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088. (88/138)



〈 88화 〉088.


두 번째 날은 첫날과 비슷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저녁 무렵부터 꾸리기 시작한 야영장의 풍경이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제대로 된 공터를 구축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중심에 모닥불을 피웠다.
제대로 저녁식사를 즐겼으며, 즐거운 잡담이 이어졌다.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한가한 여가생활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다 됐다.”

그리고, 제대로 캠프를 마련한 이유중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나무틀과 천으로 만들어진 가림막. 그 각각에 자리한 간이 욕실이었다.

‘좋아. 좋아.’

고작 어제 하루 못 씻었을 뿐인데.
다들 알게 모르게 찝찝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계획대로야.’

종교고 뭐고, 일단 깨끗해지면 이전까지 문제 없었던 것들도 새롭게 느껴진다. 냄새도 그렇고, 몸에 묻은 흙먼지도 그렇고.

“감사합니다, 가주님.”
“별 거 아냐.”

여성들이 한쪽으로 들어가고, 헤인즈와 둘이서 다른 곳을 썼다.
엘리사벳은 나중에 혼자 씻겠다며, 지금은 갑옷을 벗지 않았다.

“누군가는 경계를 서야 합니다.”
“그, 그러면 저도... 억!”
“넌 이따가 나랑 교대해야지.”
“아. 그렇군요.”

엉덩이를 차인 헤인즈가 욕실로 돌아왔다.

씻는동안 별 문제는 없었다.
메이드들이 아가씨와 같이 씻을 수는 없다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에밀리아가 허락하니 조용해졌다.

모두가 씻고 나왔다.
엘리사벳을 위해 따로 욕조를 준비해주었다.

그녀가 씻는 동안 헤인즈가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노려보았지만, 이쪽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던 말처럼 딱히 접근하는 몬스터는 없었다.

“좀 쉬지 그래?”
“괜찮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어도, 불냄새가 풍기면 궁금해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시는군요.”
“한동안 숲하고 산에서 살았거든.”
“아... 역시.”

헤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아귀가 짓무르고 터질 만큼 열심히 수련 중인 장창을 굳게 움켜쥐는 모습이, 적어도 기세만으로는 기사에 육박하지 않나 싶었다.

“늦었습니다.”
“아니. 안 늦었는데.”

엘리사벳이 씻고 나왔다.
최강혁이 손을 뻗으니, 그녀의 몸과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수분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아. 고맙습니다.”

그녀가 얼른 벗어두었던 갑옷을 걸쳤다.
헤인즈가 도와주는 동안, 최강혁은 슬쩍 한쪽으로 향했다.

엎드려 자고 있던 말이 어느샌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갑옷을 다 입은 엘리사벳이 서둘러 달려왔다.

“짐승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맞아.”
“적어도  이상인 것 같군요.”
“간 보는 것 같은데.”
“간이요?”
“정찰. 만만하면 공격할 테고.”
“아.”

가서 죽여도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최강혁이 철조망 너머 어둠 속을 가만히 바라보니, 몰려왔던 놈들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날 밤은 전날과 달랐다.
다들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모처럼 밖에 나와서 걱정이 되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이 반 정도일까.

젊은이들은 어디든 비슷한지, 모닥불가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지켜보고 있자니, 종종 이렇게 밖에 나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다녀올게.”

최강혁은 헤인즈를 억지로 재우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이야기했다.

“예?”
“미리 길을 만들 거야. 낮에 하려면 이동이 느려지니까.”
“아....”
“너무 멀리 가진 않아. 중간중간 돌아올 테니 걱정마.”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그래.”

그렇게 훌쩍 사라졌다.
엘리사벳의 귀에 멀리서 장작패는 소리 비슷한 게 나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멀어져갔다.
왠지 그 속도가 낮보다 빠른 느낌이었다.

콰드득- 쿠적!

실제로 그랬다.
지금 최강혁이 휘두르고 있는 건 낮에 쓰던 것과 다른 대검이었다.
그것보다 한 배  길이.
무게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놈.
사실, 만들어놓고 써먹을 일이 없었다.

‘이걸 갖고 나무나 팰 줄은 몰랐는데. 뭐, 좋네.’

한  휘두를 때마다 마나가 10에서 20, 많게는 50가까이 줄어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놈이다.

그래도 지름 2미터 급의 나무가 한 방에 반 이상이 갈라지니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적게는 두 방,  꼬여도 다섯 방이면 한 그루가 사라졌다.

“후우....”

마나 소모량이 상당했지만, 그만큼 회복되는 양도 대단했다.

‘자연회복량으로는 커버가 안 되지만.’

루팅한 나무가 있어서 보충이 된다.
오히려 넘칠 정도여서, 일부는 인벤토리로 교환하고 나머지는 마나를 뽑아내 채우는 것이다.

덕분에 마나를 소비하지 않는 것과 거의 비슷해서, 휴식을 취하지 않고도 계속 벌목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에밀리아를 돕는 일이라 생각했더니, 이거 오히려 나한테 더 좋은 일 같은데.’

특수칸의 업그레이드도 필요하던 참이다.
최대치였던 20톤이 30톤으로 바뀐 지도 좀 되었고, 숫자도 5칸에서 2칸이 늘어 7칸이 되었으니까.

‘다섯 칸이 20톤에, 나머지 2칸은 10톤 정도... 일단 10톤  개 먼저 20톤으로 올리고 다시 1번부터 올리면 되겠지.’

최대 무게를 20톤에서 30톤으로 올리려면 1톤 당 일반 인벤토리 1천 칸을 요구했다.
위로 갈수록 부담이 커지는  예상하고 있었으니, 그다지 화가 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있는 것만 해도 다 합쳐서 120톤이네. 완전히 업그레이드하면 210톤이 되는 거고. 장난 아니구나.’

물론 지금부터 완전 업그레이드까지는 8만 칸 가량이 필요하다.

답이 안 나오는 숫자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나무들을 마구 베어 넘기다보면 조금씩이라도 진행이 될 것이다.

‘한 그루에 적어도 10칸에서 20칸은 나오고 있으니까.’

이전 지역, 왕들이 살던 숲의 거목들은 한 그루에 1백칸에서 많게는 2백 칸도 받을  있었다.
그것에 비교하면 확실히 적지만, 그만큼 크기도 작으니 납득할 수 있는 숫자였다.

‘베어 넘기는 속도도 비교가 안 되고.’

한참 날뛰던 그는 얼른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중간마다 얼굴을 비추기로 했으니,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다.

“음.”
“오셨습니까.”

그렇게 돌아가보니, 엘리사벳을 제외하곤 모두 잠들어있었다. 에밀리아도 그를 기다리다 방금 전에 잠들었다는 듯 했다.

“엘리사벳도  자.”
“괜찮습니다. 낮에 자면 됩니다.”
“낮에?”
“예. 지금 상황대로라면 내일 낮에도  내는 작업을 하게 될 텐데, 제가 나설 부분이 없을 것 같아서요. 헤인즈에게 마부석을 맡기고 잠을 보충할까 합니다. 괜찮을까요?”
“뭐,  생각에도 그게 나을 것 같아.”

헤인즈는 오늘 밤  재운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땅을 메울 필요가 없으니 마부석을 맡기는  맞다. 그동안 삽질하느라 고생도 했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었다. 조심스레 받아든 엘리사벳이 뭔지 알겠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호각이군요.”
“여기도 비슷한 게 있다던데.”
“좀 더 긴 형태입니다. 이것도 멀리까지 들립니까?”
“지금 불지마. 시끄러울 거야.”
“그런가보군요.”
“무슨  생기면 불어.”
“알겠습니다.”

목걸이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그것을 목에 건 엘리사벳이 군례를 올렸다.

“해  즈음에 올 거야.”

그 말을 남긴 최강혁이 다시 사라졌다.
정말로 날이 밝을  돌아왔는데,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보였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잠에서 깬 에밀리아가 물었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안경을 쓰던 그녀가 이어진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길을 잘못 들었어.”
“...그게 좋은 일이예요?”
“엉뚱한 나무를 많이 베었어.”
“......?”

요리는 새로 할 필요 없었다.
어제 먹었던 스튜와 빵 남은 것을 꺼내어 나눠주었다. 불가에 데우지 않아도 이미 뜨끈했다.
엘리사벳은 잠을 자야 해서 조금만 먹었다.

“와... 밖에서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인  같아요.”
“어제 남은 건데?”
“그래도요.”

헤인즈가 웃었다.
불을 피울 수는 있지만, 몬스터를 유인할 수 있으니 요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일단 밖에 나오면 뭐든 짐이기도 하고요. 식료품이고 뭐고  양을 줄여야 하니...”
“그럼 뭘 먹어?”
“보통은 육포를 물에 끓여서 불려먹거나 하죠. 딱딱해진 빵을 넣거나 곡물가루가 있으면 풀어 먹기도 하고요.”
“그거 참 맛 없게 들리는군.”
“맞습니다. 맛은 없죠.”

다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야영지에서 철수했다. 짐마차에 여유공간이 있어서, 엘리사벳을 위한 잠자리와 햇빛가리개를 만들어주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쉴 때 제대로 쉬어야지.”

그녀가 황송한 얼굴로 누웠다.
하지만 다시 일으켰다.
갑옷을 벗을 수 없다며 그냥 누우려고 하기에, 말린 풀을 채운 매트와 털가죽을 더 많이 깔아서 푹신하게 해주었다.

“좀 나을 거야.”
“예....”

조심조심 자리에 누운 그녀는 간밤의 피로가 제법 있었는지 금세 고른 숨소리를 냈다.

“길이 뻥 뚫렸는데요?”
“밤에 뚫었지.”
“...아.”

헤인즈는 너무 푹 잔게 죄송한 모양이다.
마부석 옆에 앉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자.”

최강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에게 머그컵을 꺼내주었다. 후식으로 마시기 좋은 꽃차였다.

“호각 받았어?”
“네. 여기.”
“일 있으면 불어.”
“알겠습니다.”

지난 이동 과정에서 거듭 확인했지만, 말의 속도는 역시나 느릿느릿했다.

강하게 재촉하면 시속 20킬로미터 정도는 내는 것 같은데, 그런 속도로는 오래 가지 못하니 보통 50퍼센트 정도 속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다시금 길을 뚫던 최강혁과 마차의 일행은 점심 즈음 합류했다.
이미 휴식할 곳을 마련하고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낮이긴 해도, 숲속이다보니 공기가 차서 불을 피우는 게 좋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잤어?”
“덕분에 편히 잤습니다.”

엘리사벳은 나름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마부 일도 주변 경계를 동시에 하자면 정신적으로 피곤해지니, 헤인즈와 교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식사를 했다.
다시금 이동을 하고, 야영을 했다.
같은 방식으로 사흘을  가서야 에밀리아가 말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
“아... 맞아요. 가문의 소영지 중 하나였대요. 나무로 성을 지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죠.”

바위라면 좀 더 오래 남았을 텐데.
나무로 만든 성은 결국 누군가가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삭고 썩어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도 주춧돌을 비롯해 성벽의 일부 등등 몇몇 곳에 석재를 썼던 터라,  부분의 흔적을 토대로 가문의 땅을 유추할 수 있을 듯 보였다.

‘뭐, 그럴 필요도 없지.’

에밀리아에게 있던 서류 중에는 이런 저런 글과 그림이 그려진 것들이 있었다. 가문의 땅을 표시한 지도와 관련 자료였다.

‘너무 주먹구구식이긴 해도, 이것 저것 교차검증하면 각이 나오겠지.’

그곳에 묘사된 내용과 간략한 지도를 실제 지도에 대입하면, 최대한 정확한 토지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틀려도 상관 없어요. 어차피 그 주변이라고 해도 다른 이의 소유거나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
“국가 소유죠. 왕의 땅이요.”
“그렇구나.”

이곳도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라고 했다.
워낙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가문이 사라지거나 한  아니니 도로 회수해가진 않았던가보다.

‘넓긴 하네. 치울  많아서 그렇지.’

고성이 자리하고 있던 곳에도 이미 나무와 풀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었다.
최강혁은 일단 그곳부터 청소에 들어갔다.
야영캠프를 꾸리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헤인즈.”
“예!”
“이제 나무 좀 타나?”
“맡겨주십시오.”
“저기 저게 나아보이네. 일단 저기 올라가서 주변 살펴. 호각 챙기고.”
“알겠습니다.”

후다닥 달려간 헤인즈는 정말 그동안 열심히 했는지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나무를 올라갔다.

그렇게 마차와 사람들이 대기하는 동안, 최강혁은 두어 시간쯤 걸려서 캠프가 들어설 땅을 확보했다.

“이제 들어와.”

마차를 들여놓은 후, 청소 과정에 얻은 나무들을 활용해 울타리를 둘렀다.
기존에 자리하고 있던 석재들 중 일부는 그대로 활용하고, 나머지는 일단 루팅했다.

‘애초에 괴롭히려는 목적이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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