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회
박한길을 연구하는 송선재와 강은상은 며칠 전부터 기이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특정 조건하에서만 생기는 현상이었기에 원인은 금세 규명할 수 있었다.
"역시 이 사람 때문이겠구나."
"네...틀림없어요."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캡슐 안에 잠들어 있는 박한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몸이 가뿐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사고 자체가 긍정적으로 변하며 의욕이 넘치고 순수한 열정이 샘솟는다.
마치 부정적인 무언가가 모조리 빨려나간 것처럼.
그들이 지난 며칠 동안 겪은 기이한 현상의 정체였다.
신기하게도 박한길 주변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이상하구나. 분명 박한길은 저주 계열의 각성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넘치다니...으음..."
"마치 버프 능력 같네요. 설마 저주와 버프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속단하는 건 이르다. 어쩌면 그런 저주일지도 모르니까."
"하하하! 그렇다면 좋은 저주네요! 매일 받고 싶은 걸요. 수면중인 상태에서 그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직 미스터리긴 하지만요!"
"그건 그렇구나. 허허허..."
-쉬리리릭...샤아아...
태평하게 말하며 웃던 두 사람의 얼굴은, 거대하고 낯선 기척에 돌처럼 딱딱해지고 말았다.
"무, 무슨...!?"
"뭐죠...?"
-경배하라. 그리하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헛!?"
"뭐야!? 누구냐!?"
갑작스레 울려퍼진 낮고 깊은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이름은 아리, 신의 대리자다.
"대, 대체....!"
"자, 잠깐만요. 소장님. 이 목소리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은데요...?"
강은상이 말한 직후, 박한길의 캡슐이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휩싸이더니 그의 왼팔에 그려진 문신이 불길한 빛에 휩싸였다.
다음 순간.
"허억....!?"
"말도 안 돼...!"
연구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뱀이 느닷없이 나타나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들을 굽어보자 그들은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모, 몬스터...!?"
-무례하다. 인간.
"대, 대체...!"
놀람과 두려움 이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외감이 벅차오르자 두 사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숭배하고 경애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
"...뭐?"
"그게 무슨...말입니까?"
거대한 뱀은 보통 뱀에겐 없는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더니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어보였다. 사악함과 자비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묘한 눈웃음이었다.
-너희들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어둠이 뚜렷히 보이는구나. 비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은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 각성자에 대한 불만, 미움, 혐오, 공포, 더 나아가 증오까지...
"어...헉...!"
"크허...!?"
마치 마음을 뚫고 들어와 옭아매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숭배하고 경배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바라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제야 말의 맥락을 파악한 두 사람은 거대한 뱀이 무엇을 말하는 지 깨닫고 경악했다.
"그, 그런 일이 가능할리가...!"
각성.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를 괴수가 날뛰고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헌터가 스킬과 마법으로 괴수를 토벌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그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각성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소리가 우스갯소리가 아니게 된 세상인 것이다.
"가, 각성의 명확한 기준과 이유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대체 당신이 어떻게 각성을 시켜준다는 말입니까? 이상한 유혹으로 저희들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소용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리의 말이 거짓이라고 속단하면서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공상의 경계가 진작에 무너졌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그러한 세계다.
어떤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괴수, 헌터, 던전 같은 것들도 애당초 비현실적이며 인지를 벗어나 있다. 세상은 진작에 미쳐버렸다.
그것들에 비하면 인위적인 각성 따위는 사소한 일일 것이다.
"후우, 후우우..."
거기에, 탐욕이 더해진다.
자신에게도 인지를 초월한 힘이 있었다면.
불합리한 외압에 대항할 무력을 지닐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너희들은 그저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각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안 된다면 그 뿐. 손해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주인을 걸고 맹세하지.
"...!"
그저 말 뿐인데도, 두 사람은 그 말의 무게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근거가 없음에도 거짓이 아님이 느껴진다.
"꿀꺽...!"
"소, 소장님. 어떻게 할까요...?"
마른침을 삼키는 송선재와 반신반의하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유혹에 격렬하게 흔들리는 강은상.
둘은 한참을 의논하며 고민했고 아리는 그들을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좋습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들을 각성시켜준다면...설령 악마라 해도 경배하고 숭배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크크크...좋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은 아리의 검은 몸에도 검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몽실몽실 흘러나와 그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무, 무슨...!?"
"으억...?"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이윽고 두 사람의 몸에 각자 다른 양의 검은 안개가 스며들고 두 사람은 인지를 벗어난 힘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 힘은 일반적인 각성과 달리 근원과 유래가 뚜렷했기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박한길을 향한 경외심과 보호욕을 갖게 되었다.
게임 시스템과 드림아웃의 인공지능 라온의 제한이 없는 신성타락과 악신의 축복.
그것이 현실에서 처음으로 펼쳐진 순간이었다.
***
무릎을 꿇은 늙은이는 엔피시이며 이름은 바단(Badan)이고 그의 제자이자 유저인 남자는 데이비드(David)라고 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스승을 따라 일단 무릎을 꿇긴 했지만, 영문을 몰라 나와 스승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오늘도 스승님과 함께하는 연구 일기]의 주인공이었다. 물론 바단은 엔피시이기에 방송이라는 것 자체를 몰랐지만.
"음...그러니까, 내가 카시넬인지 뭔지 하는 악신의 강림이다?"
"네! 틀림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땅에 처박은 머리를 미동도 않는 늙은이를 삐딱하게 내려다보자 그는 더욱 크게 목청을 돋웠다.
"당신을 둘러싼! 그리고 당신에게 내재된 원념과 부정은 감히 인간이 지닐 수 없는 방대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아하, 원한 스텟을 말하는 건가? 하긴 내 원한 스텟이 조금 비정상적이긴 해.
그래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아마 '원념의 지배자' 스킬 때문이겠지?
"크흠...그래서, 내 신자가 되고 싶으시다?"
"노예라도 상관없습니다! 제 유일한 아버지시여!"
누가 아빠야. 벌써 치매라도 드셨나?
그나저나 이걸 어쩌나...혹시 악신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구라고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연기하는 거 아냐?
"...으음..거절한다면?"
"...!!"
그는 잠시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결연한 얼굴로 품 속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오, 뭐야. 한 판 뜨게?
"그렇다면 저는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저의 우상, 저의 길, 저의 믿음이시여. 그럼 최소한, 스스로의 배를 가르고 제 힘과 어둠을 당신에게 보태기라도 하겠습니다."
"......"
파르르 떨리는 손아귀를 보니 당장이라도 자신의 배를 가를 것만 같다.
만약 저 비장함이 연기라면 속아도 별로 안 억울할 것 같은데?
"후우...좋아. 그럼 너, 내 신자가 돼라."
"...크흑...!"
내 말에 바단은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떨구며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는다.
"감사합니다! 심연과 같은 자비로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오..! 우리의 신이여! 갈 곳 없는 이단아의 목적지여! 그 품에 들어갈 수 있다니 저는...! 저는...!"
"어, 음..."
노인이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것이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그를 일으켜세우려 했다. 그 순간.
['바단'이 당신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특수 스텟 '악신성(惡神聖)'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수 스텟 '악신성(惡神聖)'이 1 만큼 오릅니다.]
...뭐야 이건.
서둘러 상태창을 켜보니 방금 생긴 스텟과 특수 항목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악신성(惡神聖)]
신을 바라는 마음과 믿음이 모여 신성이라는 결실을 맺습니다. 이는 신을 이루는 최소 요건으로, 당신은 어둠을 품은 모든 자들의 신이 될 자격이 생겼습니다.
-이 스텟은 신도의 수와 비례하여 가감합니다.
-이 스텟은 사용자의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 현재 악신을 숭배하는 신자 : 1
"...허어."
그러니까, 내가 신이 됐다는 건가? 거 듣기 나쁘진 않네. 곳곳에 부정적인 단어들이 눈에 띄는 것만 제외하면.
-쉬리릭!
그때, 왼팔의 뱀 문신이 어둡게 빛나더니 부르지도 않은 아리가 튀어나와 그 거대한 존재감을 흩뿌리며 우리들을 굽어봤다.
"오오오오...! 이, 이것은 어둠에서 태어난 신수...!"
-쉬릭, 샤아아아...!
[사역마 '아리'가 당신의 신자에게 '악신의 축복'을 내리길 바랍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응? 어어...뭐, 그래라...?"
이 녀석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하는구나. 신기하네.
나도 모르게 허락하자 아리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튀어오르더니 바단의 몸을 휘감고는 천천히 그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스킬 '아리'의 '악신의 축복'으로 인해 '바단'의 능력치가 조정됩니다.]
['바단'이 당신의 신자이기에 '악신의 축복'의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바단'이 '악신의 축복'을 받는 동안 당신을 향한 친밀감과 존경심을 표할 것입니다.]
"오오오...? 이, 이 힘은...! 아아아아! 감사합니다. 오오, 우리의 아버지시여...!"
검은 안개를 모두 흡수한 바단은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이마가 찢어질 때까지 바닥에 처박아댔다.
"그거 그만해. 두개골에 구멍 뚫리겠다."
"알겠습니다! 저희의 아버지시여...!"
말 한 마디에 당장 동작을 멈춘 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명령을 바라는 개 같다. '손'이라고 말하면 손을 내밀 것 같다. 아니, 아마 내밀겠지.
"...바단. 너 레벨 몇이냐?"
"아, 네! 제 레벨은 566 입니다!"
"더럽게 높네."
"무슨 말씀을!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카시넬 님을 맞이하기엔 너무나 초라합니다! 나태하고 게으른 저를 벌해주시옵소서!"
"그건 됐고. 음...이 주변에 네 연구소가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남자를 여자로 변화시키는 아이템도 있어?"
"반전의 묘약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만든 것이니까요!"
나는 히죽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크크크, 그렇단 말이지. 네 연구소 구경 좀 하자."
내 말에 바단은 얼굴을 찡그리긴커녕 손자라도 본 것 마냥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이를 말이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태도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요! 오빠!"
"응? 클라라? 왜?"
"이대로 떠나는 건가요? 저 사람들은 어쩌고요? 구했으니 일단 책임은 져야할 거 아니에요?"
클라라가 방금 막 해방된 사람들을 가리키자 나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퀘스트는 완료됐잖아?"
"하, 하지만...그렇다 해서 저 사람들을 내버려둘 수는..."
자신의 드레스자락을 그러쥐며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셨다.
선자라는 것도 피곤하겠구만.
응? 왠지 사람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는데...기분 탓인가?
멍하니 사람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바단이 고개를 치켜들며 클라라를 죽일 듯 노려봤다.
"거, 건방진!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을 하느냐! 이 망할 계집, 신성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여신의 개로구나! 내 손수 피부를 벗기고 살을 저며서...!"
"닥쳐. 감히 내 여자한테 막말을 해?"
"죄, 죄송합니다!"
새파랗게 질린 바단의 이마가 다시 바닥에 처박힌다.
"이 순간부터 내 일행에게 함부로 말하면 신자 못하게 한다? 축복도 거둘거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유치한 말이었지만 바단은 정말로 두려운지 온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에휴, 알겠다 알겠어...그럼 묘란, 클라라, 에필리아. 너희들은 여기에서 사람들 좀 돌봐주고 있어. 나 혼자 이 녀석들 연구소에 갔다 올게."
"싫어! 난 따라갈거야!"
"......"
"알겠습니다! 주인님!"
묘란은 냉큼 팔짱을 껴왔고 클라라는 침묵했으며 에필리아는 충성스럽게 외쳤다.
제각각으로 반응하는 그녀들을 보며 피식 웃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 클라라를 돌아봤다.
"그러고보니 클라라. 연계 퀘스트도 있다고 했지? 어떻게 됐어? 역시 전부 죽여야 하나?"
"...완료됐어요. 전부."
"오 정말?"
"대신 다른 퀘스트가 떴네요. '악신의 뿌리를 뽑아라' 라는 이름의..."
"......"
그거 존나 흥미롭네.
"크흠...그거 설명은 나중에 들을게. 너희들은 여기서 사람들 좀 지키고 있어. 알겠지?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알겠어요. 오빠."
"맡겨만 두십시오!"
클라라와 에필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자리를 뜬 우리들은 바단과 데이비드의 안내를 받아 그들의 연구소로 향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들의 연구소는 도적들의 지하실보다 훨씬 끔찍했다.
키메라의 던전을 깬 내게는 익숙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규모도 커서 돌아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바단은 레벨만큼 대단한 흑마법사였던 듯, 반전의 묘약을 포함한 몇 가지 재밌어보이는 아이템들을 무더기로 얻을 수 있었다.
예컨대 투시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관통의 묘약'이나 몸을 어리거나 늙게 만들 수 있는 '생로의 묘약'등이 그러했는데, 무엇보다 레벨 제한이 없다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희희낙락하며 떠나려는 나를 어떻게든 따라오려는 바단을 가까스로 말리고 싱글벙글 웃으며 산채로 되돌아온 나는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라바크 제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