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037. (37/138)



〈 37화 〉037.
“.......”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작은 구멍들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비비며 일어난 최강혁은 자신이 그리 오래 잠을 자지 못한 게 아니라, 반대로 훨씬 많이 잔 것임을 직감했다.
시스템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우... 하루를 넘게 잤냐.”

더 없이 개운했다.
하지만  빈 위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빅버드의 살점을 조금 떼어내 루팅으로 섭취했다.

‘이제 여유가 되면 익혀서 먹고 싶긴 한데.’

워낙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동안 미뤘던 일들을 하나 하나 해결해야 한다.

‘주변 정찰도 해야겠지만, 그 전에....’

강철로 방어복을 보완하려던 계획.
그것부터 처리한다.

‘컴파운드 보우도 만들어야겠지. 테스트까지 해야 하니, 완성품은 좀 오래 걸리려나.’

아무리 스캔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그것 그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병사가 갖고 있던 활은 실전용보다는 대회용에 가까웠다.

‘연사도 어렵고...  부실했지. 애초에 컴파운드보우가 내구성이 그리 좋은 건 아니라고는 하지만.’

전투에  물건이다.
그럭저럭 빠른 연사를 감당할  있을 수준의 내구성이 필요하다.

‘어디 보자. 흉갑 데이터가....’

데이터 저장소를 뒤적이던 그는 찾던 것을 발견하고 별도 창으로 꺼내 열었다.

‘굳이 수납 슬롯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떼어버리고....’

인벤토리가 있으니 여분의 탄창이나 보조 무기를 넣기 위한 부분은 쓸모가 없다.
또한 너무 무거우면 곤란해질 테니 두께 역시 적절하게 조절한다.

애초에 전신갑옷을 만들 생각은 아니니, 가죽 보호복 위에 일부 강철 파츠를 덧대는 형식이 좋을 것 같다.

‘완전 강철로 만들면 무게도 무게지만, 너무 시끄러워.’

연결 부위를 아무리 유연하게 해도 쇳소리를 아주 없앨 수는 없다.

최강혁은 이것 저것 고려하며 새 보호복의 형태를 잡아나갔다.
그렇게 최종 형태가 확정되고 나니, 남은 건 마나를 부어가며 재료를 가공하는  뿐이었다.

‘이쪽은 마나만 있으면 되고.’

구상했던 것과 실물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몇 군데 손을 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꽤 만족할 만한 녀석이 나왔다.

아무래도 강철 보호대가 추가되었으니 무거워질 수 밖에 없지만, 그런 무게감은 그만큼 안전해진 것 같은 기분을 주기도 했다.

‘이 정도로 무너지진 않겠지?’

문득 지금 그가 앉아있는 곳이 허공에 고정된 그물망이라는 것이 생각났지만, 워낙에 과도할 정도로 단단히 박아놓아서인지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이 정도로 그칠 게 아니라, 아래하고 위쪽 공간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바닥은 사실 반쯤 임시였다.
단순히 해먹을 만들어 고정하면 자는 동안 옆으로 돌다 떨어지거나 할  같아서  넓게 만들 생각으로 한 것 뿐.

‘내 잠버릇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충분히 자고 일어나 개운한 상태가 되니 여러 모로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또한, 굳이 그런 식의 바닥이 아니라 나무 안쪽을 파내어 제대로  집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속을 조금 깎아낸다고 죽진 않겠지.’

워낙 커다란 나무니까, 그가 만들 공간 정도는 다람쥐 구멍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좋아. 이건 굳이 해체하진 말고... 이 아래쪽으로 깎아보자.’

나무의 속살은 생각 외로 단단했지만, 단단한 쇠칼과 망치, 각성자의 완력과 넉넉한 시간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꼬박 이틀을 투자한 최강혁은 정말로 제법 그럴싸한 내부 공간을 만들어냈다.

기존 그물망의 한쪽 옆으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냈고, 바깥쪽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면 위쪽 못지 않은 원형 공간이 나왔다.

“이제 끈끈하지 않네.”

깎아내면서 흘러나온 수액과 물기가 무척 찐득거렸지만, 그 과정에 생겨난 톱밥과 나뭇조각들을 얇은 판으로 가공해서 벽지나 장판처럼 붙였더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굳이 이쪽에도 문을 낼 필요는 없겠고.’

그래도 창문 정도는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한쪽 벽에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원형 창을 냈다.

“좋았어.”

거처가 생겼다.
동시에, 갖고 다니기 애매한 것들을 보관할 창고가 생겼다고도  수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냐.”

최강혁은 그곳 바닥에 이것 저것 꺼내놓았다.
여분의 전투화 몇 켤레와 옷, 속옷, 자잘한 잡동사니들을 내어놓으니, 그제야 빡빡하던 인벤토리가 제법 여유로워졌다.

‘슬슬 먹을 것도 찾아봐야 하는데.’

활을 만들어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식량 확보였다.
아직 총알이 아주 떨어진 것도 아니니, 지금은 그것을 들고 나서기로 했다.

‘숲에 뭐가 있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가능하면 지도도 만들어야겠지.’

길을 잃으면 곤란하다.
 나무가 그 나무 같으니까, 자칫하면 집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제일 바깥 나무를 고른  잘한 것 같아. 안쪽 나무를 대충 골랐으면 정말 헷갈렸을 거야.’

그래도 별도의 표식을 남겨두긴 해야겠다.
로프를 적당히 잘라서 나무에 묶어 거는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바깥에 사다리 같은 걸 만들어야 하나?’

이곳은 지면에서 적어도 20미터 이상 올라와야 하는 곳이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훌쩍 뛰어 들어올  있는 높이는 아니었다.

‘나무 외벽을 깎아서 발판을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로프를 매달아 내릴 수도 있고....’

편한 건 발판 쪽이 제일이겠지만, 보안 측면에선 로프나 사다리가 나을 듯 했다. 올라온 후에는 끌어올려서 숨기면 되니까.

‘뭐 하나를 하고 나면  일이 두 세 개가 늘어난단 말이지.’

괜찮다.
조급해지지 말자.

‘잠도 충분히 잤고... 이제부터는 시간이 내 편이라고 믿어보자.’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단단히 채비를 갖춘  그곳을 나섰다.
지금처럼 전투복 원단의 섬유를 뽑아내어 가죽과 섞어 만든 로프를 써도 되겠지만 그러면 낭비가 너무 심해지는  같았다.

‘주변에 널린 게 나무하고 풀이니까, 이제 저쪽에서 섬유를 뽑아 쓰면 되겠지.’

그가 집으로 삼은 나무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근처의 나무로 조심 조심 건너다니며 적당한 가지를 베거나 나뭇잎을 뜯어 모았다.

‘어떤 친구들이 사는지 몰라도... 발이 크구나.’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또 다른 나무로 훌쩍 훌쩍 뛰어 건너던 그는 종종 멈춰서서 지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개중에는 그 높이에서 보아도 명확히 눈에  정도로 커다란 발자국들도 있었는데, 스캔이 가능한 거리는 아니어서 일단 눈에만 담아두었다.

‘가급적 나무 위로만 움직이는 게 좋겠어.’

왠지 이곳에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종종 눈에 띄는, 그 주인을 짐작키 어려운 뼈다귀 따위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음....”

상대적으로 온순한 이웃들도 만났다.
어떤 나무의 옆쪽에 마치 딱따구리가 파놓은 것 같은 구멍이 있어서 슬쩍 보니, 알을 깨고 나온  얼마 안 되어보이는 새끼 새들이 있었다.

“나 엄마 아닌데.”

그를 보고는 삑삑거리며 부리를 벌리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각각의 크기가 칠면조 하나 정도는 되어보이니 다 자라면 얼마나 커질까 좀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

그리고 곧 그 답을 눈으로 확인했다.
근처 나무에 날아와 가지에 앉은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이사 왔는데. 거... 친하게 지냅시다.”

빅버드는 동네 아는 동생 정도로 보일 만큼 커다란 녀석이었다. 녀석의 부리에 물려있는 짐승만 해도 어지간한 대형견 크기는 되었다.
신기한 건 크기가 아니라 깃털이었다. 푸르다가 붉다가, 마치 카멜레온처럼 색이 변했다.

‘저 보송보송한 솜털 녀석들이 저렇게 자란다는 건가.’

최강혁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가만히 앉은 새의 고개가 그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냥  보내줄 것 같은 눈빛이네. 그렇지?”

그는 조심조심 인벤토리에서 꺼낸 빅버드의 살점 한 덩이를 딛고 있던 가지에 내려놓았다.

“뇌물이 먹히려나.”

들고 있는 총으로 쏴갈길 수도 있겠지만, 왠지 이 숲에 있는 모두를 적으로 삼지는 않아도 되지 않나 싶었다.

‘총을 쏴도 한 방에는 안 죽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내가 죽겠지.’

그동안 그는 자신의 판단을 별로 믿지 않았지만, 캠프 밖으로 추방된 이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육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잘 맞는 편이야.’

위험할 것 같아서 우회하거나, 아무 것도 없지만 뭔가 쎄해서 일단 엎드려 숨어보면 꼭 그가 가려던 쪽에서 뭔가가 나오곤 했다.

‘그런 것도 각성자의 능력일까.’

최강혁은 가지가 서로 얽혀있던 다른 나무 쪽으로 건너가며 생각했다.
그제야 펄럭펄럭 날아온 성체 새가 물고 있던 짐승 사체를 나무 구멍 안으로 넣어주더니, 그가 놓고 갔던 빅버드 살점은 자기가 쪼아먹었다.

“받아줬다고 쳐도 되려나.”

여전히 이쪽을 보면서도 공격하지 않는 건 좋은 징조일까. 최강혁은 인벤토리도 적당히 채워졌으니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최강혁은 캠프에 있었을 때처럼 하루 하루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숲 한쪽 외곽을 겉핥는 수준이던 지도도 조금씩 자세하게 바뀌어가고 있었고, 몇몇 구역에는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생김새를 그려넣기도 했다.

‘다들 자기 영역이 정해져있는 것 같았지. 침범하면 싸우는 거고.’

일부러 침범하는 경우도 많았다.
몬스터들에게 평화 협상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인 건 당연했다.

콰득!

‘나도 그 안에 얽혀있는 거고.’

최강혁은 건너편 나무에 틀어박혀있는 큼직한 화살과, 그것에 몸통이 꿰여 버둥거리는 사슴벌레를 보았다.

벌레라고 하기엔 역시나 덩치가 커서, 거의 허벅다리 정도 크기를 가진 녀석이었다.

‘그래도 나름 단백질이 많아. 갑각도 쓸만하고.’

그는 당장 놈을 마무리하러 가기보다,  화살을 쏘았던 활을 스캔해 점검하는 것부터 우선했다.

“32발째... 금이 갔군.”

계속된 시행착오와 보완을 거쳐, 이제 그럭저럭 쓸만한 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구성이 완벽하진 않았다.
인벤토리에 넣고 수리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튼튼한 활을 만들면 더 좋을 텐데.

‘역시, 통짜 강철을 써야 하나? 그럼 잘 안 휘는게 문젠데.’

결국 강철 바디에 강철로 만든 와이어를 사용해야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 그런 활을 만들게 되면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이상 시위를 당길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별  없지. 마나 관리에  더 신경쓰면  거야.’

당기기 어려운 활은, 다시 말하면 그만큼 위력이 강한 활이 될 거라는 뜻이다.
지금의 활을 인벤토리에 넣은 그는 건너편 나무로 가서 아직 꿈틀거리고 있던 사슴벌레를 마무리하고 챙겨 넣었다.

‘아직 조용하네.’

오늘 새벽에  큰 싸움이 있었다.
숲 깊은 안쪽에서 제법 큰 영역을 갖고 있던 놈들이 맞붙은 것 같은데, 그 여파가 이쪽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몬스터들 사체가 꽤 나오겠지만... 그걸 욕심내다간 같이 휩쓸려 죽기  좋지.’

적어도 이곳에선 가늘고 길게 갈 생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표범 같은 종류의, 나무 위까지 올라와서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금처럼 곳곳에서 구멍을 파내어 살아가는 새들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무 위를 고른  좋은 판단이었어.’

단단히 박혀있던 화살을 루팅으로 회수한 그는 지도를 열어본  방향을 돌렸다.

‘오늘 좀 무리하면 마무리될  같은데. 아슬아슬하려나.’

숲에서 확인한 것들 중 하나는 그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뛰어 건널  있는지였다.

제대로 마나를 소모하며 뛰었을 때 5미터를 조금 넘겼으니, 무거운 보호복을 벗어버리면 그보다 좀  먼 거리도 가능할  했다.

‘좋아. 가자.’

처음엔 그저 나무와 나뭇가지로 보였던 것들도 이제는   있는 길과 그렇지 않은  정도로 구분이 갔다.

그렇게 나무에서 나무로 거듭 연결된 길을 따라 이동한 그가 도착한 곳은 거처에서 적잖게 떨어진 곳에 자리한 평범한 나무  그루였다.

“후....”

 나무의 중간 높이 즈음.
지금 최강혁이 바라보는 곳은 마치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깊이 파여있었다.
사실 쥐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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