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055. (55/138)



〈 55화 〉055.

‘움직이는구나.’

그곳에 아무 것도 없음에도 수면 가까이 촉수를 뻗어보던 놈은, 거듭 뭔가를 확인하듯 다른 촉수들을 비슷하게 수면 위로 꿈지럭거렸다.

그러더니 가까운 물가로 촉수를 내밀어 훑기도 했지만, 미리 뒤로 물러나있던 최강혁은 그것에 닿지 않았다.

‘물이 없으면  되는 건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던 촉수들이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바싹 마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기분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전투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같았다.

‘쉽게 해결할 수 있으면 좋긴 하지.’

그 때,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나무 뒤로 숨은 최강혁은 수면이 줄어든 것을 본 고블린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았다.

‘퍼가기 애매하긴 하지.’

양동이를 집어넣으려면 살짝 비탈이 된 가장자리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미리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전해지는 건 아니니 우려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그냥 가냐.’

위험한 것 같으니 그냥 가버렸다.
오히려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까.

‘음... 시간이 지나면 물이 다시 채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구나.’

다시 내려간 그는 멈췄던 작업을 이어갔다.
고블린들과 달리, 그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도 어느 정도까지는 루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딱히 수면을 건드리지도 않으니. 답답하긴 할 거야.’

놈에게 눈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 건 분명해보였다.

2미터. 3미터.
거듭 내려가던 수면은 결국 놈이 위로 뻗지 않아도 그 촉수들을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진짜네. 마르고 있어.’

놈은 수면 밖으로 몸을 내밀지 않기 위해서 납작하게 퍼진 형태가 되었지만, 그것으로도 오래 버티진 못했다.

그러자 반대로 호수 밑바닥을 파고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

최강혁은 물 위로 드러난 놈의 촉수와 몸통이 그 끝에서부터 바싹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말린 오징어를 연상케하는 모습이었다.

‘문어보다는 낙지 쪽이네.’

그 즈음 품 속에 들어있던 조각의 반응이 좀  강해졌다. 그 위치를 대강 짐작해보니, 다행히 놈이 있는 쪽은 아닌 듯 했다.

‘조금만 더 퍼내고 들어가자.’

낙지는 호수  구석에 쭈그리고 있지만, 완전히 마르거나 굳어있는 건 아니었다.
잘하면 촉수 몇 가닥 정도는 뻗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너무 성급하게 들어가는 건 좋지 않았다.

‘굳이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조각만 찾아내면 된다.
그렇게 거듭 물을 퍼낸 그는 뻘처럼 바뀐 호수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이쪽인데.’

혹시 낙지가 움직이지는 않을지 거듭 신경을 쓰며 그 일대를 뒤져보니, 바닥에서 대략 1미터 깊이에 찾던 것이 있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서 두 개 이상 찾아낸 건 한  전쯤 이후로 두 번째였다.

“.......”

그제야 새삼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낙지가 먹지 않고 버린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걸치고 있었을 누더기 가죽이나 녹슨 쇠붙이 칼.
그 외에도 몽둥이나 가죽 방패 따위가 호수 바닥에 쌓여있었다.

굳이 루팅해봐야 가치가 없을  같긴 하지만, 그래도 처분하면 소량의 마나라도 건질까 싶어 가까운 것들 위주로 루팅한 후 올라왔다.

‘고생해라.’

반대쪽 바닥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낙지를 본 그는 마지막에 루팅했던, 10톤씩 두 칸에 달하는 물을 그쪽에 도로 부어주었다.

말라가던 낙지가 몸을 완전히 담그기엔 부족한 양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죽여서 챙겨봐야 인벤토리나 몇 칸 받는 정도일 것이다. 덩치를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스캔해보니 핵 같은 것도 없었고.

‘나는 이 정도면 됐어.’

1톤 정도의 물을 따로 남겨둔 그는 그곳에서 돌아섰다.
품 속의 조각이 지금까지 중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보아, 이제 정말 거의 다 찾아낸 것 같았다.

‘저 쪽이구나.’

방향은 확실하지만 거리는 애매하게 느껴진다는 건 상당히 멀다는 뜻이다.
진흙으로 엉망이  전투화와 바지를 내려다본 그는 일단 그것부터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좀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되겠다.’

마침 물길을 내던 중에 찾았던 작은 동굴이 있었다. 입구만 제대로 막으면 하룻밤 자고 가기에 충분할 것이다.

찌걱 찌걱.

‘...빨리 가자.’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찝찝함에, 그는 서둘러 발을 재촉했다.


***

깊은 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세상에선 그저 우스개 취급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최강혁은 본의 아니게 마주친 광경에, 문득 그런 농담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고블린 솜씨가 아닌데.’

나무에 묶여있는 누군가의 시체.
머리와 하반신이 뜯겨나가고 없었지만, 분명히 인간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뼈와 살점은 남아있었다.

이런 곳에서 인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죽은 인간을 말이다.

‘죽고 나서 묶인 건지, 묶이고 나서 죽은 건지가 불분명해.’

성별도 확실하지 않다.
스캔 데이터를 보면 여성일 확률이 높다고 나왔지만, 100퍼센트는 아니었다. 골격이 작은 남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없다고 했다.

‘이건... 문신인가.’

그곳에 남아있는, 왼쪽 상완 즈음의 피부에 뭔가가 있어서 살펴보니 멍이나 흉터가 아니라 문신인 듯 했다.

워낙 주변 피부가 다 검게 죽어있어서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부분만 떼어 루팅한 후에 인벤토리에서 조금 만져보니 또렷한 문양이 나타났다.

‘죄수 번호군. 미국식인 것 같은데.’

미국 죄수들은 피부에 바코드와 숫자로 이루어진 문신을 새긴다고 들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고윤호가 직접 보았다고 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근데 왜 미국 죄수가 이런 곳까지 와서 뜯어먹힌 거지?’

뺨을 긁던 그는 어느 순간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질적인 기척이 있었는데, 풀숲에 숨어서 살펴보니 다름아닌 또 다른 인간들이었다.

-으읍! 으으읍!
-아직 힘이 덜 빠진 모양인데?
-한방 쑤시든가.
-여기서  흘리면 곤란하잖아.

적어도  사람 이상의 목소리.
최강혁은 조금 전 자신이 서있던 곳까지 접근한 무리를 보았다.
묶여있는 사람 하나를 끌고  네 명의 남자... 아니, 다시 보니 세 명의 남자와  명의 여자였다.

“.......”

그냥 보아도 묶인 자와 똑같은 죄수들로 보였는데, 그것은 그들 중 둘의 드러난 팔뚝에 똑같은 방식의 바코드와 숫자가 새겨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수끼리도 파벌이 생긴 건가.’

어느 캠프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수들을 이런 곳에 풀어놓는  좀 이해가 안 갔다.

어쩌면 탈옥한 자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곧이어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남자 하나가 걸치고 있던 청조끼의 등판이었다.

마치 락카나 페인트 따위로 대충 그려놓은 듯한 문양은 그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 깃발 속의 그것과 동일했다.

‘와일더 클랜이라고 했던가.’

그들을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범죄집단이고,  거점이 어디인지 불명확하다더니, 설마 이 산 속에 아지트를 만들어두기라도 한 걸까.

‘붙잡힌 사람도 죄수군.’

어떤 사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잡혀온 사람도 그리 정의롭거나 유순해보이지는 않았다.
이마와 뺨에도 문신이 가득했고, 눈가에는 눈물문신도 보였다.

‘저곳이 처형 장소 같은 건가보네.’

기존에 매달려있던 뜯겨나간 사체도 죄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클랜에서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처리하는 곳인 것 같았다.

실제로 그곳으로 데려간 이를 사슬과 밧줄을 이용해 단단히 묶은 그들은 마지막으로 각자 허리춤이나 품 속에서 제각각의 쇠붙이를 꺼내들었다.

푹! 푸푹!

그렇게 한 명이  번씩 묶인 자를 찌르고 난 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급소는 하나도  찔렀네. 일부러 그런 건가.’

네 번 찔렸지만, 묶인 자의 눈에 힘이 풀리지 않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최강혁은 그 남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내올 정도의 죄수.
게다가 온몸이 도화지인 것마냥 새겨져있는 수많은 문신들 중에는 갱단의 표식으로 보이는 것들도 더러 섞여있었다.

‘결국 죄수들끼리의 다툼인 거겠지.’

구할 수는 있겠지만, 뒷수습이   것이다.

‘이미 늦었기도 하고.’

고개를 저은 그는 수풀 너머로 더욱 깊이 몸을 감추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잘 알고 있는 체취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기에, 비명이라 할 만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살점이 뜯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질 즈음, 최강혁은 이미 멀어지고 있던 무리들을 조용히 뒤따랐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들을 추적하는  아니었다.

‘왜 하필 그 쪽이냐고.’

 속의 조각 탐지기가 가리키는 곳이,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향하는 곳과 같았다.


***


상당히 교묘한 위치와 지형이었다.
그들의 아지트는 외부에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가파른 협곡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 곳의 입구를 제외하면 안쪽에서도, 바깥 쪽에서도 오르는 것이 불가능할 법한 바위절벽.

바로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정상에 엎드린 최강혁은 안쪽에 있는 와일더 클랜의 아지트를 내려다보다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교대 시간이 되었나본데.’

바깥과 달리, 안쪽에서는 절벽 위로 올라오는 길이 만들어져있었다.
암벽에 쇠말뚝을 박고, 그것에 밧줄을 걸거나 나무판자를 엮어 만든 사다리와 계단이었다.

지금도 그곳으로 두 명의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곧이어 둘 중 하나가 하품을 하더니, 어깨에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소총의 멜빵을 훌쩍 고쳐 메는 것이 보였다.

‘무장 상태가 나쁘지 않아.’

특정 캠프들과 뒷거래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정말로 기본 무장 수준이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 보이는  남자 중 하나는 어느 캠프의 것인지 몰라도 정식 군인의 보호복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어쩌면 약탈한 장물일 수도 있겠지.’

이제는 2년도 더 된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선명한 들판에서의 처형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최강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쪽에 쓰러져있는 두 구의 시체를 보았다.

‘루팅을 하는 게 나을까.’

대략 서른살 안팎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경계 근무는 내팽개치고 섹스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바위절벽을 거미처럼 올라오던 최강혁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적이라고 봐야 맞긴 하겠지.’

그들을 죽인 죄책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애초에 첫인상부터 좋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사라 레드우드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까지 더하면 역시나 범죄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아지트에는 와일더 클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약탈 대상을 모조리 죽이는  아닌지, 한쪽 구석에 자리한 ‘우리’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갇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굳이 우리라고 표현하는 건, 취급하는 태도를 보자니 감옥보다는 그 쪽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어서였다.

‘내가 나설 일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철창 안에 갇혀있는 이들은 모두 젊은 여성이었다. 그 상태나 표정을 보면 어떤 일을 당했는지, 혹은 당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어차피 정리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아래에 그가 찾는 것이 있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창고건물로 짐작되는데, 그곳까지 아무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시피 하니까, 결국 무력으로 뚫는 수 밖에 없다.

‘각성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블랙 퓨마 킹의 핵 덕분에 은신 능력이 좋아지고 어둠 속에서    수 있게 되었지만, 이곳에선 써먹기 애매하다.

‘오히려 밤에 더 경계가 삼엄해지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음 경계자들이 절벽 위로 올라오는 마지막 사다리까지 도착했다.

최강혁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들을 이쪽 저쪽으로 던지고, 조용히 바위 뒤로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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