네!?"

가벼운 부름에도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어깨를 움츠리는 묘란.
빠르게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따라와라."
"무, 무슨..."
"저 여자인가!?"
"네 경비병 님! 저 여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신 갑주를 입은 경비병이 창을 꼬나쥔 채 달려오고 있었기에 나와 그녀는 황급히 마을을 벗어났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을이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후우...꽤 끈질기네."
"그, 그러네요오..."

숨이 차오른 나에 비해 그녀는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으로 어색하게 손을 비비며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야."
"네, 네에!"
"그 공포를 또 경험하고 싶지는 않겠지?"
"...!!"

끄덕끄덕끄덕!
겁먹은 얼굴이 위아래로 맹렬하게 흔들리자 흉악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출렁이며 물결친다. 나는 슬쩍 그 가슴을 손바닥으로 들어올리며 웃어보였다.


우와, 묵직해. 부드러워!

"그럼 말이야. 나 좀 조금 도와주겠어?"
"...네?"


나름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는데 묘란은 마치 저주에 걸렸을 때처럼 핏기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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