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132.
“애매하게 끊어졌어.”
뭐라도 건져야 한다.
적어도 사라 레드우드는 만나고 나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로비에 너무 오래 있는 것 같긴 한데... 상황이 그렇다고 하면 핑계일까.”
3시간이라... 애매하다.
뭔가 작업을 시작하기도 좀 그래서, 영화나 한 편 보기로 했다.
“이 정도면 얼추 보여줘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의미가 모호한 부분이 있네.”
영화를 보다보니, 문득 자막 제작 기능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왔나 궁금해졌다.
하여 실행해보니, 아직 확보된 어휘가 충분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자막의 수준도 완벽하진 못했다.
“몇 편 골라두긴 했는데.”
아내와 식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한 영화, 드라마를 골라두었다. 상대적으로 문화적 충격이 덜할 법한 종류였다.
“그래도 발전하긴 했네.”
머지 않아 다들 문제 없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자막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도우미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음성 변환?”
-녹음된 음성들을 활용해서 번역된 대사를 목소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기계소리처럼 되지 않아?”
-샘플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처음 듣는 기능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도우미가 만들어낸 대화소리를 들었다.
처음 들었음에도 왠지 귀에 익은 건, 그렇게 들은 목소리가 그가 만났던 인물의 것이어서였다.
‘필립인가?’
-맞습니다.
붉은 용병단 단장 필립.
그의 목소리가, 어느 현대 드라마의 재벌 아들 대사를 말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말이 아니라 이곳 언어였고, 아직은 살짝 어색하긴 해도 듣는데에 문제는 없었다.
‘이게 다른 세상 말이라서 어색한 건지, 변환 수준이 어색한 건지 모르겠네.’
아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휘가 들어가서 어색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잠재력이 무척 좋은 기능임은 분명했다.
‘이쪽 인물 목소리 말고, 드라마 인물들 목소리를 분석해서 그 뭐야. 음색? 그거대로 적용해볼 수 있어?’
-가능합니다.
비슷하게 변환된 대사가 들려왔다.
조금 전보다는 덜 어색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위화감은 한국말로 더빙된 외화를 볼 때, 입모양과 달라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 아닐까 싶었다.
‘괜찮은 것 같아. 일단 대기하고, 이쪽 언어를 좀 더 습득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변환해보자.’
자막을 띄워서 보여주는 것보다, 음성 자체를 변환해줄 수 있으면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기능이야. 추천 고마워.’
-마스터를 보조할 뿐입니다.
보다 멈췄던 영화를 마저 보고 나니, 그럭저럭 다음 위치 근방에 도착한 원숭이가 있었다.
중간에 위기가 있어서 잠깐 회수했다가 다시 넣느라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다행히 이후엔 별 문제가 없었다.
‘바위산이라. 동굴이 세 곳이라고 했지.’
당장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까 전의 숲과 달리, 직접 가기보다 먼저 주변정찰을 하는 게 좋을 듯 했다.
‘여기도 아니었네.’
그렇게 알아냈다.
여기 또한 사라 레드우드가 숨은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와일더 클랜이 보유하고 있던 비밀 거점이었다.
동물과는 연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접속했다.
‘사람도 동물로 쳐주면 안 되나.’
갇혀있는 걸 구하는 건 비슷한데 말이지.
그는 가까운 두 곳의 동굴 입구를 강철판으로 틀어막은 후, 나머지 한 곳으로 향했다.
쾅! 쾅!
티팅!
갑자기 막혀버린 동굴 쪽에서 이런 저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두께 10센티미터짜리 강철판을 쉽게 뚫지는 못할 것이다.
‘포라도 쏘면 뚫리긴 하겠지.’
열려있던 유일한 동굴.
그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 서둘러 그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비슷한 강철판에 모조리 막히고 튕겨나갔다.
‘여기에는 있을까.’
여전히 적들이 강철판을 조준하고 있던 사이, 다시금 로비로 갔다가 새끼 원숭이를 활용해 다른 위치로 접속했다.
오히려 동굴 안쪽에서 적들의 배후를 노리게 된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한명씩 단검에 무력화되었다.
뒤쪽부터 조용해지니 뭔가 이상함을 느낀 자들이 그곳을 돌아보았을 땐, 이미 절반 이상의 동료들이 사라진 후였다.
“씨발. 그 새끼다!”
“엿같은 시체 수집가가 왔어!”
이런 저런 외국어들이 마구 들려왔다.
탄창 하나를 다 비울 정도로 총을 갈기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땐 이미 그가 사라진 후였다.
바닥의 피얼룩만이 동료들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텔레포트라도 하는 거야?”
“그런 스킬도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
떠들던 자의 관자놀이에 볼트가 박혔다.
흠칫해 총구를 돌리던 자의 목에도, 그 옆에 있던 자의 팔뚝에도 비슷한 볼트가 날아와 꽂혔다.
“무음모드가 있어야 해.”
유일하게 살아있는, 팔뚝에 볼트가 꽂힌 자는 비로소 그제야 적의 목소리를 들었다.
“있어?”
“뭐... 뭘 원해?”
“무음모드 아티팩트. 총에다가 다는 것 말이야.”
“...아.”
“없어?”
“나, 나한테는 없어. 하지만....”
“없으면 됐어.”
“이, 있어! 저쪽 동굴에 젠킨슨이 갖고 있어! 권총용이긴 하지만...!”
“오.”
엉거주춤 선 채로 옴짝달싹 못하던 남자.
그는 어디서 나온 건지 사람 키보다 긴 날을 가진 검이 자신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춘 것을 보았다.
“좋은 정보야. 넌 살려준다.”
“......!”
“왜. 입막음으로 몰살이라도 시킬 것 같았어?”
“아, 아니야.”
“어차피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 싶어서.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모양인데. 맞지?”
“위에서 경고가 내려왔어. 당신이 돌아왔다고.”
“맞구나. 증거는?”
“그건 몰라. 그냥 다들 긴장하라고 했어. 전보다 더 위험해졌다고. 더 강해졌다고 했어.”
“그건 아닌데. ...맞나?”
아무튼 됐다.
그는 남자에게서 열쇠 꾸머리를 넘겨받고, 대신 샌드위치 두 개를 꺼내주었다.
“가는 길에 먹어. 길이 멀 텐데.”
“.......”
고맙다고 할 뻔 했다.
입을 꾹 다문 남자는 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후다닥 달아났다.
쿠쾅!
옆쪽 동굴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동굴이 무너질 듯한 진동과 후두둑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무너지진 않았다.
“진짜 쏘는 놈이 있었나보네. 뚫렸어?”
-지름 30센티미터 정도 뚫렸습니다. 빠져나오기엔 애매한 듯 보입니다.
원숭이의 시야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도우미의 조언에, 일단 그쪽부터 달려가서 다시금 철판을 두 겹 더 붙이고 왔다.
“어디 보자. 여기 열쇠가....”
처음 동굴로 돌아온 그는 안쪽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이 사람들을 가둬놓은 곳이라는 건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짐작한 것이었다.
‘때려 맞춘 건데... 이게 또 이렇게 잘 맞아요.’
철창이 있었다.
다행히 동굴이 꺾인 구조여서, 입구 근처에서 벌어진 총격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몇 분이나 계십니까?”
“열 세 명입니다. 옆 동굴에도 있지만, 잘 모르고요.”
“건강 상태는요.”
“...안 좋습니다.”
“지금 나가면 갈 곳은 있습니까?”
“그건....”
철창을 열기 전 이것저것 확인했다.
일단 열어버리면 그땐 상당히 번잡스러워지기 때문에, 조용한 지금이 가장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이레이저... 맞지요?”
“너 같은 꼬마도 잡혀있는 거냐? 이쪽엔 어떻게 온 거야?”
“내가 여기 있어야, 아버지가 말을 듣는다고 했어요.”
“으음.”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진짜였다.
“본국에서 유인당한 거군요.”
죄수 면회를 시켜주겠다고 해서 넘어왔던 본국의 가족과 지인들.
하지만 그 죄수들은 사실 와일더 클랜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이들이었고, 이렇게 가족들이 인질로 잡히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합류했다는 것 같았다.
“여기에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여긴 없었어요. 멀리 두어야 한다고....”
“다행이긴 하네요.”
어쩌면 그가 죽였던 이들 중에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어떻게 합류했든 결국 와일더가 된 건 마찬가지라서일까.
‘난 판사도 아니고.’
안타까운 건 그들이 아니라 이곳에 잡혀있던 이들이다. 그런 생각으로 철창을 열었지만, 한 명 한 명 지목해서 나오게 한 후에도 두 명은 지목하지 않았다.
“저희는 왜 안 부르세요?”
“왜 철창을 다시....”
“영양상태가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은 기아에 가까울 만큼 상태가 좋지 못했다.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영양실조는 기본에 수분 섭취도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두사람은 달랐다.
겉으로는 조금 헬쓱한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심지어 몇시간 전에 식사를 한 이도 있었다.
“딱히 단련한 몸도 아니고, 무기도 없는 거 보면 이쪽 프락치는 아닌 것 같으니까 풀어드리죠.”
둘 다 젊은 여성.
이런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이미 보고 들어서 짐작이 가능했다.
“자발적인 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제가 알아야 할 부분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그쪽 분은 홀몸 아니세요.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아.”
두 여성 중 하나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고작 눈으로 훑어보았을 뿐이었지만, 스스로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기에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최강혁은 철창 밖으로 나온 이들에게 일단 동굴 안에서 대기하라고 이야기한 후 적당히 먹을 것들을 내어주었다.
“허기진 상태에서 폭식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정량배식 같은 걸 할 경황이 없으니까, 알아서들 드세요.”
따뜻한 수프가 가득 든 솥.
깨끗한 물.
수십 개의 나무그릇과 숟가락은 마치 대충 깎아놓은 듯 어설픈 형태였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좀 시끄러워도 그런가보다 하세요.”
“고맙습니다!”
“인사는 나중에요.”
그가 말했던 대로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하지만 허기에 찬 이들에겐 정말 남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동안 그들을 가둬놓았던 이들이 지르는 비명에, 웃음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대략 30분 쯤 후에 현장이 정리되었다.
다른 동굴에 갇혀있던 이들도 모두 풀려나왔다.
‘어떻게 수습하지?’
데려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가까운 캠프가 이곳에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지만, 그곳도 와일더와 뒷거래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고.
‘애초에 놈들하고 선을 안 댄 곳이 없다고 하니까. 각국 정부와 커넥션이 있다고 했었고.’
이들을 데려갈 곳은 역시 토벌대 뿐일까.
하지만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아직 모르는데.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예. 물론 그러실 겁니다.”
돌아가고 싶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는 잡혀있는 이들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들이 풀려났으니, 이제 와일더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고.
‘하지만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텐데.’
그 죄수들도, 지금 이곳의 사람들도 본국 입장에선 치부일 것이다. 서류야 어떻게든 꾸며 만들 수 있겠지만, 명백한 납치와 협박이니까.
‘어쩌다 이렇게들 된 걸까.’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잘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죄수들은 그대로 두고 가야 할 테지. 돌아가서도 감시를 받을 수도 있고.
‘내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겠구나.’
-‘5번 원숭이’가 전투 현장을 목격 중입니다.
그 때, 도우미가 스크린 하나를 열어주었다.
전투라고 해봐야 별 거 없겠지 생각했는데, 낯익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토벌대네?’
남아있던 예상 위치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지나가던 길이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막막하시겠지만,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늦어도 한시간 안에는 돌아올 겁니다.”
“저희야... 당신이 없으면 어차피 이곳에 있는 게 오히려 안전하니까요.”
바위산 바깥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평원이다. 지금도 그곳을 기웃거리는 들개무리가 얼핏 보였다.
“일단 이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가장 크고 넓은 동굴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동굴 입구를 아까처럼 강철판으로 틀어막았지만, 문과 작은 창이 달려있었기에 아주 가둔 건 아니었다.
“그럼.”
최강혁은 그곳 근방에 원숭이를 남겨놓고 로비로 복귀, 준비를 마친 후에 다시금 5번 원숭이 쪽으로 넘어갔다.
‘와씨. 멀미난다.’
갑작스럽게 귀청을 울리는 폭음과 총소리.
그곳에서 맞붙고 있는 두 집단은 토벌대와 특정 캠프 소속의 부대였다.
“토벌대가 선제공격을 한 것 같은데. 저쪽은 숙영 중이었던 것 같고...”
복면을 착용했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이곳에선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기가 뭐했다.
“음... 10미터라.”
동굴에서 찾아낸 무음기능 장치.
권총용이라더니, 정말 총구에 장착하는 소음기 형태로 되어있었다.
무음 거리는 10미터였다.
그것을 넘어가면 효과가 반감되는 게 아니라, 아예 효과가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소총용으로 개조할 수 있으려나.”
개조해봤자 범위가 10미터면 애매하긴 한데, 그 거리를 넘어도 결국 격발음은 안 들리는 거니까 소음기보다 나았다.
‘지금 쓰기도 좋고.’
로비에서 적당히 영점을 잡아두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10미터 정도라면 빗나가진 않을 것이다.
‘저쪽에 그 여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는 있겠지. 잘하면 그쪽으로 데려가줄 수도 있고.’
잔탄을 확인하고 다시금 탄창을 꽂았다.
‘밤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용히 갈대숲을 뚫고, 그는 토벌대 진영의 후미로 접근했다.
그곳에서 합류해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도울 생각이었는데, 막판에 생각이 바뀌었다.
‘뭐지?’
토벌대 진영의 후방.
아마도 지휘관인 듯 보이는 남자.
왠지 낯이 익어서 다시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양호석이 왜 여기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