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018.
‘잠깐만.’
그러나 그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마냥 신나할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분위기에 휩쓸려버릴 거야.’
계속 인벤토리 칸을 늘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마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이야 이렇게 쉽게 마나를 얻을 수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만약 인벤토리가 엄청나게 늘어난 이후에 지금의 혜택이 없어지면....’
인벤토리를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부담이 된다면 일부 인벤토리를 제거해서 부담을 줄이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힘들게 만들어낸 인벤토리를 다시 없애야 한다면 시간 낭비 수준을 넘어서 대단한 손실이었다.
‘그만큼의 마나를 만약 다른 쪽에 투자했다면.’
하다 못해 체력 단련에 활용했더라면 그만큼 강한 몸을 갖게 될 테니까.
‘그래. 그 때 가서 후회하기보다, 지금부터 적당히 분배하고 속도조절을 하는 게 좋겠어.’
당장 인벤토리 몇 칸을 빠르게 늘리는 것에 전력하지 않고, 지금부터 꾸준히 다양한 부분을 성장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칸수도 줄여 말하고 있으니까, 느리다고 문제될 것도 없잖아.’
그렇게 방향이 정해졌다.
처리장 직원에게 들러 작업을 마쳤음을 알려준 그는 몰고 왔던 식당 카트를 다시 몰고 그곳으로 복귀했다.
“아직 출근 전인가보네요.”
“잔반 처리?”
“네.”
“아직 만나신 적 없었던가요?”
“예. 이래저래 엇갈려서요.”
“뭐, 굳이 만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담당자가 하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를 건네던 식당 직원은 곧 밤동안 쌓인 피로를 긴 하품에 담아 내뱉었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한 숨도 못 주무셔서 어떻게 해요? 당직도 아니신데.”
“괜찮습니다.”
숙소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카트를 몰아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두 발로 걷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뛰어가면 땀을 흘리게 되겠지.’
적당히 빠른 발걸음.
이른 출근을 행하는 이들을 지나치며 숙소에 도착한 그는 그제야 다락방에 대충 밀어놓았던 짐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간이침대라... 그래도 흙침대보단 나을까.’
접이식 침대.
야근 많은 회사에서 주로 보이는 종류였다.
침대라고 하니 군용 야전 침대라도 주려는 건가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나았다.
“어우, 푹신하다.”
고작 반 뼘이나 될까 싶은 쿠션임에도 무척이나 편했다. 아주 푹신한 것도, 그렇다고 딱딱한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느낌.
“일어나자.”
왠지 더 누워있다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서,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옷은... 그냥 가도 될 것 같고.”
딱히 더러워진 곳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면 될 듯 했다. 그렇게 집을 나섰더니, 멀찍이서 대형 차량과 장비들의 이동 소음이 들려왔다.
‘가까워지는데?’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쪽으로 오고 있었다.
금세 공터로 접어든 각종 차량에서 군복과 일반 작업복이 뒤섞인 수많은 무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벌써 시작하시는 건가요?”
“예. 빨리 해야 빨리 끝내지요.”
상하수도 공사와 전기 연결 공사.
빠르게 될 거라더니, 정말로 그렇게 일찌감치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챙겨온 장비나 지하에 묻을 것으로 보이는 대형 관 같은 것들을 보면 다소 의아해질 수 밖에 없었다.
‘고작 숙소 하나에 연결하려고 저런 것들까지 동원해?’
그리고 그런 궁금증은 곧 풀렸다.
“다른 건물들이 올라간다고요?”
“예. 지금처럼 쓰레기장 한 구석에서 일하시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전용 작업장을 신설할 겁니다.”
전용 작업장.
최강혁이 조합 스킬을 편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만을 위한 일종의 공방을 만들어주겠다는 것.
“앞으로는 부대에서 반출되는 물품들이 이쪽으로 오게 될 거고요.”
일반 쓰레기를 제외한, 피복이나 전투화 같은 것들은 이제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보낸다는 것도 들었다.
‘편하긴 하겠지만....’
사생활이 침해받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렇게 세워질 전용 작업장에 담당 직원들이 상주할 숙소도 함께 지어질 거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미 전담 직원을 둘 거라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설마하니 집 근처에 상주시킬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감시 목적일까?’
그런 의심도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어느 쪽이든 확신하기 어려웠다.
‘모르겠다. 일단 나한테 편해진 건 사실이고.’
다만, 더 이상 쓰레기장에 출근하지 않게 된 건 분명해보였다. 이곳에 온 이들은 그런 부분까진 알지 못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게 빠르겠지.’
어차피 나선 걸음이었다.
일터로 향한 그는 그곳에서 예상했던 대로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뭐야. 얼마나 됐다고 신참을 호로록 빼가냐?”
“각성자인 걸 알아버렸으니 별 수 없잖아.”
“하긴. 윗놈들이 그냥 둘 리가 없지.”
선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그동안 많은 걸 가르쳐준 사수 김환수 또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일 좀 한다 싶더니.”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말처럼 쉽진 않을 거다. 여유가 있어보이면 그만큼 일감을 더 만들어줄 놈들이니까.”
김환수는 적당히 요령껏 하라고 조언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던 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덕분에 우리 일거리도 줄어든 건 맞지.”
“여기 있던 것들도 그쪽으로 옮긴다던데?”
“아. 그래요?”
“그렇다더라고.”
새로 나올 물량만 공방으로 오는 게 아니라, 지금 쓰레기장 한켠에 엄청 쌓여있는 기존 물량들까지 옮긴다는 것 같았다.
“어쩐지, 오늘도 일할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출근 안 해도 된다고.”
“집에서 쉬고 있어.”
“어차피 곧 일복 터질 테니까.”
“아....”
그렇잖아도 피곤하던 차였다.
그래도 기왕 온 김에 샤워라도 할까 싶어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그곳에서의 샤워를 천천히 꼼꼼하게 즐겼다.
‘개인 라커도 비워야겠구나.’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금 나가야 한다니. 식당 못지 않게 정이 들었던 곳이라 무척 섭섭했다.
‘별 수 있나. 선택할 권한이 없으니.’
그가 나서서 이야기를 한다면 계속 그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다 저들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는 혜택을 마다하는 건 바보짓이야.’
전용 작업장이 생긴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굳이 그걸 거절하고 쓰레기장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정이 들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다는 건, 이곳에 있는 선임들도 바보짓이라 이야기할 것이다.
“그동안 고생했어.”
“출근 개념은 아니겠지만, 시간 나면 종종 놀러와. 쓸만한 것들 보이면 따로 빼둘 테니까.”
“예. 부탁 좀 드릴게요.”
“집 구경시켜준다는 거 잊지 말고!”
“물론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출근을 샤워와 짐정리로 마무리한 후, 다시금 숙소로 돌아왔을 땐 이미 근처의 땅이 꽤 깊은 곳까지 파헤쳐지고 있었다.
“와. 저쪽에도 뼈가 있었네. 어디까지 파낸 거지?”
그러고보니, 이쪽의 흙은 지구... 특히 고향 땅의 것과 비교해서 무척 약하다는 것이 기억났다.
보통 한국의 흙은 조금 파들어가면 단단하게 굳은 층이 나와서 애를 먹기 시작하는데, 이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다른 나라 중에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지. 삽만 있으면 꽤 깊이까지 팔 수 있다고.’
이곳이 그랬다.
그는 문득 겨울에 언 땅을 야삽으로 때리면 불꽃이 튀어오르던, 고향 땅에서의 군생활이 떠올라 살짝 진저리를 쳤다.
‘저렇게 깊이에 있으니까 발견을 못 했지.’
가까운 곳에 수도관이 있다는 이야기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곳 공터에도 건물들을 세울 계획이 있었던 건지, 미리 그 인근까지 상하수도관을 연결해둔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공사가 빨리 될 거라고 했던 거구나.’
아예 멀리에서부터 이어야 할 상황이라면 고작 하루 이틀만에 끝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숙소를 다른 곳에 지어줬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겐 왠지 지금 있는 곳이 편했다.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외곽이라서 조용하기도 하고.
“어?”
그 때, 낯익은 얼굴의 군인이 다가왔다.
부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혹시?”
“예. 맞습니다. 제가 사령부 쪽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어떤....”
“딱히 뭐라 정의를 내리기가 애매합니다. 그래서 대충 영어로 뭉뚱그린 거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연락책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고윤호’라는 이름의 군인은 여전히 농담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군부에 협조를 구할 일이나, 궁금한 점 같은 것들, 자잘하든 크든 상관 없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중간에서 연락을 담당합니다.”
“24시간요?”
“글쎄요. 최강혁씨도 잠은 주무시지 않나요? 뭐, 일과시간 이후라도 문제는 없겠습니다만....”
만약 정말로 최강혁이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수많은 협조 요청을 제시한다면, 한 명 정도 추가로 데려와야 할 거라고 고윤호는 말했다.
“아. 그냥 궁금해서 여쭌 겁니다.”
“그렇군요. 음... 저기 오네요.”
“네?”
고개를 끄덕이던 고윤호는 이어서 최강혁의 등 뒤쪽을 살짝 턱짓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캠프에서 보기 드문 일반인 복장의 여성이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굽이 높지 않은 구두.
평범한 듯 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의 오피스룩.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여성이 살짝 미소짓는 얼굴로 최강혁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명함이었다.
“한영희라고 합니다. 앞으로 행정부와의 조율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조율 이라면....”
“커뮤니케이션이랑 비슷하겠지요.”
슬쩍 끼어든 고윤호가 속삭이듯 말했다.
한영희는 그런 고윤호와 안면이 있는 눈치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투로 최강혁만 보았다.
“명함 뒤쪽에 보시면 제 출근과 퇴근 시간이 적혀있습니다. 그 시간에만 연락을 주시면 언제든 대화가 가능합니다.”
“연락이요?”
“네. 아... 저는 이쪽에 상주하진 못해서요. 여러 모로 제약이 있어서.”
그럴 것 같다.
이곳 캠프는 몬스터만 위험한 게 아니다.
애초에 젊은 여성의 몸으로 아무렇게나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닌 것이다.
‘공무원이라고는 하지만, 이쪽은 자원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들었는데.’
그것도 여성이라니.
아마 가족들도 반대하지 않았을까?
왜 이런 곳에 와있나 궁금하지만, 굳이 개인사를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한영희는 그대로 돌아서서 멀찍이 주차해둔 공무용 전기카트에 올라탔다.
소리 없이 멀어지는 카트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슬쩍 근처에 다가온 고윤호가 말했다.
“미인계는 아닐 겁니다.”
“예?”
“일단, 미인이 아니죠.”
“...그런 쪽으로는 생각 안 해봤는데요.”
“차마 미인이라고는 못 하시잖습니까.”
“그야... 음.”
젊고 당당한 느낌이 매력있긴 했지만, 이성으로서의 매력은 아니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평범한 느낌이 강했다.
“일은 잘 합니다. 우리 쪽하고도 자주 싸우죠.”
“싸워요?”
“일을 하다보면 각자 입장 때문에 싸울 수 밖에 없어요. 행정부와 사령부는... 전륜구동 차량의 두 앞바퀴 같은 식이거든요.”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를 때가 있다.
그런데 각자 자신들이 가려는 방향만 고집해서 바퀴가 제각각으로 향해버리면 결국 차가 망가지거나 전복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의견을 맞춰서 나아가야 한다고, 고윤호는 그런 비유를 들어가며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 많이 싸워요. 그렇다고 주먹질을 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저 여자가 이곳에 상주하는 건 아니라고 하니 무척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근무가 괴로워질 뻔 했어요.”
“하하. 그 정도인가요.”
최강혁의 물음에, 고윤호는 그저 고개를 휘휘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