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086.
“이거 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
남자는 거듭 실내를 돌아보았다.
지금 앉아있는 원목 의자의 손잡이와 그 앞의 테이블을 지나, 그 위에 놓인 고급스런 찻잔에서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1년 사이에 달라진 것이 많군요.”
“그런가요.”
무표정한 얼굴의 에밀리아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향을 즐기며 답했다.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찻잔 옆에 놓여있는, 잘 펼쳐진 서류 한 장을 보았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이미 외울 수도 있을 만큼 반복해서 읽은 차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이야기가 돌더군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누군가와 이미 혼인을 하셨다는 허황된 소문 말입니다.”
“소문이 아니고, 그 앞에 증거가 있어요.”
“글쎄요.”
남자는 향유를 바른 금빛 곱슬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옆쪽에 대기하고 있는 여기사를 향했다.
“땅을 파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판 적 없어요.”
“그런가요. 신기하군요. 그러면 어디에서 이런 여유가 생기셨을까요.”
여기사의 갑주를 흘깃 본 남자.
그는 다시금 실내 곳곳을 눈에 담았다.
조금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메이드가 그의 시선을 받고는 어색하게 앞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고작 메이드들에게 보석 박힌 목걸이를 주실 정도의 재력과 아량이라니. 제가 그동안 아가씨를 잘못 보았던 모양입니다.”
“보이는 대로 보세요. 저도 그렇게 할 테니.”
“뭐... 길게 끌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시금 테이블 위의 서류를 보았다.
그의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가 맺혔다.
“나름대로 방법을 찾으셨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위장결혼이라니.”
“위장이 아니고, 제대로 신께 알렸어요. 기뻐하셨고요.”
“신?”
“아실 텐데요.”
“.......”
“맞아요. 나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죠. 신전에 확인해봐도 좋아요.”
“그렇습니까.”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뭐, 상관 없지요. 가치가 낮아졌다면 그 가치에 맞는 구매자를 찾아보면 될 일이니.”
스윽.
그녀의 여기사가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중에 멈추었다.
왼쪽, 그리고 테이블 너머 남자의 뒤쪽에서 그녀를 주시하는 두 명의 기사가 있었다.
“이거, 제가 말 실수를 했나봅니다. 유일한 기사께서 발끈하시는 걸 보면.”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의 에밀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우스워보였습니까.”
“.......”
“적당히 넘어갈 거라 생각하셨다면 아주 큰 오해입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조치에 대해선 이견이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에밀리아는 무심히 마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이어 그녀의 눈가가 잘게 흔들렸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실 겁니다. 지난 번 방문의 소동에서 배운 게 있으니까요.”
맑게 웃은 금발 남자.
그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고작 이런 종이쪼가리로 무엇을 바라셨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두 손 끝으로 잡고 찢어버리려던 그는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
그의 시선이 현관 쪽을 향할 때였다.
쾅!
퍼억-!
갑자기 안쪽으로 폭발하듯 박살난 현관.
무척 두터운, 철로 보강된 문짝이 앞쪽에 있던 기사 하나를 그대로 덮쳤다.
“......?”
모두가 흠칫 놀랄 때, 그렇게 열린 현관 밖에서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온갖 크고 작은 흉터로 뒤덮인 상체를 위압적으로 드러낸 거한이 입을 열었다.
“뻑뻑해서 안 열렸어. 새로 만들어줄게.”
“당신....”
에밀리아는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왠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감기 걸려요. 왜 벗고 있어요?”
“기선제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기선제압?”
“초전박살하고 비슷한데. 그것도 모르겠구나.”
“응.”
“몰라도 되니까, 뒤에 있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마법 못 쓰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느껴져. 장난감이 있는 것 같아.”
문짝에 맞고 쓰러진 기사를 흘끔 바라보던 또 다른 기사. 그가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너, 그거 뽑으면 죽는다.”
거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그런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지만, 이성과 달리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손을 뻗어보는데, 이번엔 그 남자가 아니라 옆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사였다.
“.......”
무심한 눈빛.
하지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미 검파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
저벅 저벅.
최강혁이 안쪽으로 더 들어오며 생각했다.
‘그런 대사가 있었지. 재밌는 영화였어.’
타블렛에 들어있던 영화 중 하나의 대사였다.
나중에 이쪽 말과 글에 익숙해지면, 도우미한테 이쪽 글로 자막을 넣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내 고향이 어떤 곳인지도 보여줄 수 있고... 아, 그러면 범죄영화는 곤란한가.’
이곳 식구들하고 고향의 영화와 드라마를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마나를 좀 더 쓰면 같이 보기가 된다고 하니까.
“그냥 누워있어.”
바닥에 엎어져있던 기사 하나가 꿈틀꿈틀 일어나려 했지만, 가슴팍 위에 올라온 발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기기긱.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기사의 갑옷 가슴팍이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지만, 최강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공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조금 전 남자가 찢으려던 결혼 증명서였다.
뒤늦게 자신이 빈손임을 깨달은 남자가 당황했다.
“내가 갖고 있을까? 누가 찢으면 안 되잖아.”
“네. 그게 좋겠어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서가 다시 사라졌다.
“끄으윽....”
가슴팍을 짓눌리고 있던 기사는 점점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팔 한쪽이 부러진 듯 보였다.
나머지 팔 하나와 두 다리를 버둥거리고는 있지만 가슴에 얹힌 다리를 치우지는 못했다.
“손님이야?”
최강혁이 물었다.
에밀리아가 조용히 방문자들을 보았다.
“글쎄요. 손님이라고 해야 할지.”
“오던 길에 사고가 났어.”
최강혁이 말했다.
“사람들이 사라졌어. 그렇게 해줄까?”
서툰 언어.
하지만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괜찮아요. 손 더럽힐 필요 없어요.”
“씻으면 되는데.”
“그래도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울고 싶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면, 이 남자가 정말로 그 말대로 해줄 것 같아서였다.
“.......”
맹목적인 보호.
부모가 살아있었을 때 느꼈던 근거 없는 안도감이, 이 사람 옆에서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으셨나봅니다.”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싸늘히 식은 눈빛이었다.
“어디서 용병이라도 구하신 모양인데....”
“이 분이 제 남편입니다. 이어질 언행은 신중하게 해주시면 좋겠군요.”
에밀리아의 말에, 남자의 입이 멈추었다.
“흠.”
최강혁이 그를 보았다.
이어서 허공을 흘끔거리는 듯 하더니, 다시금 남자를 향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치질인가?”
“그게 뭐예요?”
옆에서 에밀리아가 물었다.
그는 남자를 턱짓했다.
“항문. 찢어졌어.”
“아....”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과 눈빛.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식의 모함은 불쾌합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른 건 불쾌감이 아니라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
남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서있던 기사도 비슷한 표정으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님으로 오셨다면, 하룻밤 정도는 머무르게 해드리죠.”
에밀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말씀을 하실 거라면 환영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침묵하며 에밀리아를 마주보았지만, 거한의 발 아래에서 죽어가는 기사를 외면하지는 못했다.
***
“자고 갈 줄 알았는데.”
멀리 떠나고 있는 마차 행렬이 보였다.
최강혁의 말에, 에밀리아가 웃었다.
“이제 와서 손님대접을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어지간히 뻔뻔한 자가 아니라면요.”
“뻔뻔해보였는데.”
“...저 사람도 결국 가문의 심부름꾼일 뿐이니까요. 실제로는 약해요. 몸도 마음도.”
“흠.”
최강혁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떠나기 전 남겼던 마지막 말이 신경쓰였다.
1년 남았다고.
1년 후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감당해야 할 거라고 했었다.
‘이따가 물어봐야지.’
베티와 루시아가 부서진 현관의 파편을 줍느라 고생 중이었다. 워낙 잘게 부서진 것들이 많아서, 손에 가시가 박힐 것 같으니 물러나라고 했다.
‘싹 훑어줘.’
-알겠습니다.
세밀한 루팅 작업이라면 그가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도우미가 나서는 게 나았다.
그렇게 남아있던 부분도 마저 제거했다.
‘미리 만들어둔 게 없구나.’
일단 적당한 크기의 가죽을 꺼내서 위쪽에 고정해 걸어두었다. 밤바람이라도 막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약간씩 펄럭이며 새어들었다.
“거봐. 춥잖아요. 소름 돋은 것 봐요.”
에밀리아가 그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작게 혼내듯 말했다.
“괜찮아. 껍데기만 이래.”
“껍데기 말고 피부.”
“아. 피부만 이래.”
원래는 정장을 입을 생각이었다.
귀족의 남편이 되었으니, 혹시라도 필요할까 싶어서 연미복 스타일의 옷을 만들어두었다.
‘가문에서 왔다고 해서 잘 보이려고 했는데.’
하지만 현관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첫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래도 좀 춥긴 하구나.’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려다 말았다.
기왕 벗은 김에, 샤워장에 가서 욕조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
“같이 가자고요?”
“해야 할 이야기도 있고.”
“아.”
고개를 끄덕인 에밀리아가 따라나섰다.
그렇게 가기 전, 뒤로 고개를 돌린 최강혁이 엘리사벳을 향해 끄덕여주었다.
“잘했어.”
“제 일을 할 뿐입니다.”
그녀가 아내를 지켜주고 있으니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적대적인 이들의 숫자가 둘 이상일 경우에는 좀 문제가 있어보였다.
‘헤인즈가 빨리 실력을 쌓으면 좋겠지만.’
***
“기사요?”
욕조로 들어온 에밀리아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난감해했다.
“가문에 없어? 충성심 있는 사람.”
“가문에는 있겠죠, 충성심이. 하지만, 나한테 충성심을 가진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음....”
“엘리사벳경도 충성심보다는 그곳에 환멸을 느껴서 같이 나온 거니까요.”
“환멸?”
“나쁜 사람들이 있었어요. 좀 싸웠어요.”
“어딜 가나 있지.”
최강혁은 안 들어도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편을 보며, 에밀리아가 웃었다.
“내가 약해보여요?”
“약하잖아.”
“...마법산데?”
“못 쓰던데. 마법.”
“.......”
마나 교란 아티팩트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물론 지난 번 방문때 물리적인 충격이 있을 뻔 하긴 했지만, 그정도로 대비했을 줄이야.
어쩌면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더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난 번엔 한 명만 동행했던 기사를 두 명으로 늘린 것도 의심스럽고.
만약 이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남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안 늦었어.”
“네?”
“치워줄 수 있어. 아무도 못 찾아.”
“.......”
살짝 고민되긴 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그럴 필요 없어요.”
“1년 남았어. 무슨 말이야?”
“아. 그건....”
에밀리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부모가 죽고, 가문에서 그녀를 활용하려던 방식에 대해서.
“아버지는 서자 출신이셨거든요.”
“서자?”
“첩의 아들. 사생아.”
“첩이 뭐야?”
“아내 말고 다른 여자. 후처.”
“아. 조금 알겠어.”
가문에서 내놓은 서자.
게다가 아내로 맞이한 이는 귀족도 아닌 떠돌이 모험가.
그런 이들의 딸이니, 자유로운 삶 따위는 그저 허황된 꿈이 되었다.
그나마 부모가 지켜주었지만, 그들이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피하고, 문제를 일으켜 방해하면서 버텼어요. 그래도 한계가 있었죠.”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할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그녀는 가문이 내민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농지를 확보하기로 했어요.”
“농지?”
“농사지을 땅이요. 여기, 부모님의 땅 말고 가문 소유의 토지도 있거든요.”
“그렇군.”
“그곳을 농경지로 만들기로 했어요. 5년 안에.”
“쉬운데.”
“모르잖아요? 어딘지.”
“어딘데?”
그의 물음에, 주위를 돌아본 그녀는 한쪽을 가리켰다. 울타리에 막혀있지만, 어느 방향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저쪽 산 너머에 있어요. 지금은 울창한 숲이죠. 여기 있는 숲보다 더 큰 숲. 나무들도 있고....”
“쉬운데?”
“본 적도 없으면서 쉽대.”
꼬집으려고 손을 뻗던 그녀가 멈추었다.
그녀의 눈 앞 허공.
반투명한, 마치 사각형의 창문 같은 것이 크게 펼쳐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