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78회 (78/189)



〈 78화 〉78회

"오빠! 큰일났어!"
"어허! 교관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습니까! 훈련생 기합 받고 싶은 겁니까!?"
"윽...아,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황급히 달려왔던 샤미엘은 내 엄한 눈빛에 찔끔 어깨를 움츠리고는 조심스럽게 반투명한 창을 가시화시켜 앞에 띄웠다.

"무슨 일인데 그래?"

화면에서는 신성교  병력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신났어? 지원 병력이라도 도착했나?"
"성녀가 와서 그래."
"...뭐?"
"성녀가 왔다고!"
"...뭐!?"

한 박자 늦게 그녀의 말을 이해한 내가 반투명한 창에 얼굴을 박았다.


"어디? 어디에? 젠장, 전부 콩알만하게 보여서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방송 시점이 높은 하늘이었기에 내 눈에는 거대한 물결이 일렁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 봐. 다른 방송을 찾아보면...역시, 이것 봐봐."


재빠르게 다른 방송을 띄운 샤미엘이 화면을 들이대자 환호하는 성기사와 사제들 너머로 높은 단상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헬로이즈 니이임!
-성녀께서 우릴 구원하시러 오셨다!
-오오! 여신의 대리자! 우리의 희망이시여!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보랏빛 곱슬 머리에 오밀조밀하게 아름다운 얼굴, 은근히 노출도가 높은 새하얀 의복, 자신의 키보다 긴 스태프.

"...이게 성녀라고?"

정황상 그녀가 성녀인 것은 분명하나 믿기지가 않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순간 스태프가 너무 길어서 착시를 일으킨 줄 알았을 정도다.


"이건...그냥 어린애 아냐? 진주보다도 작은 것 같은데?"
"진주가 누군데? 다른 여자야? 하여간..."

눈을 흘기는 샤미엘의 예리한 시선에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인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성녀 맞아. 그리고  여자 이렇게 보여도 성인이야. 그냥 외형이 어릴 뿐이고."
"헤에...거 참 신기하네. 혹시 유저야? 예쁘긴 엄청 예쁜데."
"아니. 엔피시야. 내가 알기로 성녀들 중 유저는 단  명 밖에 없어. 이 여자는  번째 성녀인 헬로이즈(Heloise)라는 것 같아. 다섯 성녀들  세 번째로 신성력이 강한 여자지."
"세 번째 성녀가 세 번째로 강하다라...혹시 첫 번째 성녀가 가장 강한 거야?"
"응. 성녀의 순서는 선착순이거든. 즉, 순위가 높은 성녀일수록 오랫동안 성녀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야. 당연히 그만큼 신성력도 높겠지."
"아, 그래..."

그때, 생김새와 다르게 오연한 눈빛으로 병사들을 굽어보던 헬로이즈가 스태프를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여신의 자식들이여. 이제 저 부정한 자들에게 벌을 내릴 때가 왔노라!


그녀가 스태프를 하늘로 번쩍 치켜들자, 일대를 집어삼키는 거대하고 새하얀 빛기둥이 치솟았다.


"와우..."

직접 느껴봐야 알겠지만,  정도면 클라라가 성녀로 있을 적보다 훨씬 강한 것 아냐?


"...샤미엘. 성녀가 가세한 병력에 토르카 영지가 버틸 수 있을  같아?"
"아니. 이 여자 앞에서 언데드 따위는 그냥 날파리나 다름 없어. 아무것도 안하고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증발해버릴 거야. 거기에 신수까지 소환한다면 볼 것도 없지. 토르카 영지가 통째로 사라질 걸?"
"...그래.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야겠군. 카멜로가 죽으면 녀석이 박한길이 아니라는 게 들키고 말테니. 뭐, 실버 크로우 때문에 알 사람은 전부 아는 정보겠지만..."
"...응?"

나와 눈을 마주친 샤미엘이 흠칫 어깨를 떨며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히죽, 웃어보인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게 읊조렸다.

"레벨 천을 위해서. 달려보자고."

***

 닷새 뒤.

"점호!"
"1번 훈련생 묘란! 레벨 1020!"
"2번 훈령생 클라라! 레벨 1023!"
"3번 훈련생 에필리아! 레벨 1110!"
"4번 훈련생 카론! 레벨 1112!"
"5번 훈련생 샤미엘! 레벨 1040!"

순차적으로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음. 마침내 모든 훈련생들이 드디어 천 레벨을 넘겼구나."
"......"
"......"


군기가 바짝 든 부동 자세였지만, 그녀들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목청을 가다듬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우렁차게 외쳤다.


"감개가 무량하다! 이제 제군들은 본 교관이 없어도 '오염된 유적'의 지하 1층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훈련생들이 모든 훈련을 수료했음을 알리는 바이다! 긴 시간동안 모두 수고했다!"
"우, 와아아아아아!"
"흑흑흐규...! 드디어..!"
"모두 수고하셨어요! 주인님도요!"
"후우..."
"드디어  빌어먹을 노가다가 끝났구나!"


환호하는 묘란, 울음을 터트리는 클라라,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는 에필리아, 긴 한숨을 내쉬는 카론, 자리에 주저앉으며 하늘을 우러러 보는 샤미엘.


저마다의 반응으로 기뻐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조금 놀려볼까?

"커흠, 크흠!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어?"
"뭐?"
"네?"
"훈련을 받았으면 그걸 써먹어야 하는 법! 그러니 지금부턴 곧바로 자대 근무를 이어가겠다. 목표는 레벨  천!"
"...!"
"......"
"......"
"으헉?"


분위기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부릅뜬 원망 어린 눈길이 쏟아지는데, 얼마나 음습한지 구정물로 만든 얼음을 갖다댄 것만 같았다.

"...농담이야."
"휴우~ 깜짝 놀랐네..."
"훌쩍, 훌쩍...!"
"아하핫,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시라구요..."
"하아..."
"순간 죽이고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묘란, 서럽게 우는 클라라, 어색하게 웃는 에필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카론, 살벌하게 중얼거리는 샤미엘.

"...그렇게 힘들었어?  재밌었는데."
"그야 오빠는 재밌었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있으니까! 우리는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힘들고 지치고 욕구를 해소하기는 힘들고...다시는 하기 싫은 경험이었어."


묘란의 투덜거림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결국 해냈잖아? 장하다 장해. 말 잘듣는 착한 아이야."
"하아...뭐, 결국 버스 제대로 탔으니 개이득이긴 하지만...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레벨 천 달성했잖아?"
"으음...글쎄..."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일행들의 레벨을 더욱 끌어올리고 싶었다.
내가 고민하는 기색이자 재빨리 다가온 묘란이 팔을 끌어안으며 콧소리를 낸다.

"오빠앙~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응?  이제 쉬고 싶은데~ 넓은 침대에 누워 자고 싶고 따듯한 물에 목욕도 하고 싶고 맛있는 요리도 먹고 싶어. 응?"
"어쩔까. 이왕하는 거 던전을 깨는 것도 나쁘진 않을  같은데..."


일행들의 레벨을 급속도로 끌어올리긴 했지만, 과연 이 정도로 괜찮을까 싶다.
레벨보단 스킬 숙련도와 스텟 훈련, 그리고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이 오염된 유적에서 뼈저리게 심감했기에 솔직히 불안하다.
아마 일행들은 동레벨의 유저보단 약하겠지. 아니, 악신의 축복이 있으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인가?

[원한 : 267855(+300000)]

오랜만에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원한 스텟이 엄청 올라가 있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하면 거의 열 배에 가까운 수치다.

"오빠앙~ 제발. 응? 부탁이야. 다른 사람들도 엄청 지쳤단 말이야. 한 번 쯤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정말 지쳐 쓰러지고 말거라고."
"...너희들도 같은 생각이야?"

 여자들을 둘러보며 묻자 그녀들은  차례 눈치를 살피더니 묘란과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시 조금...힘드네요."
"전 여보의 명령이라면 어디까지고 따라가겠어요."
"이젠 정말 때려죽여도 못해...힘들어."
"전 괜찮은데요 주인님. 아, 그런데 휴식 때 샤미엘의 팔다리를 잘라도 될까요? 그럼 자지만으로 들고 다닐 수 있어서 편하고 재밌을  같은데..."
"......"
"......"
"......"
"......"


모두가 소름 돋는다는 얼굴로 에필리아를 쳐다봤다.
특히 샤미엘은 매우 경악하여 머리털까지 쭈뼛 섰는데, 막상 얼굴은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그놈의 마조히즘이라는  뭔가 싶다.

"...에필리아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으니 이쯤하고 가까운 마을로 가서 쉬자."
"네? 아뇨. 전 괜찮은..으응..!?"
"쉬자면 쉬는 거야. 알겠어?"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와 함께 자지를  그러쥐자 그녀는 조건 반사적으로 고간을 앞으로 내밀더니 골반을 살랑살랑 내저었다.

"으으으응...! 오, 오랜만에 느끼는 주인님의 손길...기분 좋아요오..!"

순식간에 발기한 그녀는 말릴 새도 없이 사정해버리고 말았다.


"우왓!?"
"아흐으으읏...!"

...그러고보니 최근에 에필리아를 소홀히 대했던 것 같기도 하고...아무리 그렇기로소니 만지는 것만으로 가버리냐.

"어휴, 너도 참 못 말린다."
"에헤헤...주인니임.."

그녀를 끌어안고 등허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최대한 밀착하며 몸 여기저기를 부벼왔다.

"주인님 좋아요. 너무 좋아...에헤헤."
"크크, 귀여운 녀석. 마을로 돌아가면 오랜만에 귀여워해주마."
"정말요? 와아~"

안겨들어 얼굴을 부비는 에필리아를 끌어안은 채, 우리들은 던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 던전 노가다가 드디어 마무리된 것이다.

"샤미엘. 토르카 영지의 상태는 아직도 그대로야?"
"응. 질질 끌고 있어."

그녀가 띄운 방송 화면을 보니 성녀가 있음에도 토르카 영지의 언데드 군단은 아직까지 건재했다.

"대체 왜 한 번에 끝내지 않는 거야?"

신수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성녀가 나선다면 순식간에 해치울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성교가 라바크 제국을 어지간히 먹어치우고 싶은 모양이네."
"뭐?"
"이건 일부러 이러는 거야. 라바크 제국이 초조해지도록 말이지.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라바크 제국의 황제와 협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거참 욕심도 많은 것들이네."
"그러게 말이야. 뭐, 우리 입장에선 좋은 일이지. 괜히 초조해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긴..."


질리지도 않고 서로를 마주보는 신성교의 병력과 언데드 군단을 보던 나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

샤미엘의 그리핀을 타고 한나절 정도 이동했다.

플헤미님 대삼림 초입과 가장 가까우며 라바크 제국 서쪽 끝에 위치한 곳에는 히스마우(Heathmau)라는 이름의 국경도시가 존재했다.
대삼림에서 내려오는 몬스터 때문인지 이곳의 방벽은 우리가 방문했던 남동쪽의 국경도시 마르빈보다 높고 두터웠으며 건물들도 화려하다기보단 기능성 중시의 딱딱한 양식이 많았는데 거주하는 사람들의 복색이나 태도 또한 거칠고 살벌했다. 현실의  차림새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이곳의 생활이 어떤지 짐작할  있을  같다.


"근데 뭔가 성기사 같은 녀석들이 엄청 많은 것 같은...아, 이거 엄청 거슬리네."

혹시 몰라서 샤미엘의 도구로 얼굴을 바꾼 게 엄청나게 신경쓰인다. 골격과 피부결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얼굴에 닿는 공기의 감촉이 낯설었기에 자꾸만 얼굴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뀐 생김새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라 불만스럽다. 여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미남이 되지 못하고 이전보다 더 못 생겨져버린 것이다. 이전에는 그래도 남자다운 면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순둥순둥한 멍청이가 돼버렸다.


"에휴..."
"왜 자꾸 한숨을 셔? 난  얼굴 엄청 마음에 드는데."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  묘란이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 없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이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너희들 말이야. 사람 냄새니 뭐니는  집어치우고 그냥 못 생긴 사람이 취향인 거 아냐?"
"에이, 무슨 섭한 소리를. 이래 봬도 얼굴은 꽤 따지는 편이라고. 아무리 사람 냄새가 난다지만 솔직히 오빠 얼굴이 나랑 어울릴 급은 아니잖아?"
"......"


이 놈 쉬키가 근데.


"얼굴은 사실 뭐든 상관없어. 그냥 오빠의 분위기가 좋아. 차갑고 염세적이면서도 장난스럽고 다정한데 어딘가 구수한...아, 그 눈빛도 좋아. 깊게 꿰뚫는 듯한 그 눈빛을 보면 흥분돼. 목소리도 우렁우렁하니 자궁을 울리는 느낌이라 좋고."
"...얼굴이 어떻든 상관없으면 좀 잘생겨지게 내버려두지 그랬냐."
"그건 싫어. 절대 안돼. 만약 오빠의 분위기에 드림아웃풍의 잘 생긴 얼굴이 합쳐진다? 으으...역겨워서 토할지도."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로군.


"에휴...됐으니까 일단 숙소부터 잡자."
"오케이~"

여섯 명이  번에 머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방, 모두가 누울 수 있는 커다란 침대, 그리고 맛있는 음식. 이  박자가 전부 갖춰진 곳은 필연적으로 비쌀 수밖에 없었으나 찾기는 쉬웠다.
높은 건물들이 군집을 이룬 곳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저기로 하자. 가장 크고 넓어보이네."

퍼엉-!!

"크아아악!?"

그 군집들 중 독보적으로 높은 건물을 향해 다가가는데, 별안간 입구가 터져나가더니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루루 굴러떨어졌다.

"...엉?"
"이 망할 놈들이! 내가 누군 줄 알아!? 무려 성녀가 인정한 용사란 말이다! 너희들을 구원해줄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런 취급을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싸움인가 싶어 쳐다보는데 도저히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기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레벨이 몇인데 고작 경비병 따위가 무기를 겨눠!?  건물 째로 날려주겠다!"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입구에서 걸어나온 남자는 탄탄한 몸매와 짧은 금발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쾌남형 미남이었는데 허리에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쌍검을 차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성재 씨."


길다란 스태프에 로브를 입은 여자가 당장 쌍검을 뽑으려는 남자를 말렸다. 가슴과 엉덩이의 모양이 예쁘고 풍만한데다 반짝이는 푸른 머리칼과 크고 투명한 눈이 시선을 뺏을 정도로 아름답다. 유저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나저나 성재 씨? 나처럼 현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놈이 다있네.

"닥쳐!"


그러나 그녀의 만류에도 성재라는 녀석은 눈을 부라리며 그녀의 엉덩이를 쎄게 움켜쥐었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고작 종업원 가슴 좀 주물렀다고 사람을 죽이려들잖아!"
"윽...!"

자신의 둔부를 마음껏 주무르는 손길에 여자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이를 악물었으나 저항하진 않았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용사 파티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어요."
"괜히 이빨 털지 마셔 채소라(菜昭羅) 씨. 고작 이런 걸로 박탈당할 거였으면 안 했지. 안 그래?"


남자의 손날이 로브 위로 드러난 엉덩이 골을 파고들어 비비적거리자 채소라라는 여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나저나 또 현실의 이름이 나왔군. 의외로 현실 이름이 흔한 건가?


"...캐롤라인(Caroline)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현실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뭔가 느낌이 쎄한데?

"한길아! 박한길!"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샤미엘이 소곤거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야. 왜 그래?"


그녀는 후드 아래에서도 알  있을만큼 굳은 얼굴로 입술을 짓씹더니 겁먹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거, 이레귤러야."
"...그렇단 말이지."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나 의외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피가 차갑게 식는다.
저게 그 빌어먹을 새끼란 말이지?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만 드림아웃에 접속한다는? 게다가 용사 파티이기도 하시고? 아주 잘 나가시는구만.


"그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리며 녀석을 가리켰다.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이건 기회다. 다신 드림아웃에 접속할 생각조차 못하도록 피똥을 싸지르게 만들어주마.

"자, 잠깐...!"

막 저주를 읊조리려는 나를, 창백해진 샤미엘이 막아섰다.

"왜 그래? 샤미엘."
"저, 저건...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녀석이야. 여긴 그냥 지나가자."
"뭘 그렇게 무서워 해?"
"...잘 들어. 한길아. 저 녀석은 현실의 우리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녀석이야. 드림아웃에 몰래 접속할 수 있다는 건 높은 랭크의 빌어먹을 헌터거나 고위직에 엉덩이 뭉개고 있는 녀석이라는 뜻이라고!"
"난 신경 안 써."
"내가 신경 써! 저기서 주물러지고 있는 여자도 협박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네가 만약 저 녀석을 공격한다면,   파티에서 빠지겠어!"
"......"

엄청 쎄게 나오네.

"에휴..."

뭐, 좋아. 얼굴과 이름은 외워둔 이상 언제 어디서나 저주를  수 있으니 지금은 샤미엘을 봐서 봐주도록 하지.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샤미엘. 시간을 줄테니 충분히 생각해두도록 해. 파티에서 빠질 건지  건지."
"......"

차가운 말에 그녀는 꾸욱,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레귤러는 방금 화냈던 게 의아할만큼 징그러운 얼굴로 시시덕거리며 캐롤라인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크흐흐흐. 우리 채소라  얼굴 봐서 이번만 특별히 참는다. 자자, 채소라 씨. 기분도 잡쳤으니 방으로 가서 다리 벌리고 있으라고. 내 거근으로 마음껏 쑤셔줄테니."
"...읏..!"

숙소로 돌아가는 녀석을 보며 불길 같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후우...일단 지낼 곳부터 찾자."

우리가 숙소로 잡은 곳은 이레귤러의 숙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높고 화려한 호텔이었는데, 딱 봐도 부자들만 머물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낼 돈을 내고 최상층의 드넓은 방을 빌린 우리들은 커다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한 번 들어오니 나가기 귀찮네."
"그러게...밖에 성기사들도 깔려 있고..."
"설마 용사 파티가 있을 줄이야...그럼 놈들이 실버 크로우에서 정보를 샀다는 말이겠지? 돈이 더럽게 많은 모양이네."


묘란이 슬쩍 샤미엘의 눈치를 살핀다.
목소리는 평탄했으나 분위기는 상당히 침체돼 있었다.

"...한길아. 너는 이레귤러가 두렵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샤미엘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기에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봐도 이레귤러를 두려워  이유가 없다.
난 이미 A급 헌터도 죽여본 몸이었으니까.


"전혀."
"어떻게 그럴  있어? 목숨에 미련이 없는 거야?"
"그건..."

진실을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

하지만 곧 울컥 치미는 충동에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시발 모르겠다. 일단 질러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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