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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054화 호르마키 시, 이틀째 (08) (54/99)



〈 54화 〉054화 호르마키 시, 이틀째 (08)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진짜. ……아니, 엄밀히는 여자애는 아니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니 이졸드는 어깨를 팍 움츠리고 고개를 떨궜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별 거 없었다. 나는 옷을 마저 챙겨입었고, 우리는 어색하게 옷가게로 향했다. 생각보다 얌전한…… 아니, 풀 죽은? 이졸드의 반응 덕에, 나는 그리 야하지 않은 여성복을 몇 벌 샀다.

몇 벌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긴 했지만 여기 옷들은 비쌌다. 모두 합해서 4골드, 은화 80개 돈이었다. 아무리 미개사회라지만 옷이 너무 비싼 거 아니야?


야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졸드가 사준 옷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혹은 고급 원단으로 된, 그리고 몸매를  드러내는, 여성스럽기 그지없는 옷들 뿐이었다. 물론 바지들 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당연히 내가 원해서 이런옷을 산  아니었다. 이졸드가  죽은 표정으로 “싫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왠지 불쌍해 보였다. 나는 이졸드의 손에 잔뜩 들린 옷들을 모조리 사겠다고 말했고, 이졸드는 그제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저씨, 화났어?”


“당연히 화났지.”


“……미안.”

이졸드는 답지 않게도 풀 죽은 모습으로 순순히 사과했다. 뭐, 아까보다는 조금 생기가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녀석에게 손사래를 치고 말했다.


“됐어. 니가 언제는 진짜로 미안한 적이 있었냐?”


“미안.”

“됐다니까. 정말로 미안한 거 맞으면 나 발정은  봐 줘라.”

이졸드는 머뭇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저 약속이 대체 얼마나 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긁으려고 손을 들었다. 내 손에 잔뜩 들린 옷봉투가 같이 딸려 올라왔다.

아, 이거  불편하네.

“근데, 이거, 옷 봉투 좀 니 가방에 넣으면  되냐?”

이졸드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사람들 주목 끌고 싶지 않아.”


하긴 무한의 가방이면 꽤나 귀한 마법 아이템이다. 그런 걸 들고다니는 10대처럼 보이는 여자애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지.

아니, 근데 그러고 보면 내 칼이 훨씬  주목받을 만한 물건 아닌가? 무한의 가방이야 비싸다지만 복제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내 검은 전 세계에 단 하나 뿐인 검이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이런 검을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

“별로?”


이졸드는 고개를 갸웃거린 뒤 말했다.


“어차피 잊혀진 지 오래 됐던 물건이잖아? 전설 속에서나 유명하지, 실제로 늘어나는 걸  사람도 별로 없고.”

하긴 그것도그랬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으니 이졸드가 말했다.

“그래도 이따가는 조심해.”

대학 도서관 들어가서 얘기겠지.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졸드는 내가 못미더운지 자꾸 날 귀찮게 했다.

“호르마키는 지금은 상업도시지만, 시작은 대학 주위로 형성된 시장이었어. 역사도 천 년이나 되고.”


“나도 알아.”


“그러니까, 도서관에는 아저씨 그 칼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라고.”

“아, 나도 안다니까?”

“……뭐, 아저씨가 잘 하겠지.  들키게 부탁 좀 할게.”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묵는 여관에 도착해 있었다. 가져온 짐들을 풀어 놓고……. 그러니까, 온통 내 옷들이었다. 아무튼 그걸 일단 풀어 놓고, 이졸드는 켈레이드를 불렀다.

“켈리.”

“네, 주인님.”


“이거 세탁 좀 해 줄래?”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가방에 들어 있던, 정액과 흙으로 범벅된 옷가지들을 켈레이드 앞에 꺼내놨다.


“…….”


켈레이드 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쳐 보이는 까만 눈동자는 질투에 젖어 있었다. 그런 눈동자로 쳐다보면 나도 난감하다, 켈레이드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녀석에게서 시선을 아예 돌렸다.


켈레이드는 주문을 중얼거렸고, 엉망진창 더럽혀져 있던 옷들에 청소 주문이 걸렸다. 옷과 속옷이 번쩍이며 팡 소리와 함께 펴지고, 묻어 있던 더러운 것들이 한 방에 깨끗하게 사라졌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마법이겠지.

“자, 그러면  볼까?”

“도서관입니까?”


켈레이드의 물음에 이졸드는 고개만 끄덕여서 대답했다. 켈레이드는 서둘러야 할  같다고 말했다.


“조금 늦게 오셔서…….”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흘끗 쳐다봤다. 녀석은 질투심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젠장. 그래, 내가 이졸드랑 섹스하느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일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켈레이드에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 기껏 예약해 줬는데 시간 놓칠 뻔 했네. 다음부턴 안 그럴 테니까, 일단은 출발하자고.”

“아저씨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이졸드가 말했다. 허 참. 얘는 둔한 건지, 아니면 켈레이드를 정말로 노예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노예인 건 맞긴 한데…….

내가 작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이졸드는 나갈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나와 켈레이드를 재촉했다.


“자, 얼른 가자. 30분 밖에 안 남았어.”




여관은 대학 도서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완전히는아니긴 했지만, 거의 도시 반대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탓에 우리는 예약 시간에 조금 늦고 말았다. 대략5분 정도? 아니면 10분쯤?

이졸드가 제대로  시계가 없으니 이게 불편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도 거기엔 격하게 공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켈레이드가 나를 째려봤다.


“시계 핑계 대진 마시죠. 크누트  재력이면 좋은 시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실 텐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미개한 세상에서 시게는 지나치게 정밀기계라는 점이었다. 나는 켈레이드에게 말했다.

“세상에 어떤 모험가가 시계를 갖고 다녀?”

당연히, 이 세계에 전기 시계 같은 건 없다. 시계의 절대 다수는 기계식 시계고, 기계식 시계는 충격에 약하다. 뛰고, 구르고, 치고 받는 모험가가 들고 다니다가는 고장내먹기 딱 좋은 물건이 이 세계의 시계라는 물건이다. 그리고 고장난다고 새로 장만하기도 쉽지 않고 말이다.

애초에 시계라는 물건 자체가 이 세계에서는 도시에서나 필요한 물건이다. 농민이야 그저 해 뜨면 일어나고,  떨어지면 자리에 눕고 하면 되고, 그 점은 모험가도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도시에서도 시계가 충분히 보급될 만큼 값싼 게 아니다. 시계가 필요한 도시민들도 시계탑이나상점 괘종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지,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는 건 소수 귀족이나 부유층 뿐인 게 현실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켈레이드도 나와 말싸움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는지 숙이고 들어갔다. 여전히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틱틱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했지만.

내가 켈레이드와 이야기하는 동안 이졸드가 도서관 사서 아저씨를 데리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멀대같은 체구에  어울리게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이 젊은 사서는 호르마키 대학 대도서관의 수석 사서인 동시에, 코르스라는 신의 사제라고 했다.

코르스라는 신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이졸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녀석이 켈레이드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르스가 어떤 신이야?”

그 말에 앞서 걸어가던 사서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졸드에게 대답했다.

“지식과 지혜의 신입니다. 학자들에게는 인기있지만, 모험가나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지요. 모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세상에. 이졸드 목소리를 들었다고? 그렇게 작게 말했는데? 나는 물론이고 이졸드도, 켈레이드도 놀라서 사서를 쳐다봤다. 사서는 웃으며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보통은 이쯤에서 코르스 님에 대해 궁금해 하곤 하시더군요. 당신들 같은 모험가들이라면 말입니다.”


사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 천장이 높은 도서관 홀이 쩌렁쩌렁 울렸다.

“도서관인데 그렇게 소리를 크게 내도 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물어보니 사서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니, 그러니까, 다들 공부하고 있을 텐데 방해가 될까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서는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웃었다. 홀이 또다시 쩌렁쩌렁 울려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그가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사서는 당당하게 말했다.

“여기 공부하는 사람 같은 건 한 명도 없거든요.”


“엥? 여기 대학 도서관-”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서는 유쾌하게 웃으며 내 말을 잘랐다.

“그렇습니다. 대학 도서관이죠. 대학생들이 어디 공부를 하는 자들이랍니까? 술, 결투, 계집질- 아, 여성분들께 실례.”

사서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시험이나 졸업이 코앞에 닥친 때가 아니면 아무도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않지요. 지금도 도서관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덕에 저는 좋지요 이 수많은 책들을 제가 멋대로 읽을  있으니까요.”


“……책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내 대화에 이졸드가 끼어들었다. 사서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물론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지식을 좋아하는 거지요. 제가 코르스 님을 섬기는 이유도 실은 지식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지식은 힘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원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었지. 이쪽 세계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자 사서는 다시  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바로 그렇습니다. 지식이야말로 힘이지요. 땅과 물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거대한 물줄기를 비틀어 수로와 운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바람과 불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풀무와 용광로를 만들고, 쇳물을 녹일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질병을 고치는 힘이 생기고, 사람의 마음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천체의 운행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천상의 만신전에까지 닿을  있지요.”

마지막에는  이상한 점성술 같은 데로 빠지긴 했지만, 그거야  세상이 워낙에 미개하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사서는 그렇게 말하고 약간 상기된 얼굴로,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거기 맞장구쳐 주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는 지식은  그대로 힘이고 말이죠.”


“그것도 참 재밌군요. 재밌는 분이십니다. 레이디……?”

“크누트. 근데 레이디는 빼 주면 좋겠는데요.”


“네, 크누트 님.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오토넨입니다.”


코르스의 사제, 호르마키 대학 대도서관의 수석 사서, 오토넨은 그제서야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붙잡고 반갑습니다, 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그러자 이졸드의 눈에 불이 켜졌다. 녀석은 나와 오토넨의 사이로 급하게 끼어들며 말했다.

“전 이졸드, 여기 얘는 켈리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 레이디 이졸드, 그리고 레이디 켈리.”


그러고 나서 “예약하실 때, 그리고 명단을 작성하실  성함은 보았습니다.”라고 오토넨은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졸드와 켈레이드와도 악수를 나눴다.

이졸드는 오토넨과 악수하고 나더니 나를 째려봤다. 그리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꼬리치지 말라고.’

아, 진짜 이놈의 질투 때문에 돌겠다. 내가 뭘 꼬리를 쳤다는 거야? 내가 입모양으로 항변하려고 했지만, 오토넨의 말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름다운  분 레이디께서는 무슨 지식을 원하셔서 호르마키 대학 대도서관까지 찾아오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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