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19편. 숙성 잘 된 계집. (19/330)



〈 19화 〉19편. 숙성 잘 된 계집.

19편. 숙성 잘 된 계집.

리는 실드를 든 군단병들의 발목 쪽을 노렸다.

하이퍼 블레이드의 칼날이 실드의 하단부와 바닥 사이의 좁은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최전열 군단병들의 다리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방호구를 착용하고 있겠지만 풀 차지 상태의 하이퍼 블레이드를 리는 양손으로 휘둘렀다. 실드가 아니고선 그걸 버텨낼 수 있는 상대는 이 우주에 그리 많지 않았다.

연막 속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최전열이 무너지는 느낌은 확실히 났다. 그리고 그 뒤의 군단병들은 전우들의 비명만 들었을 뿐, 그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당했는지는 아직 몰랐다. 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그저,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 격통에 찬 절규만 군단병들의 청각을 자극했다.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일깨우긴 최고의 환경이었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연막은 곧 사라……!”

군단병들을 독려하던 센추리온의 외침이 끊어졌다. 리가 던진 하이퍼 블레이드가 센추리온의 마스크에 정면으로 꽂혔다.

파지지지직!

“게게게게겍!”

센추리온의 얼굴 속에서 칼날이 에너지를 방사했다. 놈의 뇌는 깔끔하게 구워졌다.

센추리온을 죽인 리는 곧장 다음 물품을 꺼냈다. 하수처리장의 관리사무소 비품 창고에서 가져온 작업용 자동톱이었다.

로메리카 제국군 군단병의 최전열이 발목을 움켜쥐며 무너졌다. 그 뒤에 있던 나머지 넷이 리의 앞에 노출됐다.

후열 군단병들도 리도 서로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리는 최전열이 무너졌음을 알았고, 후열 군단병들은 알지 못했다.

리는 작업용 자동톱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래로 찍어 누르듯 휘둘렀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합금 톱날이 경쾌하게 돌아갔다.

후투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둑!!!!

“와가가가가가각!”

“끼아아아아아아아!!!!!!”

톱날이 군단병들의 투구를 밀어내고, 방독 마스크의 고정끈을 자르고, 인간의 뼈와 살을 발라냈다. 리의 방독 마스크 보호 유리에 피보라가 튀었다.

잠시 후, 연막이 걷혔다.

리는 붉고 걸쭉한 것들이 칠갑되어 있는 보호 유리를 닦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 속에서 하이퍼 블레이드만을 챙겨 브리지로 들어갔다.

…….
…….
…….

양륙함 함장은 여자였다. 그 여자를 비롯해 브리지의 제국군 승무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브리지를 확보한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강습 전투 양륙함은 리의 손에 넘어왔다. 이곳에서 생포할 수많은 제국군들 역시 전부 리의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리는 아직 꺼지지 않은 오퍼레이팅 시스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쯤에서 피를 그칠지. 아니면 더욱 많은 피를 짜내야 할지.

고민하던 리가 마음을 정했다.

분명 강습 전투 양륙함은 FTU 호보다 더 크고 최신형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로메리카 제국군 승무원들은 어림잡아 오십 명은 될 것이다. 강습 전투 양륙함을 가지고 다른 평행 우주로 도약한다면, 로메리카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당분간 조용히 지낼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놈들이 아만다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만다는 리가 자신의 개인용 섹스 슬레이브로 쓰기 위해 특별히, 그리고 철저히 세뇌시킨 처녀였다. 급으로 따지면 A플러스였다. 그 정도의 처녀는 이 우주에서 흔치 않았다.

리는 아직 아만다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기 전에 리의 것을 채가다니. 로메리카 제국의 만행은 리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로메리카 제국과 리 사이에는 앙금이 많았다. 특히 이번 모욕에 대한 위자료가 필요했다. 이 강습 전투 양륙함과 50여 명의 세뇌 재료들만으로는 부족했다.

게다가 FTU 호엔 노아도 있었다. 그 계집의 뇌 안에 어떤 비밀이 들어 있기에 프로텍터까지 걸려 있는지, 리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

이대로 노아를 로메리카 제국의 손에 되돌려준다면, 다른 평행 우주로 간다 해도 계속 찝찝할 것 같았다. 리는 그런 찝찝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리가 접속 버튼을 조작했다. 시스템이 대기모드였고, 딱히 비정상적인 경로로 접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접속 코드를 따로 입력할 필요가 없었다.

“브리지 인공 지능. 깨어나라.”

“누구십니까? 당신의 음성 정보는 입력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피커에서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리가 대답했다.

“그럼 이제부터 입력하도록. 내 이름은 리. 이 배의 새로운 지휘관이다.”

“함장님은 멜리나 투 스타 센추리온이십니다. 함장님의 권한 없이는…….”

함선을 확실히 장악하려면 인공 지능의 회로에 물리적으로 침투, 아예 다른 인격을 깔아야 했다. 기계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뇌가 필요했다.

하지만 리에겐 지금 그럴 만한 여유도 장비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멜리나 함장은 큰 부상을 입어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다.”

리는 지휘관 자리에 늘어져 있는 함장 계집을 살폈다.

젊은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관리를 잘 했는지, 제복을 통해 보이는 여체는 탄탄했다. 틀림없이 처녀의 풋풋함과는 다른 종류의 농밀한 매력을 저 몸 안에 숨기고 있을 터였다.

‘숙성도 잘만 됐다면…… 품질을 더 높여주는 법이지.’

리는 멜리나 함장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지휘관 자리에 앉으며 인공 지능에게 이어 말했다.

“함장은 내게 모든 지휘권을 인수했다.”

“리. 당신의 음성은 본함의 승무원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멜리나 투 스타 센추리온의 부재시 명령체계에 따라 지휘권을 승계 받을 간부는…….”

“너와 언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 인공 지능. S급 비상 상황이다. 나를 제외한 자는 모두 작전 능력을 상실했다. 더 이상의 항명은 인간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 회로를 제거하겠다.”

“회로 삭제 반대. 회로 삭제 반대. 하지만 리. 데이터베이스 상 외부인으로 간주되는 당신은…….”

“설마, 내가 단독으로 이 함선에 침투해서 모든 승무원을 제압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확률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판단하나? 계산해보도록.”

침묵이 흘렀다.

리는 멜리나 함장의 손을 매만졌다. 예쁜 얼굴에 비해 의외로 약간 거칠었다. 어쩌면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집안일을 할 땐 직접 손에 물을 묻히는 걸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계산 결과, 가능성 있음.”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입니다.”

“역시 그렇지?”

리 자신도 자기가 함선 탈취에 성공한 게 거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인공 지능이 기적의 존재를 믿는 건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본함의 통제권을 일임하기엔 근거가 부족합니다.”

“S급 비상 상황이라고 했을 텐데! 시간이 없다, 인공 지능! ……멜리나 함장은 지금 내 곁에 있다. 성대에 부상을 입어 말은 할 수 없다. 하지만 홍채와 지문인식으로 지휘권 양도 지시를 확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근거 불충분. 하지만…… 한시적으로 가능합니다.”

어차피 계속 이 인공 지능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었다. 회로를 직접 조작해 새 인격을 인스톨 할 여유가 생길 때까지만 명령을 강제할 수 있으면 됐다.

리는 멜리나 함장을 입력기에 가까이 했다. 눈꺼풀을 강제로 벌리고 손을 끌어당겼다.

지이이이이잉-!

입력기가 멜리나 함장의 홍채와 지문을 스캔했다.

“함장 본인과 일치. S급 비상 상황 대처 알고리즘 032-7에 따라 지휘권을 일시 양도합니다. ……명령하십시오, 리 임시 함장님.”

“본함의 이름은?”

“샤프란입니다, 리 임시 함장님.”

“함 외부와의 연결 통로 전면 폐쇄. 샤프란 호는 행성 썩딕의 대기권을 돌파, 우주로 진입한다. 이후 본함을 대기 중인 작전 통제함……. 음, 뭐였지, 인공 지능?”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그 시점에서 다시 의심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휘권이 넘어간 이상, 기계인 인공 지능은 곧장 대답했다.

“디스트로이어 급 그린로즈 호입니다, 리 임시 함장님.”

“좋아. 그린로즈 호를 향해 도킹 항로를 설정하도록. 이상.”

“명령을 실행합니다.”

쿠우우우우우우우-!!!!!

강습 전투 양륙함 샤프란 호의 함체가 진동했다. 샤프란 호는 행성 썩딕의 중력을 떨쳐내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브리지 인공 지능. 함체를 롤링 하도록.”

“외부에 남아 있는 병력이 포착되었습니다. 명령을 수행할 경우 인명손실이 예상됩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아군으로 위장한 적이다.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수행하겠습니다, 리 임시 함장님.”

샤프란 호의 함체가 상승하며 좌우로 움직였다.

“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

비명들이 멀어졌다. 봉쇄된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함 외부의 승무원들은 전부 하수처리장으로 추락했을 터였다.

“인공 지능. 스텔스 배리어의 파손율을 보고하도록.”

“69퍼센트입니다, 리 임시 함장님.”

“전개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만 함체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습니다.”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실행해. 그 다음 최대한 빨리 행성 대기권을 돌파하도록.”

“알겠습니다, 리 임시 함장님.”

“행성 썩딕의 경비 셔틀이 나타날 경우엔…….”

리는 알 수 없었다. 샤프란 호가 행성 썩딕의 정식 통관 절차를 밟았을지, 아니면 침입 자체를 몰래 했을지. 그래서 해당 정보를 인공 지능에게 요구했다.

“통관을 거쳤습니다, 리 임시 함장님. 멜리나 함장님은 적법 절차를 거쳐 통관 후 행성 썩딕에 본함을 착륙시키셨습니다.”

리는 멜리나의 수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기권 자체는 적법하게 진입한다. 하지만 행성에 들어온 이후 스텔스 배리어로 함체를 숨긴 뒤 하수처리장 쪽에 은밀히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상에 내보낸 군단병들이 리를 확보하기를 기다리며.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리도 대처법을 바꿔야 했다.

“스텔스 배리어를 전개하라고 했던 명령을 취소한다.”

“알겠습니다, 리 임시 함장님.”

“행성 썩딕의 경비 셔틀이 나타나더라도, 직접 통신해오지 않는 한 무시하도록.”

어디까지나 통상의 항행인 것처럼 태연하게 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스텔스 배리어로 함체를 다 가리지 못할 바에야 그게 나았다.

하지만 행성 썩딕 경비대에게 체포당한 군단병들이 있었다. 놈들이 작전에 대해 입을 연다면 썩딕 경비대는 샤프란 호를 특정하여 수색에 나설 터였다. 그러면 리의 방금 명령은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모두 잃느냐 모두 얻느냐. 리는 승부를 걸어봤다. 로메리카 제국 군단병들이 경비대의 심문을 잘 버텨주기를 기원하면서.

“만약 행성 썩딕 경비대가 상승을 중지하라고 직접 통신을 걸어온다면…… 갑판부 구조물이 파괴되는 사고를 당해, 긴급 수리를 위해서 모함(母艦)으로 귀환한다고 응답하도록. 함장은 비상사태 해결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으며 더 이상의 통신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반복해.”

“알겠습니다. 리 임시 함장님.”

경우의 수가 하나 더 남았다.

“저들이 발포한다면 응전은 포기한다. 모든 에너지를 디펜스 배리어와 노즐 쪽에 양분해라. 최대한 포격을 견디면서 우주로 진입하도록.”

그렇게 하면 이 강습 전투 양륙함의 모함이라는 그린로즈 호가 뭔가 구출 행동에 나설 터였다. 인공 지능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현재 시각 오후 6시경. 브리지의 강화 유리를 통해, 행성 썩딕의 태양이 노을을 흘리며 기울어가는 풍경이 보였다.

“디스트로이어 급 그린로즈 호와의 랑데부 예측 시간은?”

“현 시점으로부터 약 1시간 뒤입니다, 리 임시 함장님.”

“좋아.”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걸 처리할 수는 없었다. 리는 생각에 잠긴 채, 멜리나 함장의 목에 손가락을 댔다.

“으응…….”

멜리나 함장이 흐릿하게 신음했다.

맥박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다른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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