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121.
“그 엘프가....”
“응.”
에밀리아는 궁금한 게 남은 듯 했다.
“인간을 싫어하지는 않았나요? 아까 영상 보니, 적어도 당신에겐 친근했던 것 같지만요.”
“흐음. 첫만남이 좀 격하긴 했지만, 적대하진 않았어. 오히려 반가워했지.”
숲에서, 그가 설치한 크레모어트랩에 다리를 다친 엘프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두 손을 들어보이며 적대의사가 없음을 알려주었다.
-이봐! 살려줘!
당시 알레이스의 외침이 기억났다.
최강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 대해서도 그런 느낌은 못 받았어. 이런 저런 대화를 많이 했거든.”
“어떤 분일지 궁금하네요.”
에밀리아는 엘프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엘리사벳이 보았다던 노예 엘프는 그녀와 함께 하기 전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음. 일단 준비부터 할까.”
짐부터 꾸렸다.
떠나기엔 애매한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하룻밤을 더 자고 가기도 좀 그랬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개인들의 짐이라 할 만한 건 거의 없었고, 대부분 그의 인벤토리로 들어가니 단촐해졌다.
마차에 실을 만한 것들은 짐보다는 좀 더 편하게 가기 위한 깔개나 이동 중 수면을 위한 담요, 베개 등등이었다.
올 때보다 사람이 두 명 늘어났지만, 말도 한 마리 더 늘어난 터라 짐마차 한 대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예 차양막을 제대로 치는 게 좋겠구나.’
지금은 단순한 짐마차다보니 지붕이 없어서, 한낮에는 각자 알아서 햇빛을 가리든 해야 했다.
그는 트럭에서 과일을 팔던 이들을 떠올리고, 짐마차에 그것과 비슷한 철제 프레임을 추가해보기로 했다.
‘가죽보다는 전투복천이 낫겠지. 이런 곳 말고는 딱히 쓸 데도 많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새 마차 한 대와 두 대에 쓰일 차양막 프레임 등등이 조립되는 동안, 그는 설치해두었던 막사들을 해체하고 루팅했다.
그 모습으로 그들이 떠나려는 것을 알았는지, 캠프 사무실에서 담당자가 찾아왔다.
“...아니, 이게 뭐요?”
그를 데리고 지하 창고를 보여주었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이거 쓰시고 싶으면 그냥 두고, 아니면 원상복구하겠습니다.”
“잠깐 봐도 됩니까?”
“어차피 여기 땅인데요.”
“아. 그런가.”
다시금 뒤돌아 계단에서부터 꼼꼼히 살펴본 담당자는 내부의 벽이나 기둥, 천장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바닥을 두 발로 굴러보기도 했다.
“튼튼하군. 대충 파낸 게 아니야.”
“다시 메울까요?”
“아니오. 아닙니다. 그냥 저희가 쓰지요.”
이정도면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줘야 할 상황이라며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도 별도의 창고나 대피소가 필요하긴 했다고 말이다.
“음. 이쪽 구역은 대여 불가로 정해둬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담당자는 다음에라도 그들이 이곳에 방문한다면 그곳을 전용으로 내어주겠다고 했다.
“무척 좋은 창고를 만들어주셨으니, 마땅히 공유해야지요.”
“그러면 저희도 좋죠.”
잔금을 치르고 캠프를 떠났다.
도시에서 더 살 게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차양막도 문제 없이 고정됐고... 튼튼하지?”
“예. 좋습니다.”
“짐마차였는데, 객마차가 되었어요.”
헤인즈와 베티가 한마디씩 했다.
평소 마부석이 아니면 짐 사이에 대충 끼어앉아야 했던 그들은, 집으로 복귀하는 중임에도 마차에서 적당히 누워 갈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어색한 듯 보였다.
“개인교사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어?”
에밀리아에게 물었다.
그녀가 턱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쪽, 이거 어떻게 안 되는 거예요?”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그의 오른쪽 허벅지였다.
웅녀의 안장에 의자가 하나뿐이지만 같이 타고 싶다고 해서, 그녀를 그의 다리 사이에 태우고 안쪽 허벅지에 옆으로 앉혔다.
그런데 웅녀가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는 동안 아무래도 마찰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모처럼 맡은 그녀의 향기와 체취 때문일까.
이래저래 그로 인한 여파가 나타난 모양이다. 그게 그녀의 엉덩이와 다리 쪽으로 느껴지는 중이고.
“자연스러운 거야. 받아들여.”
“아....”
에밀리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려는지, 후드를 더 올려쓰며 입을 열었다.
“개인교사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몇 사람 만나보고 나니까 성에 안 차기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생각해보니까, 당신이 배우는 속도에 안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요. 한번 고용하면 장기 계약을 해야 할 텐데, 일찌감치 필요 없어지면 곤란하니까.”
“그것도 그렇겠네.”
“대신에... 책을 여러 권 샀어요.”
“책?”
“네. 내가 읽어주면서, 단어를 가르쳐줄게요.”
“좋은 생각이야.”
그냥 다 좋은 것 같다.
슬쩍 에밀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는 왼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와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
움찔 놀란 에밀리아가 마차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곳보다 높이가 낮기도 하고, 차양막을 설치하느라 난간을 더 높여서 볼 수 없는 각도였다.
애초에 등을 돌리고 있기도 했지만,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자신의 로브 밑자락을 들어 그의 손과 팔을 가려 덮었다.
‘쟤들만 잘 먹어야 할 게 아니네.’
로브 안쪽의 얇은 천옷을 살짝 들추고 손을 넣으니,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이 만져졌다.
앉아있는데도 접히거나 하지 않는 허리가 신기했지만, 거칠어진 손으로 만지려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앗.”
순간 소리를 내려던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왔다.
부드러운 아랫배를 지나 배꼽 근처를 놀던 그의 손가락이 그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어서였다.
“미안해요.”
그 때 에밀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뭐가?”
“당신한테 다 떠넘긴 것 같아서.”
그의 귀에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후회했어요.”
“쉬웠어.”
“그래도. 그래도요.”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만지던 그녀는 자신의 손을 포개어 그의 손에 겹쳐보기도 했다.
“악몽을 꿨어요.”
“왜?”
“몰라요. 당신이 없으니까. 아마도.”
떨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부재를 떠올리고 있는 건지.
‘그랬나.’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연인에 대한 애틋함과는 다르다고.
아마도, 지켜줄 보호자가 사라진 아이가 느끼는 공포심과 비슷한 것 아닐까 하고.
‘엘리사벳이나 헤인즈도 있긴 한데.’
덕분에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그녀가 마법사인 것도 이유였다.
적어도 스스로를 지킬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그게 아닌 건가.’
사실 그가 없었던 때와 다를 게 없는 건데. 있었다가 없는 건 많이 다른 모양이다.
‘하긴. 나도 좀 그랬지.’
사실 좀 귀찮을 때도 있었다.
마치 정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베개를 두고도 그의 팔을 베고 자는 모습이.
처음에야 좀 뿌듯하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하고 좋았지만, 며칠 지나니까 팔도 저리고... 조금 따로 자고 싶고 그랬던 기억.
하지만 혼자 나와 있으니, 그 때의 귀찮음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심지어 로비로 들어가 한숨 푹 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아니겠지.’
그저 상실된 것에 대한 갈증 같은 걸까.
어느 정도는 의존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뭐 어떠냐. 좋으면 된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잡념을 적당히 날숨에 실어 내보낸 그는 다시금 들려온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뭔가 해주고 싶어요.”
“음?”
“나도 당신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흐음.”
“원하는 거 없어요?”
“많지.”
“...많아요?”
“일단은....”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했다.
그녀가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그걸 왜 입으로?”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강요는 아니니까.”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어깨를 움츠리던 에밀리아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두근거림이 손을 통해서 느껴질 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
말들은 확실히 느렸다.
짐마차를 추가하고 잘 수 있게 만든 건 좋은 선택이었다. 바퀴축에 자리했던 다소 어설픈 형태의 스프링을 개량한 것도 꽤 도움이 되는 것 같고.
‘현대의 자동차 정도로 스무스한 충격흡수는 어렵지. 길 자체도 그렇고.’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을, 잘 자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마부 역할을 맡은 엘리사벳과 헤인즈만이 두 눈을 또렷하게 뜨고 있었다.
잠은 복귀해서 교대로 자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중간중간 베티와 루시아로 교대시켰다.
급박한 상황의 기마술이라면 몰라도, 단순히 말을 몰고 가는 정도라면 두사람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처음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앉아있던 에밀리아는 점점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이제 거의 고목에 붙는 것처럼 기대어 자는 중이었다.
분명 불편할 텐데도 잘 자는 것을 보니, 그동안 잠을 설친 게 맞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정작 신경써줘야 할 부분을 놓치고 있었네.’
메이드들의 옷이나 속옷, 양말, 사는 곳 등등을 바꿔주기도 하고, 사람들의 편의 시설을 추가하는 등 나름 큰 공사들을 여럿 했다.
하지만 정작 아내의 옷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괜찮아보였기도 하고, 다른 쪽이 워낙 급해보이기도 했고.
‘사이즈는... 살이 오히려 빠졌어?’
예전 스캔 데이터와 비교해보니 확실했다.
‘먹는 것도 제대로 못 한 건가.’
의외로 키는 조금 자랐다.
예전에는 아침에 봤을 때 174.2정도 나왔는데, 지금은 아침이 아닌데도 174.7이라고 떴다.
‘아직도 성장 중인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직 만으로 19살이라고 했으니.
‘내가 각성 전이었으면, 에밀리아보다 키가 작았겠구나.’
173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 크는 것보다 그가 자란 키가 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적당히 멈출 수 없나? 요즘은 좀 더뎌지긴 한 것 같긴 한데....’
전투 상황을 생각하면 덩치가 큰 쪽이 유리할 때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크기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싶다.
‘몬스터보다 커질 것도 아닌데.’
지금 수준 정도로 멈추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강화 부위를 특정해보는 것도 좋겠고.
‘얼굴.’
잘생겨지면 좋지 않을까.
근데 이 덩치에 얼굴이 잘생기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을까? 모르겠다.
“우웅....”
그의 허리와 배에 옆으로 기대고 있던 에밀리아가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듯 얼굴을 부비며 두 팔로 그를 안았다.
하지만 곧 두 팔에 힘이 풀려서 아래로 축 늘어뜨리는 모습에, 그는 조심조심 그녀를 옆으로 안아 들고 팔과 어깨로 등받이와 베개를 대신했다.
그릉.
텁.
웅녀의 짧은 콧소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건 나름 된 일이었다.
녀석의 코 앞 허공에 고깃조각을 꺼내주니, 역시나 덥썩 낚아채곤 질겅질겅 씹으며 걸었다.
최강혁은 도우미와 대화했다.
할 수 없이 미뤄두었던 것들을 정리해보는 중이었는데,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결론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다.
‘초미세공정을 그대로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구나.’
일단 씨피유의 복제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서 이해했는데, 이후에 들어보니 나머지 부분으로도 역량화가 되어서 속도가 몇 배로 늘었다는 게 이상했다.
그러면 손상되지 않은 부분이 분명 있다는 건데, 그 부분을 기준으로 증식하듯이 하면 되지 않나.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손상되지 않았어도, 그대로 복사하듯 찍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같았다. 아직은 말이다.
‘능력 부족이라면 할말 없지.’
단순한 물질 복사 개념, 혹은 복잡하지 않은 구조의 사물 제작 정도라면 문제가 없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컴퓨터 씨피유처럼 미세한 것들을 제작하는 건 현재 그가 가진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오해할 일... 있긴 하겠네.’
어느 쪽으로 이야기하든 반대쪽 상황이 오면 불만이 생겼을 것이다. 차라리 일찍 알아낸 게 다행이었다.
‘리버스 엔지니어링 맞지?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
아무리 좋은 샘플이 있어도, 그것을 재현할 기술력이 없다면 똑같이 만들 수 없다는 것.
‘애초에 금덩어리도 복사하면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미세공정의 여부인 걸까.
‘어차피 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끝이 없는 거 아닌가? 결국 분자에 원자에 막 그렇게 되는 걸 텐데.’
못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못하게 막아놓은 건 아닐까. 밸런스 패치네 뭐네 하면서 총이고 뭐고 못 가져오게 막았던 것처럼.
‘각 단체의 모토 차이였던 것 같은데. 여러모로.’
‘이세계 결혼 주선업체’ 쪽은 밸런스 패치 명목으로 거의 몸만 보내려던 걸 보면, 결혼 외의 다른 변수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반면 ‘더블피스 동물보호협회’의 성향은 아마 무슨 짓을 하든 동물을 지키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해당 지역에서 뭘 루팅하든 신경 안 쓰는 것 같고.
‘근데 내가 동물을 안 죽이는 건 또 아닌데, 그쪽으로는 항의가 안 오네. 식물 보호 단체들은 평소에도 엄청 시끄럽게 굴던데.’
고개를 저었다.
이러쿵 저러쿵 따져봐야 결과가 달라지진 않으니, 그저 받아들이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연구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알아보는 것도 그런 측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