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화
저녁에 유부 초밥을 만들어 먹은 다음 날 아침. 아니 그 보다 약간 늦은 시각. 오후의 폰에 톡이 왔다.
깨톡.
오후는 그제야 꾸물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뭐...”
설희로부터 온 톡이었다.
- 일어나셨어요?
오후는 바로 답톡을 보냈다.
- 어... 방금...
- 앗, 괜히 저 때문에 깨신 거예요? 죄송해요...
- 아니, 괜찮아. 어차피 오늘 점심 때 너 만나러 나가야 하잖아.
그 말에 폰 화면을 바라보는 설희의 표정이 급 어두워졌다.
‘...’
하지만 답톡은 그런 기분을 티내지 않고 보냈다.
- 근데 오늘 어디서...
- 음... 학교 앞에서 볼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이는, 그리고 가장 캠퍼스가 넓은 S대를 구경해 보고픈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설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후가 자기 학교 앞에 오는 거 자체가 불안했다.
‘...’
오후는 설희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폰 주변을 엿볼 수 있는 뷰재킹 능력으로 다 보고 있었다.
- 왜? 싫어?
설희는 화들짝 놀랐다.
‘엣?’
그러곤 얼른 답톡을 보내 안 그런 척을 했다.
- 아뇨. 좋아요. 그럼 몇 시에...
- 수업 몇 시에 끝나는데?
- 12시 전에 끝나요
- 그럼 12시쯤에 학교 앞에서 봐.
- 네... 그럼 그때 뵐게요. 저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요.
- 그래.
설희는 버스가 막 학교에 도착한 참이라 서둘러 내렸다. 버스는 설희를 길에 내려놓고 바로 다음 정거장을 향해 떠났다. 설희의 얼굴 위로 아침 햇살이 내리 쬐었다. 하지만 설희의 얼굴엔 잔뜩 그늘이 져 있었다.
‘...’
그때 친구들이 설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설희야!”
“응? 아...”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가자, 수업 늦겠다.”
“응, 가자.”
친구들은 저들끼리 수다를 떨며 하하호호 웃으며 강의실로 향했다. 하지만 설희는 간간히 웃는 척만 하며 애들한테 겨우 분위기를 맞추기만 할 뿐이었다.
“...”
한편 오후는 그제야 난희가 옆에 없단 걸 깨달았다. 집도 조용했다.
“응?”
그러다 뒤늦게 어제 저녁을 먹다가 난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 오늘부터 오전 출근이라 그랬지?”
병동 간호사들은 일정한 주기로 출근 시간이 오전, 오후, 저녁으로 변동되기 때문이었다. 오후는 찌뿌듯한 몸을 기지개를 켜며 일으켰다.
“으으~, 그럼 슬슬 나갈 준비를 해볼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먹으러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식탁에 웬 메모가 있었다.
‘응?’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밥 전기밥솥에 있으니까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서 먹어. 어묵국도 끓여놨으니 데워 먹고. 이걸로 3일 동안은 밥 없는 거다?
어제 3일에 한번은 집밥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던 걸 말하는 것이었다. 오후는 피식 웃었다.
“바보. 어제 저녁 만들어 준 걸로 된 거였는데. 훗.”
헌데 과연 난희가 그걸 몰랐었던 걸까? 또 아침부터 귀찮게 일찍 일어나 밥할 필요 없이, 오늘은 오후 늦게 퇴근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게 더 편한 일이었을 텐데...
아무튼 오후는 난희가 아침 일찍 일어나 고생한 노력을 봐서 아침을 먹어주기(?)로 했다.
냉장고에는 어제 산 오징어 젓갈이며 각종 반찬들이 작은 반찬통들에 먹기 좋게 깔끔하게 덜어져 정리돼 있었다.
“훗, 언제 이걸 다 정리했대?”
그리하여 마침내 밥과 어묵국, 그리고 반찬들을 식탁에 차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우선 어묵국부터 맛을 봤다. 다른 반찬들은 다 사온 것들을 반찬통에 덜어놓은 것일 뿐이었지만 어묵국은 밥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난희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이 아침밥이 ‘집밥’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다 이 어묵국 덕분이었다. 더불어 난희의 요리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고.
“음... 쩝쩝... 하아~, 좋다.”
아침부터 소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물론 요즘 어묵국이야 어묵에 딸려 나오는 간장 소스 등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돼서 요리라 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20년 가까운 세월을 혼자 궁색하게 산 오후의 설움을 녹여주기엔 충분한 맛이었다. 오후는 바로 아침 식탁을 배경 삼아 인증샷을 찍은 뒤 난희한테 톡을 보냈다.
“아침밥 고마워. 어묵국 끝내주게 맛있어.”
병원 책상에서 차트를 정리하다 오후한테 온 톡을 확인한 난희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흥.”
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 대신 설거지는 니가 해. 집에 들어갔을 때 설거지 안 돼 있으면 혼날 줄 알아.
오후는 피식 웃었다.
- 싫은데?
난희는 발끈했다.
- 뭐?
- 집밥은 3일에 한 번씩, 대신 설거지와 빨래는 매일 니가 전담이야.
- 이게 보지보지하니까...
‘보자보자하니까’로 보내려 했던 걸 오타낸 것이었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 다시 고쳐서 보내려 했는데... 오후가 그걸 놓치지 않고 바로 답톡을 보냈다.
- 보지에 넣어달라고?
한발 늦은 난희는 발끈해 막 열을 냈다.
‘이게!’
폰 주변을 엿볼 수 있는 뷰재킹 능력으로 그런 난희의 표정을 다 보고 있던 오후는 낄낄 웃음이 났다.
“큭큭, 아주 약이 바짝 오르셨구만?”
그러곤 바로 또 톡을 보냈다.
- 억울하면 내 첩 말고 아내를 해. 그럼 설거지며 빨래 따윈 대신 첩이 된 설희가 하게 해줄게
톡을 읽은 난희는 멈칫했다.
‘엣?’
선뜻 뭐라 답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엣?!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딱 잘라서 ‘싫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당황한 것이었다. 난희의 심리 상태에 변화가 일었다.
- 복종심: 139(-)
- 분노: 8 (↓3)
그걸 본 오후는 좀, 아니 많이 얼떨떨했다.
‘응? 어째서...’
만약 복종심이 오르거나 떨어졌다면 자신의 제안에 난희가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거나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종심은 변동 없이 분노만 약간 떨어졌다.
‘이게 무슨 뜻이지? 싫다는 거야, 아님 좋다는 거야? 흐음... 아, 설마 고민에 빠졌단 뜻인가?’
그때 난희로부터 톡이 왔다.
- 나 지금 일 생겼어.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그렇지만 뷰재킹 능력으로 엿본 난희는 이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아까 하던 차트 정리조차 멈춘 채 책상에 멍하니 앉아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후가 보낸 톡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
오후는 그제야 난희가 자신의 제안으로 인해 고민에 빠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역시...”
오후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훗.’
그런데...
‘아, 그럼 설희는... 정말 난희가 더 좋아진 건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난희는 설희를 얻기 위해 도중에 이용하는 노리개이자 첩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제 호텔에서 하루 지내면서, 또 이렇게 아침밥까지 받아 먹고 나니 저도 모르게 난희가 진심으로 좋아지게 된 것 같았다.
“흐음...”
멍하니 밥을 입안에 떠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었다.
‘...’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어묵국을 떠먹는 것도, 반찬을 먹는 것도 깜빡 잊혀졌다.
밥이 점점 달아졌다. 그러다 결국엔 밥알이 흐물흐물해지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목구멍 속으로 다 꿀꺽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아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씻은 뒤 집을 나섰다. 마치 학교에 가는 대학생처럼 어깨엔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을 책이 아닌, 설희에게 오후의 여자가 되기 위한 여러 가르침을 줄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10시밖에 돼 있질 않았다. 약속 시간까진 꽤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설희를 만나러 가기 전 자기가 살던 고시원으로 가서 방을 뺐다.
짐은 아주 개인적인 것 몇 개만 빼고 나머지는 고시원 주인에게 20만원을 쥐어주며 알아서 처분해 달라 부탁했다. 주인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이냐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오후는 별다른 말 없이 그냥 씩 웃고 나왔다.
그렇게 고시원방을 처분하고 나오니 비로소 완전히 암울했던 과거와 이별을 한 기분이었다.
“훗, 그럼 가볼까? S대로.”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닌데, 남이 다니는 학교에 사람 만나러 가는 것일 뿐인데도 마치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처럼 마음이 설렜다.
‘아, 그러고 보니 대학교라는 곳 처음 가보는구나... 훗.’
그러면서 왠지 감회가 새로워지는 오후였다.
====== ≪현재 여자들 심리 상태≫ ======
- 배설희
- 복종심: 98
- 분노: 13
- 오난희
- 복종심: 139
- 분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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