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037화 호르마키 시 (04)
실수였다. 도망치듯이 여관방을 나오고 나서 맨 처음 든 생각이었다. 급하게 대충 옷만 걸치고 나오느라 브래지어를 못 찼더니 유두가 자꾸만 옷에 쓸렸다. 여관 홀 안의 사람들이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얼굴을 붉힌 채 보지 말라고 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겠지. 나는 내 가슴을 두 팔로 누른 채 여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느낀 건, 젠장, 팔뚝으로 가슴을 눌러 봤자 유두 쓸리는 걸 막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됐다는 거다. 오히려 반대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가슴은 출렁였고, 팔에 닿은 젖꼭지는 셔츠 자락에 비벼졌다.
유두 속에서 자꾸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원하게 해결해 버리고 싶었지만, 해가 저물어 가는 도시에는 아직도 행인이 많았다. 길가에서 자기 가슴을 만지는 여자라니, 그거 완전 변태 년이잖아.
가슴의 감촉 때문에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걷고 있으니 주위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남자들, 남자애들이 자기들끼리 속닥대는 소리가 내 귀에 곧바로 꽂혔다.
“야, 아까 그 여자애 봤냐?”
“노브라던데? 오우…….”
나는 뒤를 돌아봤다. 방금 그렇게 말한 놈은 자기 가슴 앞 허공에다가 손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그 손짓이 무슨 의미인지는 뻔했다.
그 놈 뿐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남자들 뿐이 아니었다. 여자들도 나를 보고 수근덕거렸다. 쟤는 뭔데 속옷도 안 입어? 변태같애, 남자들한테 보여주려고 그러나? 같은 따위의 말들이었다. 그중 한 여자는 내게 다가와서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젊은 아가씨, 지금이야 모양에 자신이 있어도, 나이 먹으면 쳐질지도 몰라. 남정네들 눈길 끌려는 것도 보기 안 좋고. 웬만하면 속옷은 입는 게 좋아.”
내 표정이 어떤지는 말 안해도 뻔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게 참견하는 아줌마를 위로 치켜보며 말했다.
“남의 일에 신경 끄고, 니 갈 길이나 가, 미친 년아.”
“뭐?”
내가 쏘아붙이자 아줌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중년 여자를 가볍게, 하지만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힘으로 밀쳤다. 중년 여자는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옆으로 돌아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뭐 저런 년이 다 있어? 야! 쪼그만 게 어른한테……!”
그녀의 주변으로 젊은 여자들이 달라붙었다. 참으세요, 버릇없는 년 일일이 신경 쓰지 마세요, 칼 찬 거 보세요, 모험가일지도 몰라요 같은 말을 하면서.
“너 당장 이리 와! 내가 너 오늘 버르장머리를 똑똑히 고쳐 놓을 테니까! 안 와?”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중년 여자의 목소리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그러고 나니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속옷도 안 입고 다니는 변태 년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아무 데나 시비를 걸고 다니는 미친 년을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건 뭐,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남자한테 야한 시선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기분나쁜지는 도시 밖에서부터 겪어 왔으니까. 차라리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 게 더 낫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남자의 성욕의 대상이 된다는 건.
그래서 나는 일부러 거칠게 행동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턱을 치켜들고, 주위를 위협하는 눈빛으로 걸었다. 가끔 시선이 마주치는 남자가 있으면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잡으며 노려봐 줬다. 그건 효과가 있었고, 곧 거리의 남자들은 내게서 욕정에 찬 눈빛을 하나둘씩 거둬 갔다.
하지만 피곤한 일이었다. 이졸드의 성욕을 피해 거리로 나왔는데, 거리에서도 남자들의 성욕을 피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니.
그것 말고도 문제가 있었다. 내 셔츠 위로 볼록 튀어나온 채 존재감을 과시하는 유두, 그 유두가 시간이 지날수록 민감해져만 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내 얼굴이 빨개지고 있는 건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가게도 슬슬 장사를 접고 있었고, 행인들도 줄어들고 있었다. 들킬 위험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정말 문제는 욕정 수치였다.
고개를 치켜들고 가슴이 흔들리는 대로, 젖꼭지가 옷에 스치는 대로 놔뒀더니 욕정 수치는 정말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나는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썅…….”
내 목소리는 이미 야해질 대로 야해져 있었다. 가냘프고 깊게 울리는, 내가 들어도 확 따먹고 싶어지는 그런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내 욕정이 전보다 더 빠르게 치솟았다.
젠장, 망할, 빌어먹을. 나는 일단 그 자리에 서서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
“아흣,”
……숨을 들이마시다가 유두가 옷에 스쳐 버렸다. 아랫도리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아마 새어나왔을 것이다. 팬티 속이 끈적끈적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밖에 있는 건 위험했다. 돌아가는 게 더 나았다. 길거리에서 발정이라도 나 버렸다간…….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인적이 많이 드물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지나다니는 사람은 있었다.
이대로 발정(1)이 나 버렸다간,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덮쳐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 해선 안 될 일이다. 도시 안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간 귀찮아진다거나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나는 남자다. 남자를 덮친다거나 하는 일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남자를 덮치고, 자지에 박히면서 앙앙대다가, 가버리면서 질내사정이라도 당했다간 알을 또 낳아야 한다. 보지가 확 넓어지면서 안에 든 딱딱하고 동그란 걸 퐁 하고-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또!
“이런 빌어먹을-!”
나는 온 호르마키가 떠나가라고 욕설을 내질렀다. 그나마 남아 있던 행인들도 내가 험악하게 소리를 지르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주위가 정리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더 이상 욕정을 얻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 스킬을 발동시켰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머릿속이 조금씩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명상의 직접적인 효과는 아닌 것 같긴 했지만,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고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그래도 욕정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정리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모두가 내게서 멀어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어둑어둑한,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는 저녁의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레이디 크누트?”
나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금발에 잘 생긴, 비단으로 된 옷을 입은 스무 살 남짓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레자르의 세크톤.”
내 얼굴은 굳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세크톤은 날 만난 게 마냥 즐겁기만 한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놈이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이런 데서 만나다니, 운명이군요.”
운명은 무슨. 이 시간동안 싸돌아다니느라 피곤한 게 눈에 훤히 보이는구만.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정신머리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아마 그게 실수였던 것 같다.
세크톤은 활짝 웃었다. 제길. 그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예전의 내 모습,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의 내 얼굴이 생각나서 열등감이 풀풀 솟아올랐다.
세크톤은 잘생겼다. 무슨 모델이나 배우처럼 잘생긴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 평균 이상은 충분히 되는 외모였다. 섬세하고 잘생긴 얼굴, 저 얼굴을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같은 꼴을 당하고 있진 않을 텐데.
제길. 분명히 어느 영지의 후계자라고 했겠다. 저 외모에 지주라는 배경까지 있으면 여자랑도 많이 해 봤겠지. 괜히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나는 퉁명스럽게 놈에게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웬 일로 밖을 이렇게 돌아다녀?”
“숙소를 잡고 보니 식사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길래, 산책할 겸 시간을 좀 때우고 있었습니다.”
세크톤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내 입에서도 실소가 터져나왔다. 웃기고 있네. 보아하니 날 찾겠답시고 호르마키 시 안을 온통 뒤지고 돌아다닌 게 틀림없었다. 그런 상황에도 싹 씻고 새 옷을 빼입은 꼴이 우스웠다.
누가 너한테 넘어가 주긴 한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말했다.
“괜히 산책을 방해했네.”
세크톤은 내 말에 손을 내저었다.
“아뇨, 방해라뇨. 그럴 리가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즐거운 밤 산책, 마저 하길 바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세크톤에게서 돌아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크톤에게는 나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놈은 내 손목을 휙 나꿔챘다.
“…….”
나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세크톤을 노려봤다. 놈은 당황하는 표정으로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가, 갑자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크누트.”
“그래. 알면 됐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세크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세크톤이 다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녀석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목소리도 뒤집혀 있었다. 녀석이 뒤집힌 목소리로 말했다.
“호,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시지 않으시, 않으시겠습니까? 레이디 크누트.”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확실히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그 꼴이 우스워서 나는 한 번 피식 웃었다. 안 됐지만 꼬마야, 나는 니 그런 수작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란다. 나는 녀석의 손을 떼 놓으며 정중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벌써 식사를 해 놔서.”
그 순간 내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양이 좀 부족하셨나 보군요.”
젠장.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세크톤에게 대답했다
“그래. 안 먹었다. 그냥 너랑 밥 같이 먹기 싫어서 그랬고. 됐냐?”
젠장. 뱃속에서 난 소리 한 번에 전세는 완전히 역전돼 버렸다. 내 말에 세크톤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낮의 결투에서 하신 약속을 신경쓰시는 건지요?”
낮의 결투? 의아한 표정을 띄우고 나는 세크톤을 쳐다봤다. 세크톤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손가락으로 자기 뺨을 두 번 두들겼다.
“아, 그거.”
진절머리가 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이졸드가 멋대로 한 약속이야. 내가 한 약속도 아니고, 내가 그 약속을 지켜야 될 이유라도 있어?”
세크톤이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 그러니…….”
내 말을 세크톤이 끊었다.
“아뇨, 아뇨. 레이디 크누트. 당신의 키스를 받아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낮에 들은 약속이 당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더더욱요. 정말로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마음 뿐이라는 걸 알아 주시면 좋겠군요.”
내 배에서 다시 한 번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식사 얘기를 자꾸 해 대니 점점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이런 소리가 나는 거야?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부끄러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세크톤은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크누트. 당신 나이대라면 많이 먹는 것도 당연하지요.”
‘당신 나이대?’ 내가 대체 몇 살로 보이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궁금해서 물으니 세크톤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열 여섯 정도쯤 되지 않으셨습니까?”
“…….”
내가 그 정도 나이로 보인다 이거지. 하긴, 이 키에, 이 얼굴로 성인처럼 보일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맞긴 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거보단 더 먹긴 했지만.” 그것도 한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말했다. “너는 그 나이 상대한테 반말 듣고서도 아무렇지도 않냐?”
“당신 같은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듣는다면 얼마든지.”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아름다운 레이디라니.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해 대는구나, 이 녀석은. 세크톤은 내 표정이 일그러진 이유를 멋대로 짐작하고는 멋대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레이디 크누트. 당신은 정말로 아름다워요.”
“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정말로.
“나한텐 안 통해.”
정말이다. 사나이 이재황이 남자 놈한테 얼굴 예쁘다고 칭찬을 들어서 어디다 쓰겠나 말이다.
“그런 칭찬보다는, 내 마음에 들고 싶으면, 좋은 음식이나 많이 대접하는 게 좋을 걸? 난 보기보다 양이 많다고.”
내 말에 세크톤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레이디께서는 정말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시는군요.” 란다. 젠장. 이게 비웃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분도 살짝 더러운데, 정말 먹는 걸로 풀어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