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78편. 과거로의 다이브.
78편. 과거로의 다이브.
“유키는 자네가 돌아오면 보겠다더구먼. 자네가 반드시 돌아올 텐데 뭐가 마지막이냐면서. 그러니 식을 올릴 때 만나면 된다나?”
“…….”
“이해해 주게. 그 애, 그런 쪽으론 고집스러울 때가 있으니까. 지금 자넬 보면 오히려 부정이 타서 재회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르지. 본인한테 지적하면 극구 부인하겠지만. 낄낄…….”
“아무래도 상관없다.”
“약속 시간에 안 늦을 거라 믿어. 그때까지 유키와 자네의 결합에 걸맞을 만한 식을 준비해 놓겠네그랴. 돌아올 행성 좌표는 기억하고 있겠지?”
현재의 10-10-4-6 구역은 임시 피난처였다. 리가 이곳에서 이탈하면 당연히 화이트 오로치 호와 트윈 카타나 호, 대형 작업선도 머물 이유가 없었다. 화이트 오로치 호의 수리가 끝났으니 일단 본거지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이트 사쿠라가 주된 활동 무대로 삼는 곳은 행성 썩딕이었다. 하지만 리가 한바탕 난리를 친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리는 2주 후,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하고서 행성 히말라야로 복귀하기로 했다.
옛 지구 시대의 유명한 산맥에서 이름을 따온 행성 히말라야는 콜리바르 공화국 소속의 휴양지였다. 비록 콜리바르 공화국 소속이긴 해도 콜리바르 공화국은 로메리카 제국과 대립관계였다. 그리고 다른 우주 국가들과의 복잡한 정치 상황이 맞물려 행성 히말라야는 실질적으로 중립 세력화 되어 있었다.
나이트 사쿠라는 본거지인 행성 썩딕 말고도 행성 히말라야에 대규모 별장을 갖고 있었다. 행성 썩딕에서 정비를 마치고 물자를 챙긴 유키 일행은 바로 행성 히말라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결혼식을 준비할 터였다.
“조심하게. 건투를 빌겠네그랴.”
“당신이야말로 그때까지 버텨. 거꾸러지지나 말고.”
대모는 나날이 수척해지고 있었다. 유키에게 나이트 사쿠라의 미래를 맡기는 데에 마지막 생명을 태우는 것 같았다.
“흘흘…….”
노파는 입가를 구부려 웃었다.
“영광이로구먼. 제너럴 코레아누스께 걱정도 다 받고.”
리가 대모를 노려봤다. 하지만 통신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점프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린로즈 호가 선도하겠다고 보고해왔습니다.”
아만다가 말했다. 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실행을 지시했다.
오전 11시 정각. 그린로즈 호가 선봉에 서고 기함 FTU 호가 그 뒤를 따르는 진형으로 평행 우주 도약이 개시되었다. 페큼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차원 돌파를 위한 에너지가 주위에 퍼져나갔다.
…….
…….
…….
브리지의 지휘석에서 리는 생각에 잠겼다. 대모가 입에 담은 호칭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과거 따윈 의미가 없었다. 현재와 미래만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더러운 길을 헤쳐 나갔었다. 과거를 건드리는 순간, 현재와 미래까지 진창에 얽혀 가라앉을 듯한 그 예감이 리가 자신에 대해 더 알아보는 것을 본능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과거가 계속 리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사사건건 방해해 오는 로메리카 제국부터 시작해서 과거의 자신을 안다는 자들까지.
과거가 내버려두는 이상 현재의 리는 눈앞의 일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이 우주는 생존만으로 벅찬 곳이었다. 하지만 시비가 계속된다면 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과거의 시비는 점점 참기 힘들어지는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어쨌거나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할 일이라면 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 대면하게 될 터였다.
이윽고 진동이 가라앉았다. 형용할 수 없는 왜곡 현상으로 일그러졌던 스크린의 외부 시야도 회복되었다. 검은 우주 속에서 은색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평행 우주 점프, 완료했습니다. 14-15-5-7-17-2-1-1524-9-19 구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수고했다.”
리는 해당 구역에서 가깝게 점프할 수 있는 평행 우주들의 리스트를 뽑았다. 모두 조선 기술이 특화되어 발달한 곳들이었다.
‘이번에도 여긴가.’
리의 시선이 한 이름에 머물러 있었다. 행성 딥블루씨였다.
평행 우주들의 행성은 기본적으로 전부 태양계 제3행성 지구였다. 평행 우주의 수만큼 똑같이 닮은 지구가 수십, 수백, 수천 개가 있는 것뿐이었다.
최초로 평행 우주가 발견되고 해당 평행 우주의 지구를 발견하게 되면 개척가들은 나름 이름을 붙이곤 했다. 행성 딥블루씨의 경우는 개척 우주선이 고장을 일으켜 최초로 추락한 곳이 심해였다. 그것을 기념하여 개척자들은 새롭게 발견한 지구에 깊고 푸른 바다란 이름을 붙여 놓았다.
리는 이미 행성 딥블루씨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FTU 호를 사들인 뒤 개조한 조선소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다음번 점프를 위한 에너지가 충전된 뒤 저곳에 착륙한다.”
“알겠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각자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아만다는 물론 그린로즈 호의 다른 슬레이브들에게도 명령을 남겨놓은 뒤, 리는 브리지를 떠났다.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을 멍하니 보낼 생각 따윈 없었다.
…….
…….
…….
리가 도착한 곳은 FTU 호의 신체단련실이었다.
신체단련실이라곤 하지만 창고를 개조한 허름한 곳일 뿐이었다. 그래도 트레이닝 시뮬레이터만큼은 꽤 돈을 들여 괜찮은 것을 들여놓았다. 단련 효과는 나쁘지 않을 터였다.
유키네 조직의 뛰어난 의료 기술 덕분에 뇌 이식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옛 육체보다 상대적으로 근력이나 순발력, 모든 것이 뒤떨어지는 이 새로운 육체를 과거의 수준으로 단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리의 몫이었다.
리가 트레이닝 시뮬레이터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을 조작하기 전, 옆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휴대용 단말기를 조작해 통신 포트를 개방했다.
신체단련실에서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이 신체단련실에는 리밖에 없었다. 그러니 브리지에서 통신을 연결하는 것보다 보다 개인적이고 은밀한 대화가 가능할 터였다. 이곳에 온 김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해치워야겠다고 리는 판단했다.
물론 아만다나 다른 세뇌된 슬레이브들은 그저 도구였다. 도구 앞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눠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슬레이브들이 리에게 전폭적으로 충성한다고 해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리가 나눌 대화는 그들의 뇌에 저장될 터였다.
만약 적이 슬레이브들을 생포한다면? 슬레이브들의 뇌에 걸어놓은 프로텍터가 돌파된다면? 그 뒤에도 슬레이브들이 살아 있다면?
세뇌 개조를 업으로 삼는 만큼, 리는 타인이 자신의 슬레이브를 세뇌 개조하는 가능성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프로텍터를 꼼꼼히 심어두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최고의 방패가 있다면 그것을 뚫는 최고의 창은 항상 새롭게 개발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남이 엿듣는 상황 그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연결음이 몇 번 반복되다가 통신이 이어졌다. 영상 없이 목소리뿐이었다.
“나다.”
“당신이군.”
이 통신 포트 비밀번호를 써서 리와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그쪽에서도 자신에게 이 포트로 연락해 올 자가 리뿐임을 알기에 바로 대화에 응했을 터였다.
“잭은 죽었어. 날 배신했지.”
리가 말을 이었다. 단말기 저 너머의 상대-정보업자 레밍턴에게.
“…….”
레밍턴은 잠깐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아내라도 인질로 잡혔었나 보군. 그 잭이 배신이라니,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어.”
변조된 목소리 때문에 레밍턴의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었다. 리는 레밍턴의 얼굴도 몰랐다. 하지만 리가 관심 있는 것은 레밍턴의 신상이 아니라 레밍턴으로부터 제공받는 정보들이었다.
“그래.”
리가 긍정했다. 레밍턴의 추리는 소름끼치도록 정확했다.
“그래서, 잭의 아내도 죽었나?”
“글쎄.”
리는 확답을 피했다. 리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리기 싫었다. 잭의 죽음을 레밍턴에게 알린 것도 단순한 잡담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였다. 너 역시 배신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란 암시였다.
하지만 휴대용 단말기에서 들려오는 레밍턴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말랐다. 인간이 아니라 인공 지능을 상대한다는 기분이 들 만큼.
“이번엔 뭐가 궁금해서 날 찾았나?”
“제너럴 코레아누스.”
“…….”
“데이터 베이스에 있는 모든 기록을 넘겨줘. 당신의 것이든, 로메리카 제국의 것이든 가리지 말고.”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이번의 침묵은 아까보단 길었다. 이윽고 레밍턴이 말했다.
“용기가 났나 보군.”
“용기가 아니다. 필요가 생겼을 뿐.”
“좋아. 수집해 보지. 하지만 금방 끝나진 않을 거야.”
“…….”
“로메리카 제국의 데이터베이스는 몇 단계로 나뉘어져 있지. 그 중 제너럴 코레아누스에 대한 자료는 심층부 중 심층부에 있을 거다. 게다가 제너럴 코레아누스는 기록말살형을 받아 모든 공식, 비공식 기록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된 인물이다. 그런 기록을 복원까지 해야 하니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야.”
“아무리 너라도?”
“아무리 나라도.”
“……로메리카 제국의 세뇌기에서 탈출했던 그때, 난 정신이 혼미했었어. 그러다가 무작위 항법으로 자동 운행하는 셔틀에서 깨어났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아. 스스로 그 셔틀을 탈취했었는지, 다른 누군가가 나를 도왔었는지.”
리는 자신의 뇌에 남아 있는 가장 먼 기억을 건드렸다.
“하지만 메시지가 함께 있었다. 그것만큼은 내가 썼을 리가 없어.”
그 메시지에는 통신 포트 연결 디지털 주소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연락할 것’이란 간단한 문장과 함께. 과거를, 옷을,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던 리는 일단 그 메시지에 따랐다. 디지털 주소에 따라 통신을 연결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이 바로 지금의 상대였다. 정보업자 레밍턴이었다.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레밍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당신한테 나를 소개해 준 자가 누구인지 몰라.”
“하지만 네 직통 연결 주소와 패스워드를 아는 자는 한정되어 있지. 아무튼, 내 탈출을 도운 로메리카 제국 내부의 조력자가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네 클라이언트들 중 하나일 확률이 높지. 조력자가 있다면, 아무리 기록말살형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료를 되살릴 키 역시 데이터베이스 안에 숨겨뒀을 가능성이 있을 텐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