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110.
“마나 회복력이 좋아요. 감응력도 좋고, 제어 능력도 나이에 비해 놀라운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그릇이 작아요.”
“마나통?”
“통... 이라고 표현하면 좀 우스꽝스럽긴 한데, 그릇보다는 그게 더 어울릴 수도 있겠네요.”
웃음을 참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한 켠에선 브랜든이 의자에 앉은 동생의 어깨를 보듬으며 경청하고 있었다.
“보통은 자신의 그릇을 다 채우고 나면 회복을 멈추게 돼요. 회복이 아니라 성장을 향해 움직이죠. 스스로의 그릇을 점점 넓혀가는 데에 마나를 쓰는 거예요. 자연적으로요.”
“그게 안 된다는 거야?”
“아주 막힌 건 아닌 것 같지만... 축복의 종류가 다른 것 같아요. 원래대로라면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아야 할 마나가 계속 몸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그릇을 제대로 넓히지도 못했는데 계속 부어지니, 결국 넘치게 된다는 것. 그것이 에밀리아의 해석이었다.
“그동안 벌어졌던 현상은 그렇게 몸 밖으로 넘쳐버린 마나가 일으킨 일이죠. 아마... 이런 식이었겠지?”
에밀리아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곳에서 은은한 푸른 빛의 마나 줄기가 뻗어나와 마치 부드러운 채찍처럼 이리 저리 휘둘러졌다.
형제가 비슷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손에서 나온 건 아니었지만....”
“그렇겠지. 제어가 제대로 안 되었다면 온 몸에서 나왔을 거야.”
에밀리아가 마나를 거두었다.
그리고 남편을 보았다.
“해결책까지는 아니어도, 해당 현상을 막을 방법은 당신이 제시해준 게 최선 같아요.”
마나그릇이 가득차기 전에 어딘가로 배출하는 것.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는 여러 모로 나은 방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릇을 키울 순 없는 거야?”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요. 일단 다들 영양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몸부터가 정상이 아니니 변수가 많다고.
그녀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밀튼의 체중은 40킬로그램이 겨우 넘었었다. 그나마 잘 먹여서 지금은 42정도였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긴 하지만, 밀튼의 형도 그런 거겠죠?”
“아마 맞을 거야.”
187의 키를 가진 브랜든은 현재 체중이 고작 55킬로그램이었다.
먹여서 그정도였으니, 몸상태가 어떤지는 굳이 스캔을 하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났다.
“착한 녀석들이야.”
“그래보이네요. 데려가고 싶은 거죠?”
“반대한다면 다시 생각할게.”
“벌써 데려와놓고.”
픽 웃은 그녀는 헤인즈를 불러 둘의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 교육과 생활을 부탁했다.
“오! 드디어 신참이 왔.......”
헤인즈는 농담처럼 떠들며 가까이 다가가다 멈추었다. 옷 사이로 드러난 브랜든의 앙상한 몸을 보자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듯 했다.
“막 움직이면 아프다고 했지? 당분간은 몸부터 만들자고.”
“어... 고맙습니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라. 우리도 가주님 덕분에 먹고 사는 거니까. 너도 이쪽으로 와. 수련 막사 구경시켜줄게.”
그렇게 두 소년이 합류했다.
당장은 식비 상승의 주범이 될 뿐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제 몫을 할 때가 올 것이다.
“배터리 충전만 시켜도 그럭저럭 밥벌이는 되지 않을까?”
“설마, 그거 생각하고 데려온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넘치는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했을 테니까요.”
낡아빠진 판자집 정도라면 벽을 부수었을 수도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직 초기거나, 애초에 상태가 안 좋아서 넘치는 양도 적었을 수 있다고.
그러던 그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오전에 용병단에서 사람이 왔었어요.”
“붉은 도마뱀?”
“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더니, 몇 사람이 영주성 병사들에게 잡혀갔다는 모양이었다.
“왜?”
“어제하고 오늘, 수상해보이면 그냥 잡아갔었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었지. 근데, 용병단은 정식 신분으로 인정되지 않나?”
“그럴 것 같은데, 이상하긴 해요. 그쪽을 수습하느라 조금 지체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음... 별 일 없겠지.”
넉넉하게 일주일을 준 거니까, 그 안에는 해결하지 않을까. 더 지체된다면 의뢰비를 깎겠다고 하니 문제는 없을 것 같고.
“일단... 식사부터 준비해야겠군.”
막사 밖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로비로 들어간 그는 그곳에 이런 저런 식자재와 조리대를 꺼내놓았다.
“돌아갈 때 루팅만 잘 하면 되는 거잖아.”
사람을 고기처럼 썰어대서일까.
다른 쪽으로 칼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상쇄가 되진 않겠지만.’
기분이라도 풀리면 다행이고.
아니면 별 수 없고.
‘어떻게 하나.’
인벤토리에 있던 죽은 자들의 몸은 이미 도우미가 나서서 붙여놓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묻거나 태우는 쪽이 될 텐데... 종교적인 방법이 있는지 에밀리아한테 물어봐야 할까.’
묵직한 중식도를 꺼냈다.
피와 냄새를 제거한 멧돼지고기 갈빗살을 잘게 썰고 온갖 양념과 과일, 육수 등등을 끓인 양념수에 담가놓았다.
‘여기 온도 정도면 실온 숙성도 괜찮겠는데.’
숙성이 두어 시간 필요하다.
겸사겸사 그 과정을 데이터로 확보해두려는 목적도 있었다.
‘숙성’과정을 확보하면, 다음에는 인벤토리에서 조합스킬을 활용할 때 써먹을 수 있었다.
‘어떤 매커니즘인지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지.’
말이 조합이지, 사실상 만능 스킬 아닌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방법도 많을 것 같은데.
‘근데 이거, 계란 대신 써도 되는 건가?’
시장에서 구입한 알들.
무슨 알인지는 몰라도, 식용으로 쓰는 건 맞는 것 같았다. 스캔해보니 성분비도 흡사하고.
‘일단 써보지 뭐.’
그는 비슷하게 구한 재료들을 모아 마요네즈를 만들었다.
적당한 비율을 찾기 위해서 소량씩 시도해본 후, 그럭저럭 괜찮다 여겨지는 레시피를 데이터로 남겨놓았다.
‘이제 샌드위치에도 조금씩 넣어야지.’
케찹도 만들고 싶지만, 토마토를 찾지 못했다.
차라리 다람쥐들을 동원해 그쪽에서 찾아보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어보였다.
‘그러고보니.’
녀석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안 들린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는 해도, 왠지 궁금해져서 확인해보니 정말 별 일 없었다.
“불도 얼추 다 껐네.”
-조력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열려있는 화면에도 보였다.
수십 마리의 다람쥐들이 있었다.
녀석들은 그의 다람쥐가 물가를 오가며 불을 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들의 이동을 돕는 와중 곳곳에 숨어있던 동족들을 함께 구해내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들도 보이고.”
고작 다람쥐들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최강혁은 어느새 제법 늠름하게 자란 새끼 새들을 보았다.
이제는 어미의 모습도 언뜻 느껴져서, 더 이상 새끼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녀석들은 원래 다람쥐도 먹을 텐데.”
-상대적으로 높은 지능을 가진 개체들이 서로 협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공동의 위기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하긴. 숲이 불타고 있지. 인간들도 떼로 몰려왔고.”
새들은 다람쥐들을 주변에서 지키며 보호해주기도 하고, 또 그가 운용하고 있는 다람쥐들을 들어다 물가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근데, 어미가 안 보이네.”
-부상을 당한 듯 보였습니다.
“부상?”
-유탄 파편에 맞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 부상이야?”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수준입니다. 현재, 둥지에서 회복하고 있습니다.
“고기가 많이 필요하겠네. 좀 전해줄까.”
새로운 지시 사항을 넣으려면 기존 행동 패턴에 변화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일하고 있는 녀석들은 그대로 두고, 작은 핵 하나를 더 써서 추가로 다람쥐 한 마리를 구입했다.
‘동물 접속은 루팅 안 해도 된댔나?’
문득 지금 꺼내놓은 것들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최근에 테스트해봤던 게 기억나서 안심했다.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와 달리, 동물에 들어가 그쪽으로 다녀올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갔다.
‘이쪽이라고?’
원래 있던 둥지가 아니라서 찾는데 살짝 애먹었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그 둥지엔 한쪽 옆구리가 길게 찢겨나간 채 그을려있는 어미 새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녀에게 제스쳐를 보였다.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예전에 있었던 인간이 나라고.
‘알고 있다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의 대답에 당황했다.
‘어떻게 알아?’
하지만, 어미새는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알 수 있다고 했다. 형체도 냄새도 다르지만, 그를 느낄 수 있었다고.
‘뭐지. 영혼이라도 보이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짐승들이 그걸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아무튼... 괜찮은 거야?’
어미새는 화가 난다고 했다.
괜찮다는 뜻이다.
하지만, 숲이 괜찮지 않다고 했다.
특히 북쪽이 시끄럽다고.
‘북쪽?’
이어서 어미새가 뭔가를 말했다.
가용 어휘가 많지 않은 새들의 언어라서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북쪽에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이 뭔가 했다는 거군.’
그 일의 여파로 그쪽의 짐승과 몬스터들이 날뛰며 다른 영역까지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
‘꽤 효과 좋은 방법을 찾은 모양이야.’
이거, 인간들을 응원하는 입장이라면 쾌재를 불러야 할 상황이다. 이제야 비로소 이 숲을 제대로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애매한 기분이네.’
같은 인간을 응원해야 하는 게 맞나?
아니면 1년여 시간동안 함께 지낸 이웃들을 편들어야 할까.
처음에야 개고생했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제법 친해진 이들이 많은데.
‘하긴. 지금 편들어봐야 다람쥐일 뿐인데.’
그들도 기대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어미새도 단지 대화를 하고 있을 뿐, 뭔가를 부탁하거나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미새 앞에 두툼하고 소화 잘 되는 고기 부위를 놓아주었다. 잘게 조각냈으니, 삼키는 데에도 문제 없을 것이다.
꾸룩.
‘동쪽 왕? 그쪽이야 당연히 괜찮겠지.’
마지막에 본 모습은 혼자서 거처에 늘어져있는 광경이었는데, 어미새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은 추종자들이 예전보다 더 많이 늘어났다는 모양이다.
‘가만히 있어도 부하들이 생기곤 하니까.’
숲의 왕이라는 게 그렇다.
그저 존재하는 것 만으로 세력이 생겨난다.
‘간만에 인사나 하고 나가야겠다.’
그쪽으로 가보았다.
예전보다 좀 오래 걸린 건 다람쥐의 몸이어서 그런 것도 있고, 중간중간 나무들이 쓰러진 탓에 직선으로 가지 못해서 그런 탓도 있었다.
‘이쪽도 아주 평화롭지는 못하구나.’
자잘한 사체들이 보였다.
무언가가 뜯어먹고 남은 듯 보이는 것들도 있었고, 쓰러진 나무에 깔려 죽은 짐승들도 적지 않았다.
이윽고 동쪽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느낀 건, 마치 콘웨이 상회를 앞두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공기였다.
‘여기가 더 심한데.’
들어가면 좆될 것 같은 느낌.
이미 곳곳에 숨어있는 여러 몬스터들의 존재도 파악해두었다.
하지만 역시나일까.
그 한쪽에서 경계망이 조금 열렸다.
그를 알아보는 건 이쪽 녀석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나인 걸 아는 건지, 아니면 이웃이라 협력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왕이 있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예전에 그가 만들어주었던 숲 속 공터가 적잖게 변한 모습을 보았다.
‘역시. 풀들이 솟았네.’
잡초들이 무성했다.
인간들에게라면 성가실 정도의 높이였지만, 왕에겐 아니었다.
공터는 여전히 햇살이 가득 비치고 있었고, 그 중앙에 자리한 나무 기둥은 얼마나 등을 비벼댔는지 껍질이 벗겨져 맨질맨질해진 모습이었다.
‘멀쩡할 리가 있나.’
자다가 뒹굴기라도 한 건지, 뒤쪽의 동산이 무너진 것도 보였다.
하긴, 만들 때부터 그리 오래 가진 못할 거라고 짐작은 했다.
크흐응.
왕은 무너진 동산 앞에 직접 파놓은 듯한 작은 구덩이에 엎드려있었다.
“.......”
다람쥐다보니 키를 훌쩍 넘기는 잡초들 사이를 어렵게 헤치며 다가가고 있는데, 당연하게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푸흥- 하며 입바람으로 잡초들을 눕혀주었다.
찍.
크릉.
다행히 구덩이 근처엔 풀이 없었다.
왕이 앞발만 얹어도 짜부러질 참이라, 적당히 먼 거리에 멈추었다.
‘아는구나.’
확실해졌다.
어미새도, 지금의 왕도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했다. 겉으로 보이는 작은 다람쥐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최강혁을 알아보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감을 못 잡겠지만, 그래도 상대가 반가워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