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050화 호르마키 시, 이틀째 (04)
어째서인지 실패만 잔뜩 했다. 심지어는 바지를 사는 일마저도.
옷가게 사장 년이 가져온 바지들은, 치마보다도 별 나을 게 없는 옷들이었다. 너무 짧거나, 너무 짝 달라붙거나, 너무 화려하거나. 그러니까, 너무 여성스러운 바지들 뿐이었다.
좀 더 통이 넓은, 한마디로 말해 아저씨 핏이 나는 옷은 없냐고 물었더니 하는 대답이란 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 가게에는 손님의 체형에 맞는 바지는 이런 정도가 전부라……. 원하신다면 한 벌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만, 어떠신지요?”
……이랬다.
그래서 맞춤옷은 얼마나 걸리겠냐고물어 봤더니 이틀은 걸린단다.
별 수 있나. 그냥 있는 거 입어야지. 그래서 내가 택한 바지는 결국은 그나마 제일 수수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왼쪽 허벅지에 장미 무늬가 새겨진, 몸매가 다 드러나는……. 당연하지만 여성용 바지였다.
젠장. 이걸 당연하다고 말하는 내가 싫다.
그래도 겨우 치마를 벗어났다는 데 대한 만족감은 있었다. 이게 진짜 얼마만에 입는 바지냐. 장장…….. 1주일 만이구나. 아니, 더 됐나?
아무튼 간에, 치마에서 탈출한 덕에 가뿐해진 발걸음으로 여관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찻집에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자고 요구하는 세크톤 놈을 떼어놓고 오니 더 가뿐했다. 그리고 그 가뿐한 마음은 돌아오자마자 깨질 수 밖에 없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이졸드는 내가 돌아오자 마자 불같이 화내며 따져물었다.
“응? 옷 사러 갔다 왔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손에 든 옷봉투를 이졸드에게 내밀었다. 어젯밤에 찢어 먹은 속옷도 제대로 채워 넣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이졸드는 내 말에 더 화난 것 같았다. 녀석은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또 세크톤 그 새끼랑 같이 갔던 거야?”
“응. 옷 사러 간다니까 사주겠다면서 따라오더라고.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저씨 목.”
내 목?
“아저씨가 자기 돈으로 그런 물건을 살 리가 없잖아.”
아, 세크톤이 사 준 목걸이. 나는 목덜미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재질로 된, 장미 장식과 레이스 장식이 들어간……. 개줄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목걸이를 풀었다. 내 얼굴에 싫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이졸드에게는 대답을 회피하려는 태도로 보인 모양이다. 이졸드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치고 말했다.
“하. 진짜였어? 아저씨 게이야?”
“뭐? 그게 무슨……..”
“세크톤 그 새끼랑 같이 다니면 막 보지가 벌렁벌렁 하냐? 대주고 싶어?”
“아니,이게 갑자기 왜 이래?”
갑작스럽게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이런 폭언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한 대 후려패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때린다고 녀석이 곱게 맞아 줄 녀석도 아니고. 나는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게이가 왜 나오는데?”
“그럼 아니야? 남자 따라 나가서 목걸이에 옷에 속옷에……. 그런 것들 선물받고서. 아저씨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아, 귀찮아. 받으면 받은 거고 돈 굳었으니 된 거지 뭘 또 선물이 무슨 의민지 그런 데 신경을 써야 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돈 아낀 거지, 거기 무슨 의미가 있냐?”
하지만 내 해명은 이졸드에겐 부족한 것 같았다.
“……. 좋아. 아무 의미 없다고?”
“아무 의미 없다니깐.”
“그럼 나도 아저씨한테 속옷 선물할래.”
이건 또 무슨……..
“상관 없지? 그냥 속옷 선물하는 거니까.”
“아니, 야. 너…….”
너한테 속옷 받는 건 상관 없는데, 이상한 변태같은 속옷이나 주려고 그러는 거 아냐. 나는 그런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아니, 하려다가 끊겼다. 이졸드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럼 가자. 아저씨.”
이졸드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 팔짱을 꼈다. 이졸드의 볼륨감 넘치는 가슴이 내 팔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흥분됐지만……. 바지 너머로 녀석의 단단하게 발기한 자지의 느낌이 전해지자 마자 순식간에 그 흥분은 사그라들었다.
“야, 너 그거…….. 좀 수그리면 안 돼?”
나는 녀석에게서 엉덩이를 엉거주춤하게 빼며 말했다. 이졸드는 내가 몸을 빼려고 하자 더 가까이 달라붙어서 말했다.
“조용히 해. 아저씨 지금 나한테 혼나는 거야.”
아니, 내가 뭘 했다고 혼나야 돼? 억울한 감정을 한껏 얼굴에 드러냈지만 녀석은 신경쓰지 않았다. 다짜고짜로 내 팔을 잡아끌며 나를 방 밖으로 끌고가려고 했다. 거 참.
“야, 너 지금 발기해 버리면 주변에 다 보일 텐데 그건 괜찮고?”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녀석은 멈췄다. 휴. 이제 뭔가 대화가 좀 통하려나?하고 생각하고 녀석의 팔짱낀 팔을 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졸드가 나보다 빨랐다.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켈리!”
“네, 주인님.”
켈레이드는 짧은 주문을 외웠고, 나는 그게 이졸드의 고간에 건 인식 방해 주문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 이러면 됐지? 가자.”
그러면서 녀석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저씨가 신경만 안 쓰면 이 마법 안 풀릴 거야.”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그러니까, 흥분해서라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내 바로 옆에 자지를 바싹 가져다 대고선 비비고 있는데, 그걸 신경을 쓰지 말라니.
농담이지? 하는 표정으로 이졸드를 올려다 보니, 그녀는 진담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젠장. 이 녀석 대체 왜 이래? 도저히제정신 박힌 사람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내가 난감하다는 건 전혀 아랑곳 않고, 이졸드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이졸드에게 여관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켈레이드 녀석의 한숨 섞인 외침을 들었다.
“도서관 예약에 늦지 않게 주의하세요.”
그러고 보니 도서관이 호르마키 시에 온 목적이었지. 나는 잔뜩 흥분해 있는 이졸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저기, 팔짱은 풀고 가는 게 어떨까?”
내 말에 이졸드는 고개를 숙이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내 자지 다 들키라고?”
이졸드는 내게 바싹 붙은 채, 나를 따라오는 척 하면서 나를 앞세워 움직이고 있었다. 하아. 한숨 쉬는 것도 버릇 되겠네, 진짜.
돌겠다. 여관을 나서고 거의 직후, 아마 열 걸음도 못 갔을 때였다. 이졸드는 내게 가슴과 자지를 들이대고 그걸 자꾸 내 몸에 문질러 대고 있었고, 나는 최대한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졸드의 발기한 자지의 감촉은 도저히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졸드의 자지가 내 엉덩이에 닿았을 때, 내 신경은 온통 거기로 쏠렸다. 정확히는, 내 엉덩이에 닿은 자지에 쏠렸다.
지나친 관심이 집중되는 것과 동시에, 쨍그랑 하고 주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졸드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이 내게 더 찰싹 달라붙었고.
“마법 풀렸잖아. 변태.”
“그게 내 탓이야?”
“신경 안 썼으면 안 깨졌을 텐데.”
이졸드가 이죽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녀석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다시 주문 걸러 돌아갈래?”
이졸드는 내 말에 내 팔에 낀 팔짱을 더 단단하게 조이며 말했다.
“아저씨한테 주는 벌이라고 그랬지?”
“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무슨 벌…….
“앗!”
인식 방해 마법이 깨지니 이졸드의 자지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졸드가 더 가까이 달라붙었기 때문이겠지. 내 몸으로 자기 발기한 자지를 숨기려고.
이졸드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대로, 아저씨 아까 갔던 옷가게로.”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불어넣어져서 순간적으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젠장. 야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들었다. 나는 브라 안에서 유두가 서는 걸 느꼈다. ……아래에도 찌르르한 신호가 왔다. 젖지는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인가.
나는 이졸드의 발기한 자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쓰며, 그리고 욕정 수치가 더 늘어나지 않도록 애쓰며 천천히 이졸드를 ‘제비꽃’ 옷집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졸드는 그걸 도저히 도와주질 않았다.
“아저씨, 저거 어때?”
“아저씨, 이 반지 예쁘다.”
“아저씨, 이 머리띠 한 번 해 봐. 잘 어울릴 것 같아.”
노점에 늘어선 장신구들을 볼때마다 이졸드는 한 마디씩 했다. 기필코 세크톤보다 많은 걸 해줘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말들이었지만, 나는 이졸드의 가슴과 자지의 위 아래 동시공격을 견뎌내는 데에도 벅찼다.
“세크톤 그 새끼가 사 준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아?”
이졸드가 이런 말을 했을 때는, 내 인내심이거의 한계에 달해 있을 때였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졸드에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왜 그렇게 말끝마다 세크톤, 세크톤 해 대는 거야? 너 혹시 질투하냐?”
내가 그렇게 말하니 이졸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설마……?
“미쳤냐? 내가 그딴 아저씨를 왜 질투해?”
“너 나보고도 아저씨라고 부르잖아.”
“그건 그거고!”
이졸드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로 보나 내가 훨씬 더 예쁘고 세고 돈도 많고 능력도 좋은데, 내가 그딴 새끼를 왜 질투해?”
아이고야. 진짜 질투하나 보네. 녀석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는 걸 보니 확실하다. 나는 손사래를 치고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알긴 뭘 알아? 내가 진짜 그 새끼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아니긴 무슨. 따라와.”
이졸드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목을 잡아끌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엥? 뭐 하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대로이졸드에게 끌려갔다.
아니,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왔던 길이 아닌 쪽으로 꺾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려는 순간, 녀석은 나를 어두운 골목길 구석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안 좋은 예감은 최근 1주일간 너무 잘 들어맞고 있다.
##주인님이 노예를 발정시키기 시작합니다!
##상태이상 <발정(2)>을 획득!
“이, 이 개년아……!”
나는 낮게 소리질렀다. 내 뱃속이 자꾸만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가슴을 감싸쥐고 이졸드의 앞에 거의 주저앉았다. 몸 속이 너무 뜨거웠다. 겨우 고개를 들어 보면, 이졸드는 나를 내려다보며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언제든지 이렇게 따먹을 수 있는데, 내가 그 새끼를 왜 질투해?”
……그래. 대단하다, 썅년아.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것이었다.
“아흐으응……..”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입을 가렸다. 젠장. 이졸드는 그런 내 모습이 뭐가 우스운지 실실 웃어대고만 있었다.
“이거…… 당장 풀어…….”
“풀어? 뭘?”
녀석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발정 상태이상?”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 몸을 만지고 싶었다. 가슴이 저려오고, 보지가 욱씬거렸다. 아니, 반대인가? 아무튼, 얼른 편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붙어 있는 정신줄이 여기는 길거리라고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장난해? 여기서 발정을 풀자고?”
이졸드는 그렇게 말하고 깔깔대며 웃었다. 녀석은 웃으면서 내 손목을 붙잡고 나를 끌고 걸었다. 나는 휘청이면서 녀석을 따라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녀석에게 안기고 말았다. 녀석이 내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렇게 당장 풀고 싶으면, 지금 풀어 볼래?”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여야 될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실낱같은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에 이졸드는 내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이 정도까지 왔는데 모르면 말이 안 된다. 틀림없었다. 녀석은 날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이대로 날 끌고 거리를 돌아다닐 셈인 게 분명했다. 내가 발정을 참으려고 애쓰는 걸 보며 즐기겠지. 치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