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회
저택이 삐까번쩍한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에게 포위당했다.
수십...어쩌면 수백 명에 달하는 장정들이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 저택을 올려다보고 있다.
"부정하고 사악한 술법을 사용하는 주술사 '박한길'은 당장 나와서 신의 심판을 받으라! 여신 프레이야 님의 이름 앞에 저항한다면 마지막 자비까지 사라질지니!"
목소리가 얼마나 큰 지 저택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다.
[신성교의 결계 '성스러운 땅'이 펼쳐졌습니다. 신성력에 의해 스킬 효과가 40% 감소합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오, 오빠...어떻게 할 거야?"
"응? 아아...일단 해달라는 대로 해야지. 심판 받을 생각은 없지만."
"뭐? 미쳤어? 신성교에 찍히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본다고!? 오빠가 뭘 몰라서 이러나본데 지금은 도망가는 게...!"
한창 열내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는 내 지긋한 눈길에 어깨를 흠칫 떨고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지만, 내 팔은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 아니...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그만큼 신성교가 무서운 집단이니까..."
지나치게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니 불편함과 죄책감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녀에겐 너무 심한 짓을 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념의 파동'을 썼을 때는 이런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생기는 거지? 대체 기준이 뭘까. 아니, 애초에 머리 어딘가가 고장났다면 기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미, 미안해 오빠...너무 화내지 마.."
"화내는 거 아냐. 진정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쩍 웃어주었다.
"오빠...?"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잘 보고 있어. 아, 혹시 드림 포인트 들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건냈으나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저, 절대...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에휴...알겠다. 알겠어. 진정해."
젠장, 장난이 안 통하니까 하나도 재미가 없네. 묘란의 두려움을 없애줄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에이,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당당하게 걸어 정문으로 나서자 거대한 갑옷에 황금색 휘장을 요란하게 매단 성기사 하나가 나를 노려보며 길다란 도끼창을 겨누었다.
저 녀석이 대장인가.
"후우...!"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원한 스텟 하나만을 미치도록 올려둔 성과가 드디어 발휘될 때다. 결계에 의해 스킬 효과가 감소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과거 1할도 끌어올리지 않은 감정이 깃든 저주에 신성교의 신관 10명이 달려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선량한 사람에게 저주를 거는 등의 온갖 패악을 부린 주술사 박한길이여! 그대를 여신 프레이야의 이름으로 구류(句留)할 것이며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해 10년 간의 노역을 명하는 바이다! 저항한다면 죄가 더욱 깊어질 뿐이니 얌전히 족쇄를 차라!"
"...장난하냐."
십 년이라니. 설마 현실시간으로 십 년을 말하는 거냐?
게임에 정도라는 게 있어야지.
"후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여기가 테리어의 계획과 내 운명의 분수령이다.
신성 마법으로 저주를 풀 수 있는가 없는가. 이들의 역할은 오로지 그것의 확인뿐이다.
저주를 풀 수 없으면 테리어는 그대로 손을 뗄 것이고 풀 수 있다면 성녀를 대동해 내게 복수하러 오겠지.
아마 테리어는 후자를 간절히 원하겠지만 전자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성기사들에게 저주를 거는 행위 하나만으로도 나는 신성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될 테니까.
심플하지만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이다.
하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문제 없다.
"스으으읍...!"
나는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리며 아까부터 시끄러운 성기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켰다.
"네 놈! 얌전히 무릎을 꿇지 못할까! 저항하면 죄가 깊어진다고 이미 경고했을터다!"
"닥쳐."
천천히 감정을 끌어올리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일단 감정의 5할 정도만.
[원념의 파동이 발동됩니다. 스킬 '성스러운 땅'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오, 개이득.
"네 놈은 동료가 원수로 보일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피륙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크윽...!"
내려다보니 손등이 뼈가 드러날 정도로 갈라져 피를 줄줄 쏟아내고 있다.
여전히 더럽게 아프구만!
[스킬 '저주'가 발동되었습니다.]
"헛!? 크, 으음..!"
순간 그의 예리한 눈에 핏발이 서더니 곁에 있는 성기사를 노려보고 도끼창을 든 손에 힘을 준다.
"으으윽...소용없다! '성스러운 빛'!"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치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더니 그의 몸에서 스며나온 어두운 기운과 맹렬한 경합을 벌이기 시작했다.
"헙!? 이 무시무시한 저주의 기운은...! 크으으! 흐아아아아압!!"
눈을 부릅 뜬 그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목줄기의 혈관이 팽창할 정도로 기합성을 내지르자 빛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더니 저주의 기운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그러나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후욱, 후우욱...! 이, 이렇게나 강력한 저주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부들부들, 그가 들고 있는 도끼창이 당장이라도 동료에게 향할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고작 절반의 위력을 지닌 저주에 저 꼬라지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모든 성기사들에게 저주를 걸어 서로 싸우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연기를 해야한다. 가까운 곳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을 테리어를 제 발로 나오게 만들기 위해 말이다.
"이, 이럴 수가..! 전력을 다한 내 저주가..!"
원하는 감정을 얼마든지 끌어올릴 수 있는 내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심 그 자체. 당장 배우로 전향해도 박수갈채를 받을 수준일 것이다.
아님 말고.
"크하하하핫! 이제야 프레이야 님의 힘을 깨달았느냐! 하지만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 네 놈에겐 신벌이 내려 평생토록 고통 받을지어다!"
"단장 님. 물러서세요."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해진 목청이 크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청아하고 나직한 한 줄기 옥음(玉音)이 그 목소리를 갈라내듯 뚫고 내리앉았다.
"앗..서, 성녀님!"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만들어낸 성기사들 사이로 한 명의 아름다운 여자가 얼굴에 새겨넣은 듯한 여우 같은 미소를 그린 채 또각또각 걸어나왔다. 가녀리면서도 풍만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크롭티와 실룩거리는 엉덩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핫팬츠, 새까만 단발 머리 덕분에 더욱 순백으로 빛나는 그녀의 곁에는 테리어가 건들거리며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 이 사람...와아. 혹시 캐릭터 커스텀 하나도 안 한건가? 특이하다~"
성녀답지 않은 차림새의 성녀는 내려다보는 듯한 눈길로 나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특이하긴, 병신 같은 거지."
승리를 자신해 당당하기 짝이 없는 녀석의 면상을 보고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으나 가까스로 억누르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끌어올렸다.
"테, 테리어 너 이 자식! 네가 벌인 짓이었냐!"
"크크크. 그래 이 개자식아. 난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저주가 무섭지 않은 거냐!"
"푸하하핫! 내 옆에 있는 이 여자가 누군지는 아냐? 성녀야 성녀! 방금 네가 저주를 걸었던 성기사 단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어디 한 번 깝쳐봐!"
"그래."
내 저주와 성녀의 신성력 중 누가 더 위인지 확인해보는 건 필요하긴 하지.
알려줘서 고맙다?
"엉?"
내가 끌어올렸던 모든 감정을 잠재우고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가 자신을 가리키자 불길함이라도 느꼈는지 테리어의 표정이 굳는다.
"테리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방송 켠 상태냐?"
"......"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곡을 찔린 얼굴이 붉어졌기에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푸하핫. 잘 됐네. 그럼 좆돼봐라."
이번엔 약 8할 정도의 감정을 끌어올렸다.
심장이 미친듯이 날뛰며 혈압이 올라가고 피부 위까지 뜨겁게 달궈진다.
"공포에 미쳐 날뛰어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배와 옆구리, 허벅지, 등허리의 살덩이가 뭉텅이로 터져나가며 피가 줄줄줄 흘러내렸다.
"크아으윽...!"
진짜 지랄맞게 아프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엘릭서를 꺼내 쭉 들이켰다.
마시는 순간 생명력과 마나를 모조리 채워준다는 비싸디 비싼 물약인 만큼, 온 몸에 있던 상처는 그야말로 감쪽 같이 아물었다.
"후우...크크큭..!"
좆망겜이긴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니까.
저주를 발동시키기 위한 대가를 단 한 번 바치기만 하면 그 이후에는 상처를 치료하든 재생하든 관여하지 않는다. 즉, 엘릭서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저주를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쿨해. 마음에 들어.
뭐, 저주의 대가가 목숨이라면 애당초 소용 없는 짓거리긴 하지만.
"으, 으아아아악!? 허으으으카하아아아악!"
테리어의 눈과 귀에 무엇이 보였는지, 그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성녀는 잠시 테리어를 내려다보다가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성스러운 빛."
과연 성기사단의 단장이라는 녀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빛줄기.
성녀라는 직책에 걸맞는 능력치로군.
하지만 저주 또한 만만치 않았다.
끼이이에에엑!
마치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은 끔찍한 마찰음과 함께 검은 안개와 눈부신 빛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무, 무슨...! 서, 성령의 눈물!"
화들짝 놀란 성녀가 또 다른 스킬을 발휘하자 그녀의 손에서 다른 형태의 빛무리가 형성되었는데, 성스러운 빛처럼 눈을 찔러오는 강렬한 눈부심은 없었지만 얼마나 밀도가 높은 지 점성이 높은 물처럼 출렁이며 테리어의 몸을 향해 나아가는 모양새가 마치 속이 꽉 찬 비눗방울 같았다.
"너무 느리잖아. 그걸 내버려두면 바보 취급 당할까 걱정될 정도로. 후욱..!"
[원념의 파동이 강화됩니다.]
내 몸에서 스며나온 검은 안개는 빠르게 허공을 미끄러져 테리어에게 향하는 '성령의 눈물' 앞을 가로막았다.
"꺄악...!?"
"우오오...!?"
휘청.
묵직한 무게감과 압박감이 몸을 내리누르고 뒷목을 통해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들이치는 감각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 그렇구만...이런 식으로 연결돼 있다 이거지? 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는 지 이제 이해가 가는구만..!"
감정을 더욱 끌어올리며 근육에 힘을 주는 것과 비슷한 요령으로 이를 악물자 한순간 원념의 파동이 성령의 눈물을 밀어올렸다.
"크윽...!? 까, 까불지 마라!"
여우 같은 미소가 무너진 성녀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성령의 눈물에 힘을 더하자 전신을 내리누르는 묵직함이 배로 늘어났다.
"우악..! 큭..!"
다리가 풀리려는 것을 억지로 바로세우며 이를 악무는 사이 쓰러져 있던 테리어가 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크, 클라라(Clara)아아아아! 이 빌어먹을 년아! 빨리 이거 풀지 않고 뭐 하는, 히, 히이이이익!?"
사색이 되어 바닥을 구르며 날뛰는 그의 모습을 보고 클라라는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큭..!"
"하하, 클라라 성녀님. 힘들대잖아. 빨리 풀어주지 그래?"
"이, 이게...!"
어떻게든 원념의 파동을 짓누르려고 용을 쓰는 탓에 그녀의 늘씬한 굴곡이 여기저기 강조된다. 아, 몸매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모델 같은 스타일의 풍만함이라...비교적 작은 묘란이 끌어안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면 저 여자는 몸을 감상하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키는군. 스트립 댄스 하면 금방 억만장자가 되겠어.
"기, 기사님들! 뭐 하는 거죠! 어서 저 자를 제압하세요!"
"앗..네, 네! 발검하라!"
성녀의 외침에 멍하니 우리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단장이 목척을 높였다.
여기저기에서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쇳소리.
"하, 혼자 힘으로는 안 되니까 숫자로 찍어누르시겠다? 하긴, 그게 합리적이긴 하지..그럼 나도 전력으로 간다?"
"..뭐!?"
입을 쩍 벌린 그녀의 얼굴이 '지금까진 전력이 아니었단 말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 얼굴에 피식 웃은 나는 차분히 감정을 끌어올렸다.
"끄륵, 크후우욱...!"
심장이 미친듯이 날뛰고 뇌혈관이 터져버릴만큼 격하게 박동하기 시작한다.
분노와 증오에 의한 긴장으로 전신의 근육이 파열될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관절이 빠질 것처럼 삐그덕거린다.
"크하핫...!"
원한 스텟을 위해 감정을 끌어올렸을 때는 이 짓거리가 그저 공허하기만 했는데 막상 눈앞에 적이 있자 투쟁심이 치밀어올랐다.
모아놨던 힘을 단번에 터트리는 쾌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후욱...!"
고통스러울 정도로 새빨갛게 물드는 시야를 심호흡으로 인내하며 감정을 끝없이 끌어올렸다.
심장의 격동이 불규칙적으로 일그러지고 혈관이 팽창할 정도로 치솟은 혈압 때문에 전신곳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더, 더.
마침내 눈앞이 시꺼멓게 물들 무렵.
[스텟 '원한'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지금이다. 한계를 넘어 스텟이 오르는 시점.
"니 새끼들 전부...공포에 미쳐 날뛰어라."
다음 순간.
온 몸이 댐처럼 무너져내리며 핏물이 터져나왔다.
"쿨럭...!"
더럽게 아파! 진짜 미치도록 아파!
"커흑...!"
고통은 계속되었다. 설 수 없게 된 내가 쓰러지고, 시야가 검게 물들고, 팔다리의 감각이 사라지고 나서도.
"시..발...!?"
너무 길지 않냐. 좀 많이 긴 거 같은데.
"크...악...!?"
아파. 아프다고. 아파! 아파아아아!
체감상 최소 한 시간은 미칠듯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 것 같다.
[대가의 정산이 끝났습니다.]
[스킬 '저주'가 발동됩니다.]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귓가에 울리는 인공적인 목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원한 스탯 때문에 저주의 위력이 너무 강해진 것 같다.
그에 걸맞는 대가가 내 목숨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더욱 고통받은 것이겠지.
빌어먹을 좆망겜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