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127편. 대체 뭘 주워온 거야!!!
127편. 대체 뭘 주워온 거야!!!
닥터 홀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방금 전 원형 개조대 위의 처녀가 소리 높였던 고유명사를.
“부, 분명…… 로메리카 제국 집정황제의 외동딸인 유일황녀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같은데, 는 필요 없소. 내가 원하는 건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오.”
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일단 처녀의 젖꼭지로부터 손을 뗀 뒤 닥터 홀트 쪽으로 다가가며.
“이미 세뇌기는 저 계집의 기억 중추를 분석해 데이터를 내놓았을 게 아니오?”
디스플레이 앞에 도착한 리는 닥터 홀트를 채근했다. 닥터 홀트가 눈을 꿈쩍거렸다.
“쌰, 썅, 알아, 안다고! 그래서 당황하는 거잖아!”
“주인님, 어떡해요……. 이, 이건…….”
심상치 않았다. 닥터 홀트의 반응도, 디스플레이의 데이터를 살핀 이다의 표정도.
리는 닥터 홀트를 밀쳤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기억 중추 분석 결과에 대해서.
연상 단어 같은 언어 정보로서 뇌에 남아 있던 것은 공용어로 풀이되어 재현되었다. 이미지 정보로서 각인되었던 것들은 빛바랜 입체 영상으로 꾸며졌다.
아바마마. 폐하. 너는. 짐의. 하나뿐인. 딸. 항상. 로메리카를. 위해서. 짐의. 뒤를. 이어야. 하는. 어째서. 남자. 아이가. 아닌. 거지. 이런. 건. 원하지. 아니. 아무 것도. 남자가. 아니어도. 남자에. 버금가는. 전략과. 전술을. 무예와. 지혜를. 황후마마. 전하. 엄마. 죽지 마. 이런 거. 싫어. 훌륭한. 황녀가. 황제가. 되세요. 사랑해요. 황녀마마. 근위대장. 코르니쿠스 경. 아직. 검이. 느리옵니다. 더 빠르게. 더 높게. 강한. 황녀가. 황제가. 되시옵소서. 어머. 황녀님. 머리장식이. 어긋났사와요. 후훗, 우리 황녀님은. 이렇게나. 덜렁이이신데. 아무도. 그걸. 모르시니. 신기해요. 괜찮아. 마리엘이니까. 마리엘한테는. 들켜도. 괜찮은걸. 사랑스러운. 황녀가. 황제가. 되어주세요. 나디아. 부인. 이제. 부터. 당신이. 황후마마. 엄마가. 아닌데. 어마마마. 싫어. 무서워. 너는. 나의. 딸. 나의. 말대로. 내가. 폐하의. 부인. 너는. 착한. 황녀가. 황제가. 되어야. 되어야. 되어야…….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무수한 문자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1인칭으로 된 입체 영상 속에 숱하게 나타나는 것은 로메리카 제국 황도(皇都)―행성 워싱테눔 및 황궁의 모습들이었다. 특히 20대에서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서 재현된 남자는 현 로메리카 제국 황제―케이자르 아우구스투스 로메리카누스가 틀림없었다.
닥터 홀트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믿을 수밖에 없잖아…….”
이다 크비슬링 역시 흔들리는 시선으로 원형 개조대 위의 처녀를 바라보았다.
“저, 저 분이…… 로메리카의 황녀님…….”
처녀의 기억은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세뇌기가 읽지 못했다면 실제 뇌 안의 기억 중추에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파악된 기억은, 황궁 내 정원에서 전술 서적을 읽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모습이었다. 뒤에서 성별이나 나이를 분간하기 힘든 자가 처녀를 불렀고, 그 이후 언어 정보나 이미지 정보나 모든 것이 끊어졌다.
유 노아로서의 인조 인격은 브레인 프로텍터와 함께 덧씌워져 있던 모양이었다. 프로텍터가 박살남과 동시에 세뇌 이후의 자아까지 상실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50겹에 달하는 초A급 브레인 프로텍터였다. 그 질과 양이 아니었다면 닥터 홀트는 쉽게 파괴된 인격을 조잡한 세뇌의 결과로 착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정도 프로텍터를 꾸밀 기술력이라면 분명 의도된 결과였다.
프로텍터 파괴와 더불어 사라지는 인조 인격. 그 점을 고려했을 때, 브레인 프로텍터가 진정으로 보호하고 있었던 존재는 한낱 유 노아 따위가 아니라…….
닥터 홀트가 리를 노려보았다. 도미닉 뉴런 연구소의 수석 주임은 동요를 억누르려 노력하며 소리쳤다.
“어, 어이, 당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뭘 주워 온 거냐고!”
하지만 리는 닥터 홀트의 외침을 듣고 있지 않았다. 유 노아로 위장됐던 다이애나 황녀의 뇌로부터 추출된 이미지 영상에 어떤 젊은 시녀가 기록되어 있었다. 리는 마리엘이라고 불린 그 시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중이었다.
띠띠띠! 띠띠띠! 띠띠!
그때, 외부 도어에서 날카로운 신호음이 터졌다. 외부 도어 쪽을 지키고 있던 보디가드 슬레이브 칼 하인츠가 다급히 외쳤다.
“주인님! 긴급 상황입니다!”
그 소리들이 리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누군가 홀 안으로 진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접근 거부로 대응하고 있습니다만, 계속 통신을 요청해옵니다! 이대로 무시하면 강제로 도어 락을 해제하려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의 얼굴은 굳었다. 반면 닥터 홀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닥터 홀트는 자신이 인질이란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인지 서둘러 덤덤한 척 했다.
리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리엘이라는 이름과 재현 이미지 속의 시녀. 그것들이 어째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심경을 어지럽히는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은 그런 계집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에 먼저 대응해야 할 때였다.
집정황제의 외동딸이 어째서 제국군 특수전대의 행동대원이 되어 있었던가?
다이애나의 실종 사건이 뉴스가 된 적은 없었다. 지금 집정황제의 곁에는 황녀가 있었다.
유 노아가 진짜 다이애나가 맞다면 황제의 곁에 있는 황녀는 누구란 말인가? 애초에 누가 다이애나를 유 노아로 탈바꿈시켰는가?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의문들은 나중에 답을 구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유 노아에게 숨겨졌던 비밀은 생각보다 크고 심각했다. 다른 자들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될 터였다. 그런데 그 정보들이 세뇌기에 남고 말았다. 닥터 홀트에게도 비밀이 노출되었다.
리는 고민했다. 세뇌기에 남은 정보, 그리고 비밀을 알게 된 닥터 홀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언제나처럼 감정을 배제한 냉혹한 이성에 따라 계산했다. 그 계산의 답이 나왔을 때, 리는 닥터 홀트에게 샷건을 들이밀고 있었다.
“자, 잠깐, 기다려……!”
닥터 홀트가 절규했다. 하지만 리는 샷건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하겠소. 저 여자를 세뇌하시오. 세팅한 프로그램에 따라.”
“뭐? 이, 이봐, 그냥 여자가 아니라고! 황녀잖아, 황녀! 로, 로메리카의 황녀를 건드리겠다는 거야?! 정말 제국의 공적(公敵)이 되고 싶어?”
닥터 홀트가 식은땀을 흘리며 리에게 항변했다. 하지만 리의 눈동자에 깃든 살기는 진짜였다.
“유감이군. 이미 공적이라서, 나는.”
닥터 홀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으리란 사실을.
세뇌가 끝난 뒤에도 리가 살려주리란 보장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닥터 홀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세뇌가 진행되는 동안만이라도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다.
“씨, 씨발……. 오늘의 운수…… 나쁘지 않았었는데…….”
결국 닥터 홀트는 다시 콘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깨를 떨며, 공포와 절망으로 머릿속이 혼란한 상태로.
닥터 홀트가 봤다는 오늘의 운수는 맞는 셈이었다. 이제부터 요리할 처녀는 50년이 갓 넘은 인생을 살아오며 닥터 홀트가 다룬 것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재료였다.
로메리카 제국의 황녀를 마음대로 주물러 봤다! 그건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우려먹을 수 있는 이야기꺼리였다. 언제 죽느냐가 문제였지만.
“케이시. 이제부터 저 박사는 내가 직접 감시한다.”
리가 보디가드 슬레이브에게 명령했다.
“너는 칼 하인츠와 함께 입구를 지키도록. 들어오려는 자는 누구라도 제거해라.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무조건 버텨라.”
“맡겨 주십시오!”
방어할 땐 하더라도 너무 벽 쪽에 붙어 있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상대측에서 폭탄류를 사용할 경우, 제대로 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두 보디가드 슬레이브 모두 휩쓸려 버릴 가능성을 염려한 결과였다.
현재까지, 홀에 침입하려는 자들은 통신 요청만 보내오고 있었다. 리는 닥터 홀트를 위협하여 외부에 선포하게 하는 방법도 생각하긴 했다. 현재 중요한 실험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식으로.
하지만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 홀의 대형 세뇌기는 브레인 프로텍터 돌파 때문에 엄청난 양의 퓨전 에너지를 이미 사용했다. 분명 도미닉 뉴런 연구소 전체가 쓰는 에너지 총량에서 못해도 40퍼센트는 차지했을 터였다. 충분히 비상식적인 상황이었기에 빠르든 늦든 연구소 측이 제제를 걸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내부 감시 카메라들도 홀을 장악한 직후 강제적으로 종료시켰기에, 닥터 홀트가 통신을 통해 거짓말을 해봤자 저들은 침입을 단념하려 들지 않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선 닥터 홀트의 시간을 빼앗느니 놈을 더욱 재촉하여 황녀에 대한 세뇌를 최대한 빨리 완료 짓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다만 문제는…….’
연구소 전체를 관리하는 쪽에서 닥터 홀트가 관리하는 홀의 에너지 자체를 차단할 경우였다. 재료를 열심히 세뇌하던 중 전원이 나가버리기도 한다면 그 시점에서 재료는 십중팔구 뇌손상을 입게 될 것이 뻔했다.
일반적인 재료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개의치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저 처녀는 수많은 의문의 근원이자 그 의문들의 열쇠가 될 수 있는 다이애나 황녀였다. 리의 입맛대로 인격을 개조하기로 결정한 것과는 별개로, 황녀로서의 기억 자체는 보존해 둘 필요가 있었다.
패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으뜸패든 버리는 패든.
“이다! 홀의 제어기를 해킹해라. 메인 시스템에서 에너지를 차단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네, 아, 알겠어요!”
지시를 받은 처녀가 움직였다.
이제 세뇌기 근처에 남은 것은 리와 닥터 홀트뿐이었다. 리는 콘솔을 조작하는 닥터 홀트가 장난질을 치지 않는지, 샷건을 겨눈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위잉-! 즈이이이잉-!
원형 개조대 위에 붙들린 황녀―다이애나를 향해 기계 팔이 다시 모여들었다. 뇌 커넥터를 쓴 황녀는 눈이 가려져 소리만으로 짐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황녀의 불길한 느낌을 가중시켰다.
“기다려라!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이 몸이 뉘인지 밝혔지 않았느냐! 정녕 그대가 반역자라면 당장 날 해방하고 투항하여라. 그러면 아바마마께 말씀드려 선처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