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090.
“이곳이 제가 아는 곳이 맞다면... 과거, 아주 비옥한 토지를 가진 영지였을 겁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했다.
나름대로 번성하고 있던 소영지.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몰락했다고.
이후로는 지명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고.
“사건?”
“몬스터 습격이라고 들었습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아주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왔다고....”
왕이 내려준 땅.
그 상징성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숲이 아니라 농작물로 가득한 평야지대였다고 했다.
“소영지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직할령이었죠. 영주로 앉힌 이가 은퇴한 기사였거든요. 기사들 사이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있었지만, 말을 끊을 필요는 없었다.
앞뒤 문맥과 더불어, 그동안 쌓인 데이터 덕분에 해당 단어의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유추해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최강혁이 원할 경우, 그는 말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문장으로 띄워볼 수 있었다.
마치 증강현실과 비슷했다.
그 역시 데이터 저장소와 연계한 도우미의 기능이었다.
아직은 오류가 날 때도 있지만, 조금씩 정보가 더해지고 보정되면서 완벽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토벌대를 보냈어요.”
이어진 이야기는 에밀리아의 입에서 나왔다.
본가의 주 병력에 더하여, 다른 소영주들에게서 끌어모은 병력까지 상당한 규모의 토벌대를 구성해 내려보냈었다고.
“하지만, 실패했죠.”
강한 몬스터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숫자였다.
“기록으로 남아있던 걸 우연히 봤어요.”
당시 아군의 피해가 상당해서, 사병들을 보냈던 소영주들의 반발이 심각했다.
“그들의 기사들도 많이 잃었으니까요.”
결국 소영주들에게 보상해주기 위해서 제대로 된 피해를 조사한 서류가 가문에 남아있었다는 것.
아버지를 따라 가문의 역사서들을 열람하다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새로 토벌대를 꾸릴 엄두도 내지 못했죠.”
“포기한 건가.”
“네. 나라에 반납하자는 의견도 있던 것 같지만, 일단은 갖고 있기로 했어요. 당시엔 의문점이 많았거든요.”
멀쩡하던 평야에 몰려와 터를 잡기 시작한 몬스터들. 아무리 그곳이 농경지대라고는 해도, 모든 몬스터들이 곡식을 먹는 건 아니었다.
혹여 어떤 사특한 마법이나 음모와 연관된 것이 아닌지 뒷조사도 해보았던 것 같지만, 그리 뚜렷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잊혀진 땅이 되었죠.”
“몇년에 한 번... 상황 파악을 위해서 정찰대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만.”
쉬쉬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니까.
게다가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면 차출된 이들의 사기가 떨어지거나, 아예 거부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나는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에밀리아가 그것을 기억한 건, 다름아닌 아까 전 발견한 어느 주춧돌 때문이었다.
그곳에 새겨져있던 문구가 왠지 낯설지 않아서 뇌리에 남아있었는데, 이제야 가문의 서류 속에서 보았던 지명임을 깨달았다고.
“경솔했어요. 당연히 쉬운 조건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좀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더 나은 선택을 했을 텐데.
“.......”
하지만, 만약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당시의 선택이 달라졌을까를 생각해보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진짜 괜찮은데.”
최강혁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이곳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다 알지 못해. 경계선 작업을 하는 동안 마주친 녀석들은 약한 놈들 뿐이었고.”
세월이 흘렀다.
당시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정도로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 녀석은 좀 달라.”
“네?”
“아는 놈이야.”
그는 숲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쁜 놈 아니야. 뭐,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면 공격 안 하고는 못 배길 생김새긴 한데.”
망루 난간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곧장 울타리 정문으로 향했다.
“문 닫아 걸어.”
“어쩌실 생각입니까!”
망루 위에서 눈을 크게 뜬 엘리사벳이 외쳤다.
“멀리 보낼 거야. 저 녀석도 그걸 원해.”
“......?”
마치, 몬스터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그런 말을 하는 가주의 모습에, 엘리사벳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헤인즈를 돌아보았다.
“그때하고 비슷해요.”
“그때?”
“곰이요. 분명 비슷하게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대화라니.”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헤인즈에게 뒤를 맡긴 후, 서둘러 망루를 내려가 가주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빠른지,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그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속도를 줄여주고 나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
“왜 따라와?”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
“뒤에 있어. 위험하니까.”
“그러니까요. 위험한데 어째서....”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멀리, 빼곡이 들어차있는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그긍....
마치 작은 동산과도 같은 시커먼 형체.
지난 번 보았던 거대한 곰의 가죽 같은 건 더 이상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혹시, ‘사냥꾼의 운’이라던 오우거일까?
행운이든 악운이든 만나는 순간 결정된다던데.
“적대감 보이지 마. 그거 안 좋아하니까.”
“...예?”
“친하게 굴어.”
“......?”
적대감을 보이지 말라니.
그녀는 제멋대로 떨리는 몸을 제어하려 노력하던 것 뿐이었다.
“안 되겠다.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
나직이 말한 최강혁은, 이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구나. 생각보다 더 크네. 이 거리도 안심 안 되겠다.”
“무슨....”
“뒤로 더 물러나. 저기까지.”
“저 바위 말씀이십니까?”
“어? 바위가 있었네.”
오히려 최강혁이 그쪽으로 달려가더니, 그 바위를 사라지게 했다.
“이쪽으로.”
“예.”
아무런 거리낌 없는 행동.
정말 그가 아는 몬스터일까.
서둘러 가주가 가리킨 곳까지 물러난 엘리사벳은, 이어서 그가 천천히 저 거대한 무언가를 향해 접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으으!”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가고 싶었지만, 가주의 명령이 있었다. 자칫 잘못 행동하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어.
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이런 거 좋아하냐?
그그긍....
정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나무들 사이에 멈춰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아래에서 뭔가가 뻗어나와 가주를 낚아챘다.
“...가주!”
-움직이지 마!
움찔!
이미 두어 걸음 나서고 있던 그녀는 길쭉한 밧줄 같은 것에 붙잡혀 허공에 들어올려진 가주를 보았다.
이미 반쯤 뽑혀나왔던 검을 애써 도로 꽂아넣을 즈음,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충 알겠다.
뭘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쪽으로 접근하던 그녀의 눈이 일순간 멍해졌다.
***
“다쳤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을 마주보며 말했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제각각 다르게 생긴 것과 비슷한 느낌의 차이였다.
[바위먹는자]
녀석이 이쪽 세상에도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촉수가 몇 가닥 안 남았어. 잘려나간 것들이 보이는데.”
거대한 바위몸통.
하지만 땅에서 거의 들리지 못한 상태로 비비적거리는 수준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몸을 들어올리고 이동할 촉수가 부족했다.
“이상하네. 다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의아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녀석을 스캔해보니, 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아보이진 않았다.
‘덩치는 크지만.’
몸에 붙어있는 바위 부분은 상대적으로 근래에 추가된 것으로 보였다.
그 아래에 자리한 몇가닥 안 남은 촉수 부분은, 애초에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작고 가느다란 느낌이 있었다.
“그럼 네가 아닐 수도 있겠어.”
아내의 본가에서 이곳을 포기한 이유.
몰려왔다던 수많은 몬스터들.
‘무슨 웨이브도 아니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일단 나무를 싹 제거하고 나서 조사해봐야 감이라도 잡힐 듯 했다.
다만 지금 이 녀석이 아니라면,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 범인일 수도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지. 어쩌면 놈들의 후손일 수도 있고.’
바위먹는자의 바위몸통 한 곳에 녀석과는 관련 없는 것이 하나 박혀있었다.
무언가가 할퀸 듯한 흔적 끄트머리에 꽂혀있는, 부러진 발톱을 발견한 것이다.
‘바위를 긁을 정도의 절삭력, 혹은 파괴력... 그래도 부러지긴 한다는 건가.’
대략 30센티미터.
그 끝에 엉겨붙은 살점을 보니, 단순히 부러진 것이 아니라 아예 뽑혀나온 듯 했다.
‘시간이 꽤 됐어. 발톱의 노화 상태를 보면 오히려 저게 더 오래된 몬스터 같고.’
아무튼, 이 녀석은 아니다.
물론 해롭냐고 묻는다면 반반이라 하겠지만.
‘상황이 안 좋아.’
그를 공격하진 않고 있다.
하지만, 녀석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혹시 오해라도 산다면 그의 몸에 촉수를 박고 체액을 빨아먹으려 들 것이다.
“이럴 땐 뇌물이지.”
바닥에 바위를 흘렸다.
그 옆에는 대형 욕조 하나를 꺼내놓았다.
꺼내자 마자 시큼한 비린내가 풍기는 건, 그 안에 몬스터의 피가 가득 차있어서였다.
“입에 맞을까 모르겠... 맞나보네.”
슬그머니 뻗은 촉수 하나가 마치 확인을 하듯 욕조를 건드리더니, 이내 그안에 푹 들어가 안에 든 것들을 빨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촉수가 적은 것 같기도 하고... 뭐, 몇 가닥 잘린 건 분명해보이는데.”
잘린 건지, 뜯겨나간 건지 불분명했다.
절단면을 보면 두 가지가 다 있었다.
“오.”
녀석이 그를 내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몬스터와 좋은 기억을 쌓은 건 녀석이 처음 같았다.
‘이 녀석은 아니지만... 친척이라고 칠까.’
거의 비어가는 욕조에 피를 더 채워주었다.
이러려고 쟁여놓은 건 아닌데, 잘 두면 쓸 일이 생기겠지 했더니 정말 생겼다.
“더 있으니까, 마음껏 먹어라.”
그동안 굶주렸을까.
피를 빨아먹고 있던 녀석의 촉수가 좀 더 굵어지고, 잘려나간 것들이 조금씩 최복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그 거대한 몸을 제대로 들어올릴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바위를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마치, 식탐이 심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여기에 계속 둘 수는 없으니.’
녀석의 몸통 위로 올라갔다.
근처에서 기겁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인근까지 접근하고 있던 엘리사벳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준 그는, 바위 틈새에 박혀있던 무언가의 발톱을 루팅했다.
“저쪽에서 온 것 같은데...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다가 끼어버렸구나.”
녀석의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그렇게 힘이 좋은 녀석인데도 단단히 뿌리를 박아내린 거목들은 어쩔 수 없었을까.
‘그나저나....’
동선을 보면 단순 이동이 아니었다.
뭔가에 쫓겨 도망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곳에 억지로 들어올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원인부터 해결해야겠지.”
이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전에, 도망친 이유를 찾아 해결해주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
사실 죽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잘만 사귀면 사람보다 나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 주변 몬스터들을 막아주는 역할도 해줄 수 있을 것 같고.
“엘리사벳.”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름 알아? 이 녀석.”
“처음 봅니다.”
“바위먹는자 라고 불러. 내 고향에선.”
“바위를 먹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주로 피를 먹지. 촉수 보이지?”
“예.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먼저 공격하는 성격은 아니야.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
“그런 몬스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있더라고. 그런 녀석이.”
최강혁은 바위먹는자가 왜 이곳에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녀석이 헤집고 들어오며 생겨난 숲속 통로와, 그 좌우 나무들이 망가진 모습을 가리키기도 했다.
“도망친 거야.”
“그렇다면....”
“아마 그 놈들 같아. 확인해봐야지.”
“굳이 확인해야 할까요?”
“왜 이 땅을 콕 집어서 내밀었을까?”
엘리사벳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