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95편. 최상급의 여전사.
95편. 최상급의 여전사.
아까보다 더 격렬한 폭발이 퍼져나갔다. 습격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리는 화염과 열기를 날름거리는 빌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습격자들을 공격한 그러네이드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서! 주인님의 보호를 우선하세요!”
이다와 리타 그리고 멜리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각지의 숙소에 흩어졌다가 합류한 수많은 승무원들과 더불어.
리가 지상 배치를 허용했던 모든 승무원들이 합류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다는 신호 발생 장치를 놓지 않았다. 그 신호를 쫓아 다들 몰려올 수 있었다.
합류한 승무원들 중에는 보디가드 슬레이브 부대도 포함된 상태였다. 리와 행동을 함께한 보디가드 분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보디가드 슬레이브 전체 병력에선 일부에 불과한 숫자였다.
투투투투투투투투!
퐁! 퐁! 퐁! 퐁! 퐁! 퐁! 퐁!
쿠쾅! 콰콰쾅!
“끄아아아악!!!”
라이플로 응사하는 승무원들과 보디가드 슬레이브 부대의 그러네이드 연사가 이어지자, 마스터 자코미오의 빌라를 점거한 습격자들은 화력, 병력 모두에서 우위를 잃었다. 이제 불에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꿈틀거리는 것은 복면 쓴 습격자들 쪽이었다.
근린공원 주변의 평화로운 빌라 주거지였던 일대는 이미 작은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그러네이드 세례를 받은 빌라는-주변의 빌라들까지-흉측한 몰골이 되어 연기를 뿜었다. 뒤집히고 박살난 오토모빌들과 그 잔해가 어지러이 널렸다.
아만다와 함께 몸을 일으킨 리는 멜리나, 이다, 리타와 재회했다. 그리고 보디가드 슬레이브들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리와 헤어진 뒤 슬레이브 샤를은 여전히 분투 중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중대형 오토모빌을 몰고서, 경비대가 여러 겹으로 친 바리케이트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한동안 교란을 계속했다.
공중 셔틀이 등장해 샤를의 오토모빌에 머신건을 퍼부었지만, 샤를은 오토모빌에서 뛰어내리면서까지 저항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각지의 숙소에 묵고 있던 승무원들이 이곳에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샤를이 리의 기대 이상으로 경비대의 이목을 끌어준 덕분이 컸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빌딩 하나를 아예 거점으로 삼고 인질극을 벌이며 농성하는 모양입니다.”
“흐음…….”
보디가드 슬레이브들의 보고를 들으며 리는 눈썹을 꿈틀했다. 솔직히 놀랐다. 샤를에게 그 정도의 전투 능력을 기대하진 않았었다. 지금껏 살아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예상 외로 대단한 샤를의 분투는 둘째 치고, 당면한 목표는 마스터 자코미오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습격자들이 정리되자 리는 일행을 이끌고 빌라의 정원으로 진입했다.
폭격기라도 휩쓸고 간 듯 정원엔 여기 저기 구멍이 패여 있었다. 하지만 한 곳만은 아직 비교적 원형을 유지했다. 금속성 문으로 봉쇄된 입구였다.
그 입구는 비스듬히 지하로 나 있었다. 지구 시대, 허리케인을 피하기 위해 황야 마을에서 파놓곤 했다는 지하 대피소의 출입문과 비슷한 형태를 띠었다.
문은 한 겹이 아니었고, 가장 바깥쪽의 금속문은 파괴되어 일그러진 상태였다. 언더그라운드 하이웨이에서 지상으로 나온 리 일행이 최초로 목격한 그 폭발의 영향일 터였다.
하지만 그 뒤의 문은 시커멓게 그을리긴 했지만 여전히 닫혀 있었다. 리는 그곳으로 접근했다.
쿵! 쿵! 쿵!
리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문의 재질은 전함의 장갑을 만들 때 사용하는 스페이스 하이-플래타늄인 것 같았다. 얇으면서도 견고했다.
“마스터 자코미오!”
리가 문 저편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들리시오? 내가 왔소! 리요!”
약속했던 암호인 결제 대금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는 초조해졌다. 외부 폭발의 충격파 때문에 은신처 내부의 인간이 내장파열로 죽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이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얻는 것이 노인과 소녀의 시체뿐이라면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았다.
본격적으로 경비대의 사이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출동이 늦었던 경비대도 격렬한 시가전이 일어나자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군. 문을 돌파한다.”
“하, 하지만 주인님. 현재 저희들이 가진 장비로는 힘들지 않을까요? 스페이스 하이-플래타늄이라면 웬만한 대구경 합금탄이나 고출력 레이저도 튕겨낼 정도예요.”
이다 크비슬링이 난색을 표했다. 리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문 자체를 뚫을 수 없다면 측면 벽을 폭파시켜서라도 들어가야 해. 플래타늄만으로도 엄청난 고가다. 은신처 전체를 두르진 못했을 테지.”
“저희가 일으킨 폭발 때문에 정말 내부 인원이 죽을 수도 있어요.”
이다의 기술적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리로선 문밖에서 계속 시간을 낭비하느니, 마스터 자코미오의 생명력에 걸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음…….’
고민하던 리가 마음을 정했다.
폭탄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마스터 자코미오와 손녀딸인 소피아 모두 죽게 만들 확률이 너무 높았다. 경비대가 도달하기 전에 내부로 침입할 순 있겠지만 얻는 것이 시체 두 구뿐이라면 의미가 없었다.
“아만다! 보디가드 슬레이브 및 승무원들과 전투태세를 갖춰라. 경비대가 유효 사정거리에 진입하기 전에 위협사격을 가하도록. 그동안 난 계속 마스터 자코미오를 불러보겠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만다가 즉시 움직였다. 지상전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적당한 위치에 병력을 배치했다.
알몸이 되어 젖가슴을 드러내며 허리를 돌릴 때, 아만다 만큼 리의 정욕을 고취시키는 섹스 슬레이브는 드물었다. 하지만 세뇌당하기 전의 아만다는 본질적으로 전사(戰士)였다. 로메리카 제국 특수부대에 속했었을 정도로 최상급의 자질을 갖춘 여자였다.
그동안 리는 거듭 합금제 문을 두드렸다. 암호와 자신의 이름, 상대의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아무래도 경비대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리……?”
그런데 그때, 문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행성 딥블루씨의 경비대는 아직 사이렌 소리만 요란할 뿐 본격적인 모습을 이 거리에 드러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소, 마스터 자코미오. 나요! 어서 문을 여시오! 시간이 없소!”
위이이잉-!
리의 외침에 화답하여 스페이스 하이-플래타늄 재질의 문이 열렸다. 좁은 방 한 칸 정도 사이즈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과 소녀가 그 안에 있었다. 소피아는 창백한 표정으로 겁에 질린 채 어깨를 떨었다. 마스터 자코미오는 그런 손녀딸을 꽉 껴안은 채 관자놀이에선 피를 흘렸다.
“으음……. 충격파 때문에 잠시 기절했던 모양일세. 지, 지금 상황이……?”
“설명은 나중에! 서두릅시다!”
승무원들이 리를 도와 마스터 자코미오와 소피아를 부축했다. 그리고 은신처로부터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엉망이 된 빌라 앞에서 소피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스터 자코미오가 손녀딸에게 알렸는지 리는 아직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소녀로선 단란하게 저녁을 먹으려던 참에 갑자기 피신해야 했고, 행복했던 삶의 공간이 한순간에 파괴되어 버렸다. 아직 앳된 여자아이에겐 버티기 힘든 상황일 터였다.
노인 또한 불타는 빌라를 보며 충격이 깊어진 듯했다. 이미 아들의 죽음으로 혼란한 뇌에 더한 타격이 가해진 것 같았다. 조선소의 작업실에서 봤던 호탕한 모습은 빛이 바랬다. 대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허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리 일행은 지역 탈출을 서둘렀다. 아직 경비대가 현장엔 도착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물거리다가 또 다시 포위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동수단이었다. 승무원들이 나누어 타고 온 오토모빌들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오히려 경비대가 접근하는 방향을 향해 전진하는 꼴이 될 터였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징발을 하자니 인원이 문제였다. 백 명이 훌쩍 넘는 병력을 단숨에 이동시키기는 불가능했고, 그만큼 여러 대의 오토모빌을 모으고 다닐 여유 따윈 없었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앵-!
경비대의 사이렌이 더욱 커졌다. 마침내 언덕길 위에서, 그리고 근린공원 쪽에서 경비대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투투투투투!
퍼펑! 쾅! 쿠쾅!
경비대가 발사한 탄환과 포탄들이 날아들었다. 서로간의 거리 때문에 조준 사격이 아닌 위협사격 수준이었다. 리 쪽에서도 응사했지만 마찬가지로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
그때, 저녁 어둠이 짙은 하늘에서 묵직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 엔진소리를 듣고서 리는 목 뒤에서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경비대의 공중 셔틀인가?’
지금도 지상에선 경비대가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하늘에서까지 머신건 난사를 받는다면 도저히 답이 안 보였다.
리 혼자, 혹은 개인용 슬레이브들만 데리고선 살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다른 승무원들까지 무사할 순 없었다. 대부분이 학살당하고 말 터였다.
생각나는 도주로는 언더그라운드 하이웨이뿐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언더그라운드 하이웨이 진입로는 근린공원의 분수대에 나 있었고, 그곳에 경비대 병력이 채워진 이상 들키지 않고 지하로 갈 순 없었다.
리는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머신건을 겨누고 있을 경비대의 공중 셔틀들을 향해서.
“주, 주인님!”
멜리나가 외쳤다. 그런데 멜리나의 외침에 스민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환호에 가까웠다.
두터운 구름을 헤치며 리 일행의 머리 위에서 우주선 두 척이 나타났다. 기함 FTU 호와 디스트로이어 급 그린로즈 호였다.
선체 곳곳에서 스파크와 연기가 일었다. 하지만 항행 자체는 지장이 없는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고도를 낮추는 중이었다.
기이이잉-!
그린로즈 호의 배면에 달린 레이저 라이플과 머신건이 기계음을 냈다. 총구가 목표-지상의 경비대 오토모빌을 향해 고정되었다.
섬광과 더불어 합금탄과 빔이 동시에 쏟아졌다. 죽음의 빗줄기가 리 일행 주위로 퍼져나갔고, 이내 화염 해일이 경비대를 휩쓸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경비대의 오토모빌에서도 FTU 호와 그린로즈 호를 향해 로켓포 등등 대공 무기를 발사했다. 하지만 우주선의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결국 지상의 경비대는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