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57편. 마실 것은 이미 있다. (57/330)



〈 57화 〉57편. 마실 것은 이미 있다.

57편. 마실 것은 이미 있다.

“많이 아는군.”

“후후. 우리 조직의 정보망은 행성 썩딕 경비대에도 퍼져 있으니까. 체포당한 제국군이 결국 다 불었대. 그들의 목표가 리란 남자였고, 그들의 모함(母艦)이라는 강습 전투 양륙함 샤프란 호에다가 디스트로이어 급 그린로즈 호란 것도 증발해버렸지. 그럼 뭐겠어? 뻔하잖아?”

“…….”

“지금 행성 썩딕 경비대나 로메리카 제국 쪽이나 난리 났어. 당신은 여기 처박혀 있어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당신만큼 대담한 조건으로 치료 기술자를 수소문하는 누군가. 그리고 행성 썩딕에서 당신이 벌인 대소동. 혹시나 해서 지하 네트워크를 역추적했지. 수소문의 근원지가 이 구역으로 나오더라고. 그래서 와 봤더니…… 빙고! 내 감, 아직 안 죽었지?”

“이 지역의 지하 네트워크도 신용 없는 놈들이군. 네가 역추적에 성공했으니 로메리카 놈들도…….”

“말은 바로 해. 로메리카는 못하지만 나니까 가능했던 거야.”

“조직의 힘일 테지.”

“조직이 곧 나거든?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 할멈, 아직 쌩쌩해 보이던데.”

“그건 그래. 아무튼,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거야? 이 근방에선 아마 우리뿐일걸. 당신이 원하는 치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건. 그 수준만큼의 실력을 가진 무허가 의사가 흔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배엔 실력자들이 정말 많거든. 재료도 풍부하고.”

“……이해하기가 힘들군. 그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이유가 뭐지? 너희 조직 정도면 내가 낼 수 있는 정도의 치료비가 절박하진 않을 텐데.”

“글쎄? 로메리카 제국이랑 싸웠으니, 포로로 제국군도 많이 데리고 있겠지? 걔들…… 단련이 잘 된 육체라 우리 쪽에서도 1급품 재료로 쓸모가 많거든. 게다가 우리 할매,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봐. 은혜를 베풀 일이 있다면 빚을 확실히 만들어 두라더라.”

“…….”

“덧붙여서.”

유키는 정말이지 위험한 여자였다. 독사처럼 현명하면서도, 귀엽고 순진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나 역시 보고 싶었어.”

“…….”

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건조한 시선으로 처녀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악마의 키득거림이 끊임없이 들렸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믿는다면 어느 수준으로 믿느냐.

어쨌거나 계속 머리만 굴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세상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정말 날 돕고자 한다면 기술진을 데리고 내 배로 건너와라.”

“흐응,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무리. 당신이 원하는 식으로 진행하려면 극정밀 바이오 머신에다가 고농도의 퓨전 에너지가 필요한데…… 여기가 아니면 아무래도 힘들거든.”

유키의 말에 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합리적이었다. 반박할 논리를 찾기 힘들었다. 만약 유키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사실을 위조하고 있다고 해도 의학적 지식이 상대적으로 희박한 리로선 그것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최소한, 디스플레이를 사이에 둔 이런 화상 통신을 통해서는 그랬다.

직접 유키의 눈을 본다면 뭔가 다를지도 몰랐다. 치료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위해서라도, 리는 유키의 저 배틀쉽 급 우주선에 접속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알겠다. 내가 가지.”

“잘 생각했어. 믿어줬네?”

“아니. 믿지 않는다. 네 말대로라면, 그곳에 가는 편이 내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당신다워.”

“잊지 마라, 유키. 날 안으로 들여놓은 그린로즈 호나 샤프란 호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허튼 수작을 벌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네 배 역시 같은 꼴이 되기 싫으면.”

“명심할게. ……그런 의미에서 이건 당신 패널티가 아니라 내 패널티야. 너무나 큰 불확정 위험 요소를 안에 품는 거니까.”

“글쎄. 아무튼 계속 그 자리에 대기해. 이쪽에서 이동할 테니까.”

FTU 호와 그린로즈 호까지 배틀쉽 급 우주선의 사정거리 안에 둘 생각은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건 리 정도로 충분했다. 만약 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외부에서 타격을 가할 수단을 남겨둬야 했다.

그린로즈 호나 FTU 호나 배틀쉽 급에 비해선 한 없이 작은 존재였다. 하지만 아이의 칼로도 어른을 죽일 수 있듯, 제대로 화력을 집중해 취약부를 꿰뚫으면 배틀쉽 급 우주선 역시 침몰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전에 그린로즈 호들이 침몰당할 확률이 한 없이 100퍼센트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알았어, 알았어. 당신 편할 대로 해.”

유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많이 양보해줬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말하던 처녀가 붉은 입술을 다물었다.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더니 유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면 마저 얘기할게. 그래서, 언제 올래?”

취이익-!

그때, FTU 호 브리지의 문이 열리며 아만다가 들어왔다.

아만다는 짧은 순간 주춤했다. 그린로즈 호와 샤프란 호까지 화상 회의용 디스플레이가 연결된 광경에. 무엇보다 중앙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유키를 보고서.

하지만 아만다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리는 아만다가 지시를 모두 수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만다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리는 유키에게 대답했다.

“오후 6시 30분까지 도킹하겠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여 뒤였다. 나름의 준비를 갖추는 데엔 그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았다.

“기다릴게.”

유키의 윙크를 끝으로 통신은 끊어졌다.

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또 다시 피 섞인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참은 뒤,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구스타프와 멜리나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들었듯이, 일단 저 배로 건너갈 생각이다.”

“그건…….”

“위험합니다, 주인님.”

멜리나와 아만다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둘 모두 걱정 가득 어린 표정이었다.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거다. 위험은 처음부터 각오했다. 게다가…….”

리는 아만다를 곁눈질했다.

“유능한 호위와 함께 갈 테니까 다들 너무 염려치 말도록.”

“…….”

리의 그 말을 듣고 아만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주인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기쁠 터였다. 하지만 저 알 수 없는 여자의 배로 들어간다니,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기분을 지우기 힘든 것 같았다. 비록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리 역시 또 다른 호랑이라고 해도.

멜리나가 말했다.

“아만다가 호위를 맡는다면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 그것과는 별개로 외부적인 예방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구스타프.”

“네, 주인님.”

“내가 연락할 수 없는 상태가 되더라도 아만다는 다르겠지. 만약 아만다에게서 주기적인 통신이 끊어질 경우…….”

리는 생각해 둔 대처법을 구스타프에게 일렀다. 구스타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칫하면 그쪽이나 이쪽이나 전부 폭사합니다.”

“상관없다. 아만다가 연락하지 못할 정도라면 이미 내겐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저들의 손에 죽느냐 아군의 손에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야. 아니, 차라리 후자가 나을지도 모르지.”

“…….”

“혹시 날 위해 죽는 게 두렵나?”

“당연히 아닙니다, 주인님. 주인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구스타프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세뇌의 효과는 역시 대단했다. 세뇌되지 않은 인간에게 저 정도의 충성심을 기대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인간적 교감이 필요할 터였다.

지구 시대에도 부하들과 그런 교감을 이뤘던 인물들은 꽤 존재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우주 시대에 충성의 가치는 더 높아졌을망정 충성의 요건은 훨씬 싸졌다. 세뇌기에 넣고 스위치 온. 그거면 됐다.

“멜리나. 너는?”

“당연히 두렵지 않습니다, 주인님. 제 죽음으로 주인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기쁘게 죽을 거예요. 다만…….”

“다만, 뭐냐.”

“그런 사태가 발생할 경우, 주인님의 곁에서 죽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아만다가 부럽네요.”

그 말을 듣고 아만다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멜리나. 애초에 저들이 주인님께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저부터 목숨을 걸고 주인님을 지키겠습니다.”

리는 샤프란 호를 떠나기 전, 멜리나에게 얼마나 세뇌 작업을 완료했는지 확인했다. 아직 달성률이 50퍼센트는 되지 못했다.

건설용으로 쓰이다가 압사당하거나 채굴용으로 하이퍼 우라늄을 캐다 녹아죽을 운명의 수컷들이라고는 해도 철저한 세뇌가 필요했다. 아무런 불만 없이, 탈주는 꿈도 꾸지 못한 채 묵묵히 작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샤프란 호의 세뇌기에 비해 재료가 워낙 많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멜리나를 계속 세뇌실에 붙들어 두는 것은 인력 낭비였다.

“그린로즈 호의 세뇌실에선 이다 크비슬링 역시 세뇌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거다. 남은 세뇌 재료들은 이다에게 인수인계해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전…….”

“나와 아만다가 떠나면 FTU 호의 브리지가 빌 거다. 넌 이곳으로 와서 FTU 호를 통제하고 있도록. 네 실력 정도면 금방 구조를 파악하겠지.”

“맡겨주세요.”

화상 회의를 위한 통신이 끊어졌다. 구스타프와 멜리나 모두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 역시 멍하니 있을 때는 아니었다. 유키와 접선하기로 한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무기고에서 새롭게 챙길 것들을 살펴야만 했다.

“쿨럭! 크흠!”

“주인님!”

갑자기 기침을 하며 리가 들썩거렸다. 아만다가 순식간에 곁에 와서 리를 부축해주었다.

“……본격적으로 속이 뒤틀리는군. 아무래도 속을 달랠 만한 걸 좀 마시고 무기고로 가야겠다.”

“브리지 인공 지능! 식당의 인공 지능과 연계해서…….”

“아니. 됐다, 아만다. 마실 것은 이미 있다. 네 몸 속에.”

“아…….”

리가 품에서 꺼낸 것을 보고 아만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주인님.”

금발 처녀는 슈트의 후크를 풀었다. 그리고 탐스러운 젖가슴을 내놓았다.

섹스 슬레이브 슈트를 입어 젖가슴을 계속 내놓고 있었을 때도 보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제국 군복 안에 숨겨져 있다가 드러난 젖가슴도 군침이 돌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색이 고운 아만다의 젖가슴엔 얇게 땀이 배어 있었다. 리는 손을 뻗어 그 땀을 닦아주었다.

“아, 아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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