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55회 (55/189)



〈 55화 〉55회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오크들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녀석들이라고 한다.

"저, 저는 정말 잘못이 없습니다요!  마차 안에  게 수인 노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죠! 거금을 선뜻 준다고 할 때 거부했어야 하는데! 하, 하여간...이렇게 된 이상 저는 계속 목숨을 노려질 것 같으니 제발 저를 호위해주시면  되겠습니까? 사, 사례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자신은 그저 이용당했으며 부당하게 표적이 된 불쌍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반바를,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봤다.
맥락을 보면 수인 노예라는  불법인 모양인데...애당초 자기가 옮기는 마차의 내용물이 뭔지 확인도 안 하나? 그리고  수인 노예를 옮기는 마차를 누군가가 오크를 조종해 습격했다고?  직접 나서지 않고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야? 무슨 목적으로?

"제가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카론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낸다.


"응? 뭔데? 말해봐."
"그게..."


카론은 반바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망설였다.

"비밀로 해야 되는 거야? 가까이 와서 말해."
"가, 감사합니다."


손가락을 까딱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귓가에 입술을 갖다대고 손으로 가린 채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저 자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자의 말처럼 누군가 몬스터를 조종한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수인의 어린 아이가 특유의 냄새로 몬스터를 끌어모으기 때문입니다. 저 마차에는 수인의 냄새를 막아주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나 많은 수의 몬스터가 몰린 것입니다. 게다가 마차를 호위하는 용병들도 그 몬스터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저 반바라는 자는 마차에 수인이 있다는 걸 정말 몰랐을 겁니다."
"흐음...즉, 저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해 수인을 옮기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정황상 그렇게 됩니다. 최근 암암리에 수인 노예가 성행하는 도시 슈칼(Shukal)에서 수인 노예가 대량으로 탈주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든 수인의 해방을 부르짖는 비공식 테러 조직 브레이크 머즐(Brake muzzle)이 벌인 짓이죠.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만약 살아남은 이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면 저 수인들은 살아남은 브레이크 머즐의 일원들이 몰래 빼돌린 것이겠죠."
"오..."

좋은 정보를 너무나 손쉽게 얻고 말았다. 간부라는 이름값을 하는구만.

"흐음...이보쇼 반바 씨."
"아, 네!?"

우리가 속닥거리는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던 반바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 그게...저는 슈칼의 평범한 마부입니다요. 목적지는 허빗(Hubbit)입니다."
"허빗?"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론이 다시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수도 동쪽에 위치한 영지입니다. 이베라 이블의 독자적인 정보에 따르면 그곳이 브레이크 머즐의 총본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퍼즐 맞추듯 딱딱 짜맞춰 지는구만.
그나저나 카론 이 녀석 진짜 쓸모 있네. 필요한 정보가 알아서 튀어나와.

"어쩔까..."

슬쩍 수인 아이를 쳐다봤다.


"......"

복슬복슬한 털과 동그랗고 커다란 눈.
귀엽다.
게다가 수인이라...그쪽 취향은 없지만 방송으로는 많이 접했단 말이지. 상당히 흥미롭다.

"허빗이라는 곳은 얼마나 먼 곳이야?"
"허빗이라면 저희의 목적지인 토르카 영지보다 조금  먼 곳에 있지만, 얼마 떨어지진 않은 곳입니다."
"호오. 그래?"

겸사겸사 할 수 있단 얘기구만.

"좋아. 반바 씨. 수인들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이쯤에서 손 떼쇼."
"네, 네...?"
"우리가 수인들을 허빗까지 대신 옮겨주겠다는 말입니다. 당신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을 것 아닙니까? 이쯤에서  털고 떠나면 위험부담도 없겠지. 안 그렇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을 겁니다. 몬스터들이 노리는 건 수인이니."
"아, 아무리 그렇다해도...아니, 그렇군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는 이만 손을 떼겠습니다."

간단히 내 제안을 받아들인 반바는 비굴하게 웃으며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잠깐. 그럼 우리들의 보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음?"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병들  하나가 다가왔다.
눈썹이 굵고 허리에 날이 넓적한 검을  남자였다.

"동료도 잃고 상처도 많이 입었소. 우린 이대로 돌아가면 의뢰 실패의 패널티를 떠안아야 하는데다 금전적으로도 이만저만한 게 아닌 손해를 본단 말이오."
"흐음...몇 명이나 죽었고 몇 명이나 살았습니까."
"...여덟의 용병 중 다섯이 죽었소. 나를 포함해 살아남은 세 명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경상이오."
"그렇습니까? 의뢰비는 얼마를 받기로 했습니까?"
"호위 임무가 성공하면 받기로  돈이 두당 5만 골드요."
"그렇군요."


즉시 인벤토리에서 골드를 꺼내자 묵직한 돈주머니가  손에 쥐어졌다.


"60만 골드입니다. 죽은 사람들 몫까지 포함한 위로금이라 생각하세요. 세 사람이서 나누기 쉽게 더 얹었습니다."
"......"

돈주머니를 건내자 그는 입을  벌린 채 나와 금화 주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 의뢰는 실패했다 보고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망하게 고개를 숙인 그는 서둘러 동료들에게 돌아가 금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응?"

부서진 마차를 살펴보려 했던 나는 반바가 우물쭈물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어보였다.

"이런, 그러고보니 반바 씨를 챙겨주지 않았네요. 여기 있습니다."


나는 일부러 용병들 쪽으로 몸을 돌려 시야를 막고 남몰래 20만 골드를 쥐어줬다.

"...!"

환하게 변하는 그의 낯빛.
하지만 나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반바 씨. 제가 당신에게 챙겨줬다는 건 비밀입니다. 어째서인지는 아시죠?"

내가 슬쩍 용병들을 가리키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자신이 지금부터 저들과 함께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칼밥 먹고 사는 용병이 황금 돼지를 가만히 놔둘리 만무.
나는 슬쩍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줬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가, 감사...저기 혹시...호위는.."
"유감이지만, 거기까진 못 해드리겠군요."
"그렇겠죠...에휴...뭐, 저들도 용병이니 새로운 의뢰를 제시하면 받아들일 겁니다. 아마도요. 아참. 이걸 받으십시오."


의외로 의연하게 웃은 반바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딱딱한 철판에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휘장이었다.


"이걸 내밀면 영지 입구에서 검문을 받지 않아도  겁니다. 저도 슈칼에서 그랬으니까요."
"그래요? 이거 고맙군요."

나는 그것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잠시 후.
떠난 반바와 용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마차를 완전히 뜯어낸 카론과 에필리아가 끝없이 수인들을 꺼내놓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만 있을 줄 알았더니 성인으로 보이는 수인들도  있었다.


"어, 음..."


그런데, 생각보다 많다.
서른...아니, 마흔은 가뿐히 넘을 것 같다. 이 숫자가 어떻게 저만한 마차에 들어가 있었던 거지?  쉬는 것도 힘들겠다.


"......"
"......"

수인들도 눈치는 있는 지, 불안한 눈으로 일제히 이쪽을 쳐다봤는데  눈동자의 모양이나 색이 전부 다를 뿐만 아니라 외형도 천차만별이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털이 풍성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비늘로 뒤덮은 녀석도 있고 인간에 가깝게 생긴 녀석이 있는가 하면 동물에 가깝게 생긴 녀석도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여자라는 것 뿐이다.

"카론. 왜 여자 밖에 없어?"
"수인 수컷은 상품 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취급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수인 노예가 불법이라 대놓고 노역을 시키지도 못할 뿐더러 난폭한데다 힘이 강해 다루기도 쉽지 않죠. 요즈음 수인 노예라 하면 대부분이 성적 노리개를 의미하므로 암컷만을 취급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수인들을 쳐다봤다.
이만한 수가 있는데도 겁먹은 얼굴로 숨소리 밖에 내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이 슬쩍 측은하게 느껴진다.


"흠...일단 족쇄랑 수갑부터 풀까. 카론, 에필리아."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녀들이 수인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쇳덩이나 다름 없는 구속구를 손쉽게 우그러뜨리는 동안, 나는 가장 앞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꼬맹이와 눈을 마주쳤다. 인간으로 치면 대여섯 살 정도 먹었을까.


인간과 토끼가 반씩 섞인 것 같은 외형의 아이였는데 피부가 짧은 회색털로 뒤덮여 있고 손은 인간의 손인데 발은 커다란 토끼의 발이었으며 머리 위로는 길다란 토끼귀가 뻗어 있고 토끼 수염 아래의 입은 세모꼴이었다.

확실히 귀엽다. 지켜보고 있자니 푹신해보이는 털을 쓰다듬고 싶어진다.

"이름이 뭐니?"
"...나, 나미(Nami)요..."


꼬맹이는 겁먹은 눈치로 주저했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렇군...나미, 혹시 배고프지 않니?"
"...아뇨."

그렇게 말한 순간, 나미의 배에서 우렁찬 천둥 소리가 울려퍼진다.


"...배고픈  같은데."
"배, 배 안고파요...!"
"배고프다면 배고프다고 해도 돼. 난 네 주인이 아니고 너도 내 노예가 아니니까 사양할 필요는 없어. 고기 먹을 수 있니?"


고기라는 말에 나미의 눈에 슬쩍 생기가 감돌았다.

"...네. 좋아...해요."

그렇군. 토끼 수인이라고 야채만 먹는  아닌가.

"주인님. 전부 부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착한 녀석들."


곁으로 다가온 카론과 에필리아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겨주자 그녀들의 입가가 베시시 호선을 그린다.

"일단 밥부터 먹고 시작하자. 아, 보기 흉하니 시체부터 치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선언했으나  단 한 차례의 식사 시간으로 나는 수인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

"끼에에에엑!"
"끼갸갸갹!"

카론과 에필리아의 손에 간단히 죽어나가는 몬스터들을 보며 지겨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이 몇 번째지?"
"글쎄...네 번째 아냐?"
"다섯 번째에요."


평원 위에 펼쳐진 십여 개의 모닥불과 그 위를 덮은 넓적한 돌 위에서는 이제 막 올린 수많은 고깃덩어리가 자글거리며 구워지고 있었다.
저번에 인벤토리에 넣어놨던 고기들이다.

"꿀꺽...!"
"햐아...!"

수인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렸지만, 손도 올리지 않은 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대체 그동안 어떤 생활을 했으면 저렇게나 눈치를 살피는 건지...혀 끝에 쓴 맛이 감도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모닥불을 준비하고 고기를 올리는 과정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몬스터의 습격이 발생한 것이다. 아무리 수인의 냄새가 몬스터를 불러 모은다지만 이건 조금 심한 거 아닌가?

"애들아.  눈치 살피지 말고 먹어. 몬스터들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묘란, 클라라. 너희들은 애들  살펴주고."
"응. 알았어. 오빠."
"네."


그때, 카론의 주먹에 머리가 터져나간 오크의 초록색 핏방울이 고기 위에 툭, 떨궈졌다. 순간적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화나는 광경이었다.

"...이런 시부럴 새끼들이 진짜."
"죄, 죄송합니다! 신이시여!"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카론이 급히 무릎을 꿇는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주며 즉시 천호와 아리를 불러냈다.


"모조리 쓸어버려!"

-크르르르릉!
-쉬리리릭!

푸른 불길과 음습한 냉기가 초원을 휩쓸자 미친듯이 울려퍼지던 몬스터들의 괴성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
"......"


적막함이 감도는 초원 위에서 수인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경직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해? 고기 타겠다. 어서 먹어."
"...!!"


내 말에 그녀들은 먹기 싫은데 억지로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고기를 마구잡이로 우겨넣기 시작했다.


이러면 내가 나쁜놈  것 같잖아.


"...!!"
"우걱우걱! 우적우적우적!"

막상 고기맛을  그녀들은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눈을 무섭게 빛내며 불판위에 온 신경을 쏟았는데, 보는 내가  배부를 정도였다.


"에휴...카론. 저 부서진 마차 수리할 수 있겠어?"
"음...불가능하진 않을  같습니다."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까 굴러갈 정도로만 수리해둬. 몬스터는 내게 맡기고."
"...네!"


카론은 경외심 넘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마차로 다가가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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