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편. 위험한 자매.
64편. 위험한 자매.
마지막 디스플레이를 키리토모의 칼날이 베어버렸다. 모리코의 웃음소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하지만 아직 도청장치가 더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이퍼 블레이드를 검집에 넣으며 키리토모가 말했다. 꽤 날뛰었는데도 키리토모의 얼굴엔 땀이 별로 맺혀 있지 않았다.
닥터 데키무스가 끼어들었다.
“도청 교란을 위해 에너지를 분배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육체가 만들어지는 배양 캡슐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말 테니까요.”
“…….”
“어쩌면 좋을까요, 아가씨.”
그러는 동안에도 핵심 구역에 두른 실드 밖, 메디컬 센터의 외벽에선 하이퍼 램의 소리가 더욱 거칠게 들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진동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마침내 파괴음이 터져 나왔다.
파카카카카카카카캉!!!!
“뚫었다!”
하이퍼 램을 든 조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메디컬 센터로 쏟아져 들어오는 조직원들의 소리가 났다.
외벽을 돌파하고 들어온 조직원들은 핵심 구역을 보호하는 실드를 맞닥뜨렸다. 조직원들이 욕을 토해냈다.
“이건 또 뭐야! 이런 게 겹겹이 있었나?”
“유키 아가씨를 해쳤다는 그 슬레이브 헌터 새끼!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구먼!”
“썅! 저것도 밀어버려!”
와드드드드드드득!!!!!
쿵! 쿵! 쿵!
하이퍼 램이 실드의 외벽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메디컬 센터 자체의 외벽보다, 일정 구역을 보호하기 위한 실드 쪽의 두께가 더 얇고 견고함도 더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이퍼 램의 충격에 실드가 금세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서서히 금이 퍼져나갔다.
실드 안쪽에 있던 아만다와 유키들도 실드에 난 그 금을 확인했다. 키리토모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외벽보다 훨씬 빨리 뚫리고 말 겁니다. 일단 구멍을 낸 다음엔 이쪽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화염 방사기 따위를 쓸 가능성도 있습니다. 구멍이 나면 늦습니다, 아가씨.”
“나도 알아.”
유키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모리코의 도청 장치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어. 일단 이쪽에서 먼저 실드를 열자. 내 모습을 조직원들한테 보여줘야 해. 다소의 희생은 있더라도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유키 님.”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유키의 말을 끊었다. 아만다였다. 유키가 돌아보자 금발 처녀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식으로는 리 님의 신변에 위험이 초래될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일개 보디가드가 내게 충고하겠다고?”
유키의 목소리엔 날이 돋아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예를 갖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만다는 개의치 않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신께선 리 님을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런 유키 님이라면 제 말을 따라주시리라 믿고 부탁드립니다.”
거기서 말을 끊고, 아만다는 유키에게 뭔가를 들어보였다. 휴대용 단말기였다. 유키만 확인할 수 있는 각도에서,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습니다. 리 님과 제가 타고 온 셔틀이 정박해 있는 도크의 고유 디지털 코드를 공개해주십시오.]
“……?”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과 고유 코드 사이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
의아해 하던 유키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 시점에서 유키는 확실히 깨달았다. 리가 화이트 오로치 호를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으로 말할 뻔했다. 하지만 모리코가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만다가 필담(筆談)을 시도했으니 유키 역시 문자로 답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짧은 순간 망설였던 유키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
모리코가 공언했던, 메디컬 센터를 완전 장악해서 전원을 내리고 수면 가스를 퍼부을 시각까지는 약 9분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 하이퍼 램에 의해 실드가 뚫려 이곳의 전원이 스테이크가 되고 말지도 몰랐다.
이렇게 당하나 저렇게 당하나 마찬가지라면, 유키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리가 준비한 그 수법을. 지금은 뇌만 남은 채 생명유지 박스에 있는 주제에, 이런 상황을 마치 예견한 듯한 그 남자의 솜씨를.
아만다가 내민 단말기에 유키가 손을 뻗었다. 아만다가 적었던 내용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재빨리 입력했다.
도크의 고유 디지털 코드였다. 그리고 한 마디가 더 적혀 있었다.
[해버려.]
아만다의 입가엔 미소가, 유키의 입가엔 쓴웃음이 번졌다.
…….
…….
…….
같은 시각, 화이트 오로치 호의 브리지.
모리코는 자신을 따르는 간부급 조직원이자 실제 사촌 여동생인 마리코와 미리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모리코만큼 개성적이고도 상당한 미모를 가진 마리코였다. 마리코는 메디컬 센터의 통풍구에 숨겨둔 도청기를 통해 유키 일행의 대화를 언니와 함께 감상했다.
마리코가 꺄르르 웃었다.
“유키 그 계집애, 도도하게 굴더니 잘 됐지 뭐여요?”
“후후후……. 침착한 척 하지만 내심 허둥대는 그 꼴이라니.”
마리코의 말에 맞장구치며 모리코는 메인 스크린을 통해 함내 현황을 살폈다. 모리코에게 충성하는 조직원들이 화이트 오로치를 순조롭게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었다. 이 배를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걸 되찾는 중이었다. 모리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코가 손뼉을 쳤다.
“역시 대단하셔요, 언니! 이런 상황에선 누구라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거여요!”
모리코는 마리코를 바라보았다. 예뻐하는 사촌 동생을 향한 모리코의 시선엔, 유키를 향했을 때의 표독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별 거 아냐. 날 의심하면서도 자기 배짱을 보인답시고 내게 브리지를 맡겨둔 게 유키 년의 패착이었어.”
모리코가 말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좋은 상황을 만들어주면, 내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도 함정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리라 유키 년은 기대했겠지. 하지만 난 알거든. 유키 년이 허풍쟁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년이 함정이 있을 거라고 냄새를 피울 때야말로 반대로 아무런 대비도 안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음음! 역시 안목이 뛰어난 모리코 언니다우셔요!”
마리코가 사촌 언니에 대한 동경으로 눈을 반짝였다.
“진짜 중요한 건 이 다음이야.”
모리코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유키가 모리코의 반란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은, 아무리 조직의 내부 인사에 불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설마 할매와 조직 전체를 상대로 항쟁을 벌이는 무모한 짓을 정말로 저지를까 싶었기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나 모리코와 마리코는 원래 로메리카 제국의 귀족이었었다. 이들의 가문은 로메리카 제국에게 죄를 지었지만, 행성 썩딕에서 영향력이 큰 유키의 조직을 통째로 제국에 바치겠다고 교섭하면 다시 옛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리라는 사내의 뇌는 모리코와 마리코가 로메리카 제국을 등에 업기 위한 헌납품이 될 수 있었다.
로메리카 제국의 귀족이었던 모리코와 마리코의 본명은 각각 제이니아 제노비움과 엘리시아 제노비움이었다. 모리코와 마리코란 이름은 조직에서 새롭게 받은 이름이었다.
몇 년 전, 제노비움 가문은 막대한 횡령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했었다. 하지만 유흥 여행을 위해 행성 썩딕에 와 있던 제이니아와 엘리시아는 제국 감찰대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둘은 유키의 할머니가 운영하는 조직-나이트 사쿠라-에 의탁했다.
조직에서 대모(代母)라고 불리는 유키의 할매는 자매에게 모리코와 마리코란 이름을 주고 고위 간부로 받아들였다. 훗날 로메리카 제국과 조직이 얽힐 일이 있을 때 쓰임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리코가 조직에 바친 엄청난 비자금은 우주선 화이트 오로치 호의 건조비로 쓰였었다. 나아가 모리코는 그 배의 선장이 됐다. 사촌 동생 마리코는 부선장이었다. 자매는 제국에서 쫓겨난 꼴이었지만 최소한 화이트 오로치 안에서는 여왕과도 같은 삶을 누렸다.
모리코는 나름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다. 화이트 오로치 호를 끌고 우주를 누볐다. 인간을 납치해서 개조 재료로 만들고, 각 평행 우주들의 부자들에게 인체 개조 서비스를 제공하며 쏠쏠히 돈을 벌어들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수익의 일부를 비자금으로 빼돌리긴 했지만 그만큼 조직을 위해 위험도 많이 감수했었다. 자신과 마리코를 받아준 대모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을 느끼긴 했기 때문이었다. 대모의 친손녀인 유키란 썅년이 낙하산처럼 떨어져, 화이트 오로치 호의 선장 자리를 꿰차기 전까지는.
유키가 선장이 되자 모리코는 부선장급인 2인자로 밀려났다. 부선장이었던 마리코는 그보다 더 못한 직함을 얻었다.
모리코는 직감했다. 이대로면 토사구팽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조직과 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분노와 역심으로 어렵지 않게 돌변했다.
억눌린 시한폭탄처럼 언젠가는 터질 일이긴 했다. 리라는 사내에게 빠져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한 유키가 폭탄의 기폭 스위치를 이 시점에서 눌러버렸을 뿐이라고 모리코는 생각했다.
“로메리카 제국과 교섭을 잘 해야 해.”
마리코에게 모리코가 말했다.
“우선은 우리 본명을 숨기는 게 좋겠어. 저쪽도 제노비움 가문에 대해 별 좋은 감정이 없을 테니까. 교섭이 본격화된 이후에 우리 정체를 드러낸다면 좀 더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겠지.”
“탁월한 생각이셔요, 언니!”
“최대한 가까이 있는 로메리카 제국 함대를 탐색해보렴. 분명 그쪽도 리라는 슬레이브 헌터가 행성 썩딕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혈안이 돼서 찾고 있을 거야.”
“알겠어요! ……너희! 언니 말씀 들었지요?”
마리코가 오퍼레이터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브리지에 남은 것은 모두 자매에게 충성하는 조직원들이었다. 유키 파 조직원들은 이미 난도질당해서 한쪽 구석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유키에게 디스플레이를 통해 보여준 그대로였다.
“제대로 안 하면 아프게 만들어줄 테여요?”
“거, 걱정 마십시오! 모리코, 마리코 님!”
오퍼레이터들이 서둘러 대답하고서 작업에 몰두했다. 마리코는 만족 어린 미소를 띠운 뒤 언니를 돌아보았다.
“근데 모리코 언니. 마리코~ 부탁이 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