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123.
“그러면, 배후왕은 아주 오래 전에 죽은 게 맞습니까? 그 반란은 실패해서 죽었고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저분이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더 있어요. 그 반란이 실패했지만, 여전히 배후왕의 핏줄이 남아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마 30년쯤 지나서일 거예요. 조용히 세를 불린 생존자들의 가문이, 기어코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무너뜨렸죠.”
지금의 제국은 그때부터 이어져오고 있다고 했다. 벌써 100년이 아니라 그 두배는 된 일이라고.
“그러면 여기 대공은....”
“역사적으로 보면, 배후왕의 후손이 되겠죠.”
“아.”
그러면 됐다.
애초에 문제될 게 없는 일이었나보다.
“그나저나....”
“네.”
“저 친구, 나이가 몇 살입니까? 정확히.”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예?”
“저보다 훨씬 많다는 것만 알죠.”
“그쪽은... 아닙니다.”
“저분이 나이를 말한 적이 없었나요?”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더군요.”
“그건 맞네요.”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다.
조금은 허탈한 듯한 웃음이었다.
“적어도 100살은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도 맞긴 하네요. 그건 넘었으니....”
“얼마나 많이 넘었습니까?”
“적어도 다섯 번. 많으면 열 번.”
“.......”
“힘든 일일 거예요. 그 모든 시간을, 혼자서 감당한다는 건.”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다시금 표정을 고쳐 단호한 얼굴로 돌아왔다.
최강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가족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네. 다시금 감사해요.”
“지금 바로 데려가실 거죠?”
“그래야죠. 또 언제 몰래 뛰쳐나올지 모르겠지만요.”
“아. 그리고... 그, 세계수의 씨앗 이야기는 뭐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떤....”
“태풍 이야기 말입니다.”
“아. 그거요.”
그녀가 또 한 번 웃었다.
“그건 배후왕보다는 얼마 안 된 일이었어요. 태풍에 씨앗이 날아간 건 맞아요. 많은 이들이 찾으러 나갔고, 고생 끝에 결국 찾아서 복귀했죠.”
그녀가 알레이스를 보았다.
“바로 이분이요.”
최강혁도 그를 보았다.
“뭐야. 지가 찾아놓고 잊어버렸어?”
“뭘?”
“세계수 씨앗. 언제 찾았어?”
“찾았어? 이야, 재주 좋네. 누가 찾았대?”
천연덕스럽게 웃는 알레이스의 얼굴.
왠지 이제는 예전처럼 정겹지 않고 조금 슬픈 느낌이 들었다.
“...내가 조언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 정도로 엉망이면 그냥 보내주는 게 어때? 한참 전에 지나간 기억들이잖아.”
“안 돼.”
알레이스가 표정을 바꾸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무겁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난 기억해야 해. 나라도 잊으면 안 돼.”
“어차피 기억 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잊지 않았어. 당장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이 나. 그거면 괜찮아.”
그의 여동생은 침울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저런 모습을 많이 본 것 같았다.
그녀가 최강혁을 보았다.
“첫 번째 바깥 활동이었을 거라고 했어요. 모두가 잊어버린 오랜 옛날 일일 거라고. 그 때 뭔가 아주... 소중한 기억을 만든 것 같아요.”
“망각이라는 거, 원하는 것만 골라서 지우진 못하는 겁니까?”
“네. 그렇게는 안 돼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차례대로 지워져요.”
“포기를 못 하는 거군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기억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그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억을 계속 쌓아오고 있다는 것.
온갖 기억들이 뒤죽박죽되어버린 상황이지만, 지우라는 말에는 저렇게 조건반사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실 놀라운 일이예요. 다른 엘프들이었다면 벌써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고도 남았을 텐데... 버티고 계시니까요.”
“그래도 한계는 있겠죠.”
“네. 아마도요. 더 심해지면 정말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노망처럼 될 거예요.”
그녀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지금은 그저 숲으로 모시고 가서 최대한, 특별한 활동 없이 평범하게 지내게 해드리는 게 최선이죠.”
“새로운 기억 없이, 일상만 이어가게 하는 거군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배려랍니다.”
“이해합니다. 뭐, 저렇게 묶은 것까진 잘 모르겠지만요.”
알레이스의 목 아래부터 무릎까지 꽁꽁 묶어놓은 꼴을 보며 웃으니, 그녀가 비슷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보기보다 강하시거든요. 제대로 묶지 않으면 또 언제 달아날지 알 수 없어요.”
“그렇군요.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걸립니까?”
“고향까진 멀지만,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령의 문이 있어요. 그게 어디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정령의 문?”
“모르시나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유명할 텐데.”
“말씀드렸지만, 엘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딱히 비밀은 아니라며 그것을 설명해주었다. 엘프와 정령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세상 곳곳을 연결해주는 통로라고.
‘워프 포탈 비슷한 건가? 부럽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등을 보인 채로 먼 산을 향하고 있던 알레이스를 보았다.
“어이.”
“응?”
“고향에 가야 될 모양이야.”
“그래야겠지. 이렇게 잡혔으니.”
“동생들 말 잘 들으셔. 괜히 또 뛰쳐나와서 가족들 걱정시키지 말고.”
“에이. 내 걱정을 누가 해? 모두 인간들 죽이기 바쁜데.”
“......?”
“돌아가야지. 전쟁을 끝내야 해.”
초점이 조금 풀린 눈.
하지만 곧 평소대로 돌아온 그가 빙긋 웃었다.
“그거 알아? 너한테는 그 냄새가 있어. 그 때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
“냄새난다고?”
“다음에 보자고. 친구.”
“오지 마. 내 이름이나 기억하는거야?”
동생과 함께 멀어지고 있던 알레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최강혁!”
“오....”
“이상한 이름은 결코 잊지 않지.”
“빨리 데려가세요.”
쿡쿡 웃던 여자 엘프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때, 알레이스가 또 뒤를 보았다.
“얘 내 여동생.”
“알아.”
“소개시켜줄까?”
“무슨 소리예요!”
“얘는 안 되나보다. 다음에 다른 애 데려올게.”
“하하. 오지 말라니까. 그리고, 헷갈릴 것 같으면 평소에 따로 적어둬! 머리가 딸리면 몸이 고생해야지!”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둘의 모습이 숲 속으로 사라졌다.
최강혁은 언제 왔는지 옆과 뒤에 서있던 이들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었어요?”
“걱정한 대로야.”
“정말... 노망이예요?”
“엘프도 노망이 납니까?”
“글쎄. 스스로 자처한 거니까, 노망이라기보단 고집이라고 봐야겠지.”
“고집....”
“누구나 버리지 못하는 게 있는 모양이야.”
조금은 무거운 웃음을 지은 최강혁은 마차를 헛간으로 인도하고 짐 정리를 도왔다.
‘당분간 또 바빠지겠구나.’
새 헛간을 지어야 한다.
말이 두 마리가 된 데다가, 웅녀가 지낼 곳도 필요하니까.
‘선견지명이었나... 하긴, 원래 대비하긴 했지.’
종자가 두 명 늘긴 했지만, 수련장 쪽 부속건물엔 아직 빈방이 더 있어서 문제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간 여유가 되면 추가로 건물을 지어야 할 듯 했다.
‘떠날 일이 안 생기면 말이지.’
아무래도 도시에 편의시설 같은 게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더 편한 건 집이어서일까.
아니면 조용한 숲 속의 평화로운 느낌 때문일까.
“이것 저것 할 게 많지만... 다들 샤워부터 하자고. 씻고 먹고 자자.”
“예, 가주님.”
“빨리 가요!”
모두 샤워실로 달려갔다.
두 종자도 덩달아 함께 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오른팔을 붙잡고 있던 아내를 돌아보며 난감해했다.
“이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깜빡했다.”
“......?”
“으음. 아니야. 아무것도.”
이마에 손을 얹고 있던 그는 짐짓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
“어, 언제 그걸.”
“음? 뭐가.”
“풀 수 있었던 거예요?”
몸을 묶고 있던 나무줄기가 사라진 알레이스는 여동생의 물음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것보다, 이 마나 구속 좀 어떻게 안 될까?”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돼요.”
“안 도망갈게. 진짜야. 나 그런 남자 아니다.”
“벌써 수십번이나 도망쳐놓고.”
“없는 일을 만들지는 말자. 양심적으로.”
“하아....”
한숨을 쉬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 없이 뽑아든 장검은 그 검날이 유백색으로, 빛을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흡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냐?
-나 아니야. 저새끼겠지.
-시발. 나 맞나본데.
-아무튼 걸린거잖아.
평소 사용하지 않던 정령의 문이었다.
건너가면서도 별로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인근에 매복 중인 자들이 있었다.
노예사냥꾼들이었다.
“동족을 배신하다니....”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노려보는 방향은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는 인간들 저편, 무표정한 얼굴의 엘프를 향하고 있었다.
“글쎄. 배신이라는 건 믿음이 있을 때나 하는 이야기 아닌가. 애초에 그런 관계를 형성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느 숲이지? 에델레슨인가요?”
“굳이 밝힐 이유는 없을 것 같고... 내 몫은 확실히 정산하라고.”
“걱정 마슈.”
“진짜 엘프들이잖아. 월척이라고.”
“얼마짜리야?”
“몰라. 팔려야 알지.”
전방에 세 명, 양 측방에 두명, 어느새 후방까지 점한 이들. 이젠 들어왔던 정령의 문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마나 구속. 풀어 빨리.”
“못 풀어요.”
“억지 부릴 때가 아니야.”
“나도 풀고 싶지만... 스크롤이었다고요. 하루가 지나기 전엔 안 풀려요.”
“엥?”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가만히 있어요.”
“혼자선 무리야. 저 놈 분명 오케르탄인데. 방관하는 것 같아도 불리할 것 같으면 끼어들걸.”
“오케르탄? 그게 언제적 사라진 자들인데....”
하지만 알레이스가 또 과거를 혼동한다고 여겼던 여동생이 눈가를 좁혔다. 멀리 떨어져있던 상대측 엘프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다고요? 분명....”
“한 집단을 몰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특히 동족일 땐, 어떤 식으로든 동정심이 생겨나지.”
알레이스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인간 무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마치 짐승을 포획하려는듯한 그물을, 다른 이들은 제각각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이런....”
그의 여동생이 당황했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마저 마법을 행할 수가 없었다.
정령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 또한 입장이 갈려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분명 저쪽의 엘프가 방해를 하는 것이었다.
검을 고쳐쥔 그녀는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는 알레이스를 흘깃거렸다.
지금은 작은 변수 하나에도 민감한 상황인데, 그가 문제를 일으키면 곤란했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거예요?”
“절대 정면을 향하지 말고... 아니야. 이건 일반 소총이었나. 권총도 포함인가.”
“......?”
그 때였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세 명의 사내.
그 중 하나가 던지려던 그물이 멈추었다.
좌우에서 거리를 좁히는 이들과 여전히 뒤쪽을 막아서고 있는 자들 모두의 귀에 천둥같은 소리가 연거푸 이어졌다.
“...어?”
“뭐였어? 뭔데?”
전방의 세명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에서 다가가던 자들이 멈췄을 때, 엘프들의 뒤를 막고 있던 이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저, 저놈이야! 저놈이...!”
타타탕-!
풀썩. 풀썩.
두 사람이 더 쓰러져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얼굴을 더듬었다.
피가 묻어나는 손.
무언가가 그곳을 스치며 귀를 찢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뭔가를 행한 엘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금속성의 도구를 만지고 있었다.
“패닝은 역시 어려워. 최강혁은 잘 하던데. 역시 반복 숙달 차이일까.”
“...그거, 뭐예요?”
옆에서 다가오던 자를 제압하고 돌아온 여동생의 물음에, 알레이스는 대답 대신 새 탄을 갈아끼운 리볼버를 고쳐 쥐고 전방을 향했다.
중간에 끼어들어 노예사냥꾼들을 도우려던 엘프는 이미 다른 인간들과 함께 쓰러져있었다.
“크윽, 대체....”
가슴팍에서 피를 흘리고는 있지만,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그를 향해 다가간 알레이스가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오케르탄. 잊혀진 이름이지.”
“용케도 알고 있군. 아이들에게 두고 두고 가르치나?”
숨을 몰아쉬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려던 엘프는 이어진 총탄에 다시 쓰러졌다.
“글쎄. 난 처음부터 잊은 적이 없거든. 아직 이곳에 있지.”
“큭, 그런 말도 안 되는....”
멍하니 올려다보던 엘프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잔당들을 정리한 여성 엘프는 할말을 찾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정확히 128년 전이었지.”
알레이스가 말했다.
“경매장에서 널 구하느라 참 고생했어.”
시원하게 미소지은 그가 손가락을 걸고 휘리릭 돌린 리볼버를 홀스터에 척 꽂아넣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여동생이 입을 열었다.
“58년 전이었어요. 비슷하지도 않다고요. 경매장에 잡혀있던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고요.”
“결국 내가 널 구했잖아. 구하러 와놓고는 오히려 잡혀버리....”
“그런 사소한 건 잘도 기억하면서! ...내 이름도 기억 못 하잖아!”
“아니야.”
“아니면 뭔데요? 말해봐요.”
“...여동생이 너무 많아.”
알레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먼저 걸어갔다.
씩씩거리던 여동생이 서둘러 그를 따라붙었다.
“고향에 말이야.”
“네.”
“종이가 있나?”
“그건 왜요?”
“최강혁 말이 맞아. 좀 적어두면 덜 헷갈릴 것 같아.”
“찾아볼게요. 종이.”
“고맙다.”
“얌전히 지낸다고 약속하면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