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26.
‘어울릴까 모르겠네. ...뭐, 예쁘면 뭘 입어도 어울리겠지.’
어차피 이번 로비행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나서야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먹거리도 충분하고, 잠도 여기서 자면 되니까.
“그, 뭐더라. 만화에 나오는 수련장 같네.”
주변이 어두컴컴한 것만 빼면 비슷하지 않을까.
‘근데, 여기에도 마나가 있는 건 맞겠지?’
자연회복이 되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은데, 그럼 또 다른 세상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새삼 그곳을 돌아보던 그가 문득 생각했다.
‘여기서 한참 있다가 돌아가도, 내가 그만큼 늙는 건 아닌건가.’
현실의 육체는 그곳 세상과 함께 멈춰있으니까. 혼자서 남들보다 늙어버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여긴 뭐지? 내 몸도 이렇게 있는데.’
여러모로 괴상한 공간이었다.
고개를 저은 그는 확정된 디자인 시안 중 하나를 골라 마지막으로 체크한 후 제작에 들어갔다.
“아... 시작부터 졸리네. 좀 자고 할까.”
그러고보니 현실에서 누적된 피로가 상당했다.
긴 여정이 될 것 같으니, 일단 도우미에게 나머지를 맡기고 침대와 이불을 꺼냈다.
‘선박하고 심장을 연구하면서 틈틈이 옷을 만들고, 무기 쪽도 좀 손봐야 하고....’
스르르 감기는 눈.
춥지도 덥지도 않고 빛조차 없기에, 숙면을 취하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헤인즈 줄 갑옷도 만들고... 헛간하고 건물들 뼈대도 미리... 할 일이 많아....’
***
부스스 눈을 떴다.
유리창 안으로 새어드는 햇살이 그녀의 뺨 어림을 맴돌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언제 일어났어요?”
“얼마 안 됐어.”
반쯤 뜬 눈에 보이는 남편의 얼굴에, 그녀는 꿈벅 꿈벅 초점을 맞추고 다시 보았다.
“왜?”
“이상해서. 당신 얼굴.”
“이상하게 생겼어?”
“그건 아니지만... 너무 그리워했던 것처럼.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사람처럼. 그런 눈으로 봐요. 나를.”
그녀의 말에, 최강혁은 그저 빙긋 웃으며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좀 더 자. 아직 이른 시간이야.”
“그래도. 해가 떴는데.”
“그동안 피곤했잖아. 오늘만 게을러져.”
“버릇되면 곤란해요.”
“고치면 되지.”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다시금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최강혁은 도우미에게 지시해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도우미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지만, 통째로 루팅했다가 다시 꺼내며 닫힌 상태로 걸 수는 있었다.
그렇게 한시간 쯤 지났을까.
개운한 얼굴로 깨어난 에밀리아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뭐예요. 나만 잤어.”
“나도 방금 일어난 거야.”
“거짓말.”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적당히 쓸어넘긴 후, 잠옷 앞섬을 닫으며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
“마음에 드는 거 골라 입어.”
“무슨 옷이 이렇게....”
침실의 한쪽 벽면이 온통 옷들로 가득했다.
옷장이 아니라 오픈형 프레임 행거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수많은 옷들을 한번에 볼 수 있었다.
“당신이 만든 거예요?”
뒤를 돌아본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최강혁을 보더니, 살짝 웃으며 다시금 앞을 보았다.
“남편의 취향을 알 수 있겠어요.”
“최대한 무난하게 골랐어.”
“그쪽 사람들은 이런 옷을 입는군요.”
“내 고향 말고, 다른 나라 느낌도 있을 거야.”
서양풍, 동양풍, 현대와 과거가 뒤섞인 수많은 옷들. 이브닝드레스에서 오피스룩까지 스타일이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른 옷걸이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왠지 그럴 것 같았지.”
“이상해요?”
“아니야.”
그녀가 고른 건 국방무늬의 전투복 야상이었다.
만들면서도 왠지 이런 쪽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역시나였다.
‘평소 입는 게 저런 느낌이니.’
투박한 재질의 로브.
아마도 디자인보다는 편의성을 주로 따지는 것 같았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다른 옷도 그런 느낌이었고.
“부드러워요.”
“슬슬 추워지지만, 그거라면 괜찮을 거야. 아직은.”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야상을 도로 걸어두고 새로 고른 옷을 입기로 했다.
조금 두껍게 만들어진 기모후드티였다.
역시나 색깔은 카키였고.
“후드가 좋았던 거구나.”
“네.”
로브도 후드 때문에 입었던 걸까.
하지만 후드티는 허벅지 정도에서 끝이니, 결국 아래쪽에 뭘 더 입어야 했다.
“조금 불편해요.”
“습관 들이면 괜찮을 거야.”
“들여볼게요.”
평범한 진청색의 청바지를 입었다.
양말을 신고 새 워커를 신으니, 영락없는 서양 피팅모델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당신 마음에 들어야지.”
“나도 마음에 들어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본 그녀는 행거 옆쪽에 자리한 전신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았다.
“고마워요. 오래 입을게요.”
“오래는 입지 말고.”
“왜요?”
“새옷 만들어줄게. 적당히 입어.”
더 추워지면 그 위에 야상을 덧입어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국방무늬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좋아하니까 좋네.’
다람쥐 지역에서 구한 의복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온갖 합성 섬유 샘플이 없었으면 만들지 못했을 옷들이 많았다.
‘스판 안 들어간 청바지였으면 더 불편했을 거야.’
로브를 입을 땐 아래쪽은 그냥 펑퍼짐한 치마였으니, 뭘 입어도 불편할 것이다.
‘레깅스도 있긴 한데... 저건 좀 그런가.’
편하긴 할 것 같은데, 남들의 시선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 싶었다.
‘잘 몰라서 넘어간 것 같은데.’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허리하고 허벅지쪽은 치마 형태로 가릴 수 있으니까. 뭐든 편한 걸 입는 게 최고지.
그렇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베티와 루시아가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식재료가 없어서 청소부터 하고 있었어요.”
“아. 그걸 안 꺼내놨었네. 잠깐만.”
“아가씨 옷이...?”
부엌의 간이 창고에 식자재들을 채웠다.
뒤쪽에선 두 메이드와 에밀리아가 새 옷에 대해 짧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문제 없겠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식구가 늘었잖아.”
“아...!”
하지만, 창고를 채웠다고 해서 당장 요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인벤토리에 있던 요리들 일부를 꺼내기로 했다.
“그럭저럭 공간 나오겠는데?”
“바꾸는 게 좋겠어요.”
기존의 긴 식탁을 치우고, 캠프에서 사용하던 원형 식탁으로 교체했다.
테두리를 조금 깎아내야 했지만, 온 식구가 다 모여 앉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일어나서 샤워까지 마쳤는지, 깔끔한 모습으로 모여 앉았다.
어제 숙소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두 형제는 군기가 바싹 들어간 모습이었다.
‘설마 때리진 않았겠지.’
식사를 시작했다.
이런 저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곳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기에, 일부러 그쪽으로 대화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그 것에 대해 반발하거나 불만을 갖는 기색이 없었다.
베티와 루시아는 아가씨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는 듯 했고, 엘리사벳과 헤인즈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지만 이견을 보이지는 않았다.
“떠날 거라면, 이 나라를 아주 벗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침묵한 채 포크만 움직이던 엘리사벳이 문득 그런 말을 했다.
“그 부분도 생각은 하고 있는데... 그러면 엘리사벳경은 기사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지 않아?”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실력이 퇴보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든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헤인즈는?”
“얼마 전부터, 기사 작위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작위보다는 실력이 먼저죠.”
“철들었네?”
“좋은 가주님을 만나서요.”
“아부도 떨고.”
“하하.”
떠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대화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로 넘어갔다.
공국을 벗어나면 어떤 나라가 나오는지, 제국은 어떤 곳인지 소문이나 경험담 같은 것들.
“지난 번 도시에서 보았다고 했었지?”
“예. 가주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선착장 근처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아내의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돌아간 게 아니었다. 역시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는데, 아마도 선착장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실제로 완공이 되고 나서 도착한 배를 타고 떠났다는 걸 보니, 반대로 이제는 언제든 배를 타고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었다.
“육로로 움직이는 건 한계가 있겠지. 우리도 배가 필요해.”
“하지만 배는 가격이....”
그렇게 말하던 헤인즈가 입을 다물었다.
엘리사벳은 접시만 바라보았다.
다들 아가씨가 배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부모의 유산을 복원하려는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더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자금은 걱정하지 마.”
“.......”
최강혁이 말했다.
그럴 만한 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도시에서 견학을 하며 슬쩍 가격을 물어보았다가 기겁을 했었으니.
하지만, 그의 표정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에밀리아는 의아해 했다.
겨우 간밤에, 아니 오늘 새벽에 선박과 심장에 대해서 물어보았던 사람이라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건가 했지만, 그런 건 아닌 듯 했다.
‘뭔가... 달라.’
일어나서 보았을 때부터 느꼈다.
마치 숲으로 떠났다가 캠프에 돌아왔던 때처럼, 어딘가 먼 곳에 갔다 온 듯한 눈빛이었다.
“배는 사지 않아. 직접 만들 거야.”
“아....”
“그렇죠.”
아마도 아가씨의 연구를 도와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모두 그렇게 여겼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말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런 거겠지.’
에밀리아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고, 평소처럼 작업실로 향하던 그녀를 붙잡은 남편이 그녀의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이건....”
열어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도면 검증 스크롤.
그녀가 설계할 때 사용하는 종이였다.
하지만 달랐다.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는 가만히 있어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체 이게....”
“열어봐. 참고 많이 했어. 확실히 실마리를 잡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다시금 열어보라는 듯 턱짓하는 남편을 본 그녀는 조심스럽게 스크롤을 펼쳐 안쪽면을 보았다.
아니, 볼 필요도 없었다.
활짝 펼쳤을 때, 그곳에서 뻗어나온 빛줄기가 허공에 특정한 형태의 구체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
“.......”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만져보니 옆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크기가 커지기도 했다. 검증 스크롤이 제대로 발동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이 방금 전에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부 생소한 무늬가 들어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녀가 오랜 시간 공들였던 설계가 고스란히 녹아들어간 모습이었다.
“당신. 틀리지 않았어. 내가 없었어도, 아마 오래 걸리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한 거예요? 대체, 어떻게?”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그래도 해줘요. 이런 걸 봐버리면...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당신이 한 거야. 여기 봐. 8할 이상은 당신 설계야.”
“그래도... 혼자서는 못 했을 거예요. 특히 이 부분은,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정원으로 갈까? 앉아서 이야기하면 좋겠는데.”
“그래요.”
손을 잡았다.
그녀는 뿌듯함과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마치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온 병사의 얼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정원에 데려가 벤치에 앉혔지만, 당장 대화를 시작하기보다는 어깨를 감싸고 한참을 진정시켰다.
“이게 끝이 아니야. 시작이지.”
“시작....”
“개량의 여지가 많아. 다른 곳으로 가면 또 다시 연구해야 할 테고.”
“그렇겠죠. 맞아요.”
이곳을 떠나고 싶어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던 이유. 환경이 달라지면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거라는 막막함.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에 완성작이 있었다.
지난 4년의 시간. 수없이 고쳐그렸던 결과물이, 비록 다른 이의 손에 완성되긴 했지만, 타인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왜 울어. 기뻐해야지.”
“기뻐요.”
손수건이 없었다.
대신 수건을 하나 꺼내 건네었다.
민망해진 얼굴로 코가 빨개져서는 눈물과 콧물을 닦는데, 그 모습이 지저분해보이지 않았다.
“꿈 속 세상이 있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었다.
어딘가로 들어가면 이쪽 세상이 멈춘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엔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하여 꿈을 이야기했다.
종종, 아주 긴 꿈을 꾼다고.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혼자 머물다 온다고.
그럴 땐 개인적인 연구들을 한다고 말이다.
“지난 밤에도... 그곳에 있었던 거예요?”
“맞아.”
“얼마나 머물렀어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를 보던 눈빛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그리워하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거긴 해가 없거든. 날짜 가는 걸 잘 몰라. 그래서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냥 하루라고.
잠시 긴 꿈을 꾸고 왔을 뿐이라고.
최강혁은 그렇게 말했다.
-모두 합치면 217일이었습니다.
‘나도 알아. 대충 넘어가.’
도우미의 오지랖을 한 귀로 흘리며, 그는 다행이라며 웃는 에밀리아의 볼을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