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120회
"당신은 저희들의 은인입니다. 부디, 당신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오체투지를 한 추레하고 앙상한 인파의 물결이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부 합치면 족히 천 명은 될 것 같다.
"흐음..."
너무 작위적인 전개 아닌가? 아무리 고리대금의 장부를 찢겨발겼다 해도 그 날 바로 천 명이 넘는 인간들이 나를 따르기 위해 찾아오다니 아무리 그래도 비현실적이다. 이건 거의 확신해도 될 것 같군. 실험은 성공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내 뒤를 봐주고 있던 것이다.
게임 흐름에 간섭해서.
"젠장."
기분이 살짝, 더러워졌다.
내 인생...게임 플레이를 인생과 비유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인생과 다름 없는 내 행보에 누군가가 간섭하고 있었다니.
"......"
그런데 이런 짓이 가능한 '누군가'는, 내가 알기로 단 하나 밖에 없다.
드림아웃의 인공지능 라온.
그게 아니면 기분에 따라 변하는 내 게임 플레이에 즉각적으로 간섭하고 엔피시들을 조종하는 능력을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 토르카 영지에서 월드 퀘스트를 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지.
"......"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대체 언제부터일까? 놈은 언제부터 내게 간섭하기 시작한 거지? 캐릭터 특성을 부여할 때부터? 스킬을 얻었을 때부터? 감정을 내 마음대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됐을 때부터? 대체 왜?
또, 어떤 게 라온의 결과물이고 어떤 게 내 결과물이지?
저주가 레벨에 상관없이 적용되는 것도 라온의 작품인가? 클라라의 신수였던 천호가 갑자기 자살한 건? 바단을 비롯한 이베라 이블의 엔피시들이 내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건? 브레이크 머즐의 수장 라키바인이 이상할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건?
"하아~"
모든 게 의심스러워지자 머리가 복잡해졌기에 그냥 생각을 끊어버렸다.
일단 나를 향한 악의나 적의는 없는 것 같으니...
"그러니까...우리랑 같이 행동하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한 건 엎드린 인파의 가장 앞에 있는 남자였다.
"얼굴 들어봐."
"...?"
그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보였다.
쭈그려앉아서 잠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존나..."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못된 짓 많이 하게 생겼다."
"네, 네...?"
나는 관상을 어느 정도 믿는다. 깊게 아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신뢰하는 것도 아니지만...꼭 관상이 아니더라도 인상에서 느껴지는 선입견 같은 건 존재한다.
아마 누구라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냥 귀가 얇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작고 가는 눈매와 사백안, 욕심이 그득해보일 정도로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얇은 입술, 커다란 뻐드렁니에 서로 짝짝이인 귀까지.
내 앞에 엎드린 이 남자는 누가봐도 악인처럼 생겼다.
그냥 쳐죽여도 무슨무슨 법 때문에 무죄뜨지 않을까 싶을만큼.
하지만 아무리 나쁘게 생겼어도 생김새로 죄인 취급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
그러니까 선별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게는 그 수단이 있다.
"좋아. 너희들을 받아줄게. 단..."
감정을 끌어올려 원념의 파동을 뭉게뭉게 일으켜고 이어서 악성 사슬을 발동시키자 원념과 증오가 들끓는 게 느껴진다.
심중에서 휘몰아치는 그 거대한 감정을 느끼니 저절로 웃음이 그려진다.
"살아남은 놈들로만 말야."
내 손짓에 작은 짐승처럼 날래게 움직인 아이들의 손과 발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짧고 가는 팔이 한두 번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두세 개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이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파고들어 그렇게 날뛰니 순식간에 시체 언덕이 여러 개 쌓였다.
튀어오르는 핏물과 떨어져나가는 살점.
"푸하핫."
많이도 죽는다.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리고 내게 의지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은 분명 이 도시의 약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약자라고 선하지는 않다. 오히려 약자가 약자를 더욱 모질게 핍박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아이들이 날뛰는 것이 그 증거다.
저들 중 면죄부를 가진 이는 오로지 아이들 뿐이다.
버림받고 내쳐지고 업신여겨진 나약하고 가여운 아이들.
본래 정의와 선행과 교양을 배우고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의 내면에 정말과 분노와 증오를 배양한 건 다름 아닌 저들이다.
그러니 죽은 이들은 자신이 키운 짐승의 손에 죽어나가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아, 아...!"
"으아아...!"
천 명이 넘는 인간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그야말로 한 줌이었다.
힘 없이 구걸하던 아이들에게 악행을 일삼지 않고 그 어떤 원한도 사지 않은 이는 그야말로 백 명 안팎의 적은 수 뿐이었다.
나는 시체와 살점을 자근자근 밟아나가 그들 앞에 선 뒤 굽어보며 기쁘게 웃었다.
"축하한다. 너희들에겐 자격이 충분하구나."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들에게 악신의 축복을 걸어주고 악성사슬로 연결했다.
그들은 곧, 두려움과 공포를 잠재우고 분노와 증오를 한껏 내비쳤다.
"크크크...어?"
살아남은 이들 중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작고 가는 눈에 사백안, 욕심이 그득해보일 정도로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얇은 입술, 커다란 뻐드렁니에 서로 짝짝이인 귀까지.
아까 그 남자다.
"......"
역시 관상은 믿을 만한게 아니로군.
***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우며 내 여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잠깐 로그아웃 좀 할게."
"뭐? 무슨 일로?"
"그럴 일이 좀 있어."
"잠..."
뭐라 말하려는 묘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로그아웃한 나는 곧바로 모든 상황을 아리와 송선재에게 말했다.
"어, 음...그러니까...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내 상황을 설명하며 인공지능 라온이 간섭한 것 같다는 의심을 내비치려 했지만, 막상 설명하려니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인공지능 라온은 실체가 없었으며 내게 벌어진 모든 일들은 겉으로 보기엔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과한 면이 없잖아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음...쉽게 믿기 힘든 얘기로군요."
내 말을 들은 송선재 아저씨의 짧은 감상평이었다.
"그건 그래. 말하면서도 내가 뭔 개소리를 하고 있나 싶었으니까. 역시 그냥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신이신 한길 님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런거겠죠."
"......"
너무나 진지하게 나를 신이라 말하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음...혹시, 그 인공지능 라온이 당신에게 그 힘을 준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건 아냐."
송선재의 질문은 과거 마리링과의 대화에서 답이 나온 문제다.
드림아웃은 내게 무언가를 준 게 아니라 본래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파괴했다.
그 결과 나는 내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버렸고 머리에 생긴 마석으로 그것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머리에 생성된 마석 또한 드림아웃의 기능이 아니고 특수하게 제작된 캡슐 자체의 기능이니 드림아웃이 내게 한 것이라곤 감각인지 신경인지 모를 무언가를 파괴한 것 밖에 없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어쩌면 스킬은 드림아웃이 내게 준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저주나 원념의 파동 같은 스킬들이 게임 속에서와 같은 매커니즘으로 현실에서까지 반영된 것이라면...생각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네. 게임 스킬을 현실에서 그대로 쓸 수 있다니...하여간 이건 묘란, 클라라, 샤미엘, 카론, 에필리아 등이 현실에서도 스킬을 쓸 수 있나 보는 것으로 알 수 있겠군. 만약 그녀들이 현실에서도 스킬을 쓸 수 있다면 드림아웃이 내게 준 것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순수하게 나의 각성 능력이라는 말이 되겠지.
"그렇군요. 하긴,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죠."
나는 한 순간 그의 눈망울에 욕망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목격했지만, 피식 웃으며 못본 척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음, 하여간 그것에 관해선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응. 그래. 부탁해."
"네. 맡겨만 주십시오."
"아, 그런데 마리링이나 다른 실험체는 어떻게 됐어?"
"지금은 한국에 있는 비밀 지부에서 쉬고 있는 중입니다. 몸 상태는 지극히 건강하며 자신의 힘을 컨트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라 하더군요."
"흐음, 그래?"
"네. 그래서 캡슐까지 준비해둔 상태입니다. 어쩌면 이미 로그인 했을 수도 있겠군요."
"응? 로그인? 드림아웃에 접속한다는 거야? 왜?"
"마리링의 말에 따르면 드림아웃을 플레이하는 게 핵심이라더군요. 몸 속에 있는 마석을 자극할 수 있는 수단으로 그것만한 게 없다고 합니다. 뇌가 엄청나게 활성화되니까요."
"그렇군..."
잠시 생각하던 나는 감정을 끌어올려 전신을 검은 안개로 휘감았다.
"잠시 갔다 올게. 마리링에게 선물을 주고 싶거든."
"네. 무사히 갔다오시길."
그는 갑작스런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내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
한국에 있는 교단의 비밀 지부는 의외로 멀쩡한 상가 건물이었다.
건물 전체가 통째로 교단 활동을 위해 리모델링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내가 공간이동한 곳은 널찍한 방이었는데, 수많은 캡슐들이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길 님! 이미 연락을 받은 상태이니 모든 걸 자유롭게 이용하십시오! 혹시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응? 아, 아니...됐어. 마리링을 보러 온 거니까."
벌써 연락을 했다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앗!? 한길아!"
나란히 놓인 캡슐 중 하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몸을 일으켠 마리링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캡슐에 몸을 누이고 있어서 안 보였던 거구나.
"오. 마리링...이 아니라 한다연. 몸은 어때?"
"괜찮아!"
"그래...?"
인간 같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도 괜찮다고하니 할 말이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응? 아아...네게 선물을 주려고 왔지."
"선물?"
"응. 너 지금의 몸이 마음에 들어?"
"...아하하. 뭐야, 그 짓궂은 질문은? 맞을래?"
"응? 아, 미안. 조금 무신경했네. 하지만 진지하게 질문하는 거야. 어때?"
"...이미 이렇게 변해버렸는 걸. 적응해야지. 최대한."
"그래? 그럼 말야. 드림아웃의 캐릭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면 어떡할래?"
"뭐?"
"드림아웃에서의 네 모습 말야. 그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고. 나는."
"...정말? 진짜로?"
"그래. 정말이야. 묘란과 클라라, 샤미엘도 그렇게 하는 중이고. 뭐, 대신 6개월 정도는 로그아웃하지 못하겠지만-"
"한길아! 사랑해!"
"우왓!?"
붉게 타오르는 건틀렛을 착용한 것 같은 두 팔이 화악, 열기를 뻗치며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원념의 파동을 일으켜 막았다.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화끈한 열기가 느껴지니 식은땀이 흐른다.
아니, 근데 뭐야 이거! 힘도 더럽게 쎄네! 저번에 연구소에서 만난 S급 근육 덩치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쎈데!?
"날 죽일 셈이냐!? 팔 치워!"
"아! 미안. 흥분하는 바람에. 에헤헤..."
"후우...어쨌든, 누워서 로그인 해. 그래야 내가 힘을 쓸 수 있으니까."
"알았어!"
빠르게 열기를 식히고 냉큼 캡슐 안에 드러눕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소 6개월 이상은 로그아웃하지 못할 거야."
"괜찮아! 그 정도야 뭐!"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이형의 모습이었음에도 보기 좋았다.
이윽고 캡슐의 문이 닫히고 커다란 몸 때문에 불편하게 손을 흔들던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로그인 된 거야?"
"네. 접속했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이 캡슐에 내 힘을 주입할 건데, 부산물이 조금 많이 생길거거든? 청소를 주기적으로 해줘야 해."
"맡겨만 두십시오."
"그래. 믿을게."
원념의 파동을 전력으로 일으켜 원념의 창조물을 쓸 때와 같은 요령으로 마리링의 캡슐에 주입했다.
"음..."
주입은 매우 순조로웠다.
게임 속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힘을 가하니 그녀의 몸 속에 있는 마석이 내 힘을 순조롭게 빨아들인다.
카론과 에필리아의 육체를 만들 때처럼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진 않을까 집중해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후우..."
우드득, 빠드득...!
변화를 시작하는 마리링의 몸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원념합일을 발동하고 드림아웃에 로그인했다.
***
"으음..."
눈을 뜨니 익숙한 숙소의 천장과 함께 내 여자들의 얼굴이 나를 반겼다.
당연하다는 듯이 전부 나체다.
"잘 갔다 왔어?"
"응...오늘은 보빔 안 하네?"
"그건 잊어! 쯧...그런데 대체 뭐 때문에 갑자기 로그아웃 했던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신경쓰이던 게 있어서..."
"비밀이라는 건가요?"
클라라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심술궂게 웃었다.
"응. 비밀."
"...얄미워요."
눈을 흘긴 클라라가 내 젖꼭지를 살짝 꼬집는다.
나도 답례로 그녀의 젖꼭지를 꼬집어주었다.
"으응..."
내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한 그녀의 유두는 즉시 빳빳하게 부풀어올랐다.
"이 요망한 년."
"으읍."
그녀의 입술을 잡아먹으며 등허리를 쓸자 부드러운 피부가 따끈따끈하게 달궈진다.
"으응..으흐으읍...!"
손길이 등허리와 엉덩이를 쓸어올릴 때마다 유연하게 허리를 젖히고 좌우로 골반을 흔드는 그녀의 몸짓에 나는 더할 수 없을만큼 팽팽하게 발기했다.
그대로 그녀에게 꽂아넣으려는 찰나.
"한길아. 락커가 잠시 보자는데? 제발 한 번만 대화해달래."
"......"
"한길아?"
아오, 씨발 타이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