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129편. 푸른 피비린내.
129편. 푸른 피비린내.
리가 버튼을 눌렀다.
“……?!”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런데 끊어지지 않았다. 다이애나 황녀의 비명이. 디스플레이 상으로는 분명 섹스 슬레이브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는데도.
삐삐삐!
에러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뇌 커넥터 회로 조작 불량. 오류가 계속되면 커넥터 후면의 매뉴얼 전환을 사용해주십시오.
“이런 젠장……!!!”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리가 욕설을 내뱉은 직후, 케이시와 칼 하인츠가 연사를 퍼붓던 틈새 저 너머에서 머신건의 가동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곧이어 무수한 합금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크허어어억!”
케이시였던 슬레이브는 그렇게 사라졌다. 케이시가 있던 자리엔 합금탄에 피떡이 된 고깃덩어리만 남았다. 머신건의 총탄 세례를 피한 것은 라이플을 포기하면서까지 몸을 내던져 옆으로 구른 칼 하인츠뿐이었다.
리 역시 머신 건이 난사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일단 세뇌기 콘솔로부터 이탈했다. 메인 시스템을 해킹하고 있는 이다가 걱정되긴 했지만 이다가 있는 곳은 반대편 구석이었다. 당장 합금탄 직격을 맞을 일은 없을 터였다.
투투투투투투투투!!!
“힉! 히익! 흐읏, 끅……!”
총성이 울릴 때마다 이다는 경기를 일으키면서도,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어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홀의 전원을 지키라는 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설령 그 결과 자신이 사살당하더라도. 세뇌된 슬레이브에겐 목숨을 잃는 것보다 주인님의 눈 밖에 나는 것이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
“이쪽이다, 칼 하인츠!”
“아, 알겠습니다……!”
리의 부름에 홀로 남은 보디가드 슬레이브가 신속히 포복했다. 머신 건 난사가 잠깐 뜸해진 틈을 타, 둘은 이미 레임이 시동을 걸어둔 상태인 오토모빌 뒤편으로 엄폐했다.
레임은 따로 운전석에서 내리게 하진 않았다. 시아드가 타고 온 언비저블 드래곤 소속의 검은색 중형 오토모빌은 기본적으로 방탄 처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정말로 총격이 집중될 경우, 얼마쯤은 버텨낼 수 있을 터였다.
‘연구소 놈들을 먼저 해결해야 하나. 아니면 황녀 쪽을……?’
주무기인 샷건을 매만지며 리는 생각에 잠겼다.
한편 라이플을 잃은 칼 하인츠는 오토매틱 피스톨과 그러네이드를 꺼내들었다. 리가 명령하지 않는 한 죽는 그 순간까지 싸우는 것은 보디가드 슬레이브로서의 당연한 자세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동안에도 다이애나의 비명은 홀에 가득 퍼졌다. 굳이 좋은 의미로 생각하자면, 두뇌 진화 실험의 높은 실패율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특유의 정신력으로 버티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닥터 홀트가 숱한 모르모트를 뇌사시키며 얻어낸 연구 데이터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리는 너무 낙관하지 않기로 했다. 두뇌 진화가 성공하길 기다리느니 섹스 슬레이브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게 나았다. 리가 황녀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복종과 봉사였지 신인류의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섹스 슬레이브 세뇌 프로그램으로 전환하기 위해선 디스플레이의 경고 문구에 표시되었듯, 처녀가 쓰고 있는 뇌 커넥터를 직접 만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자니, 케이시를 즉사시킨 연구소 측의 병기가 골칫덩이였다.
위잉-! 치키! 위잉-! 치키!
무언가 벽면을 박살내 균열을 넓히며 홀 안으로 진입했다. 이미 머신 건 난사 때부터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던 리는 특유의 기계음을 듣는 순간 확신하게 되었다.
칼 하인츠가 말했다.
“주인님, 저건…….”
“그래. 전투 로봇이다.”
다만, 행성 딥블루씨에서 돈 칼리오네의 딸이었던 칼베르타란 계집이 타고 나타난 전투 로봇과는 개념이 달랐다. 그쪽은 파일럿이 직접 세세히 컨트롤하는 기종이었지만 현재 홀로 진입한 것은 완전 무인기였다. 그랬기에 케이시와 칼 하인츠가 라이플탄을 퍼붓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진격할 수 있었을 터였다.
기잉-! 기, 기잉-!
양팔에 머신 건을 장착한 그 이족보행병기가 관찰 카메라를 번뜩이며 주위를 살폈다. 연구소의 경비병들은 아직 홀로 들어오지 않았다. 전투 로봇이 위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면 그제야 인력을 투입할 작정인 듯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위잉-! 치킥! 위잉-! 치킥!
전투 로봇이 몸을 돌렸다. 원형 개조대 위에서 울부짖는 알몸의 처녀―다이애나 황녀를 향해서.
‘빌어먹을!’
리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고통에 찬 다이애나의 절규를 전투 로봇의 둔한 인공 지능이 공격 의도를 지닌 기합이라고 착각한 듯했다.
동력식 하이퍼 머신 건이 합금탄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묘령의 처녀야 금세 곤죽이 되어버릴 터였다. 기계 따위가 황녀가 지닌 정치적 가치를 알 리 없었다. 기껏 데려온 다이애나가 케이시처럼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시체가 되어서야 여태까지 난리 친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하지만 무인 전투 로봇은 회전 총열을 가동시킬 뿐이었다. 냉혹하고 무심하게.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무수한 합금탄이 뼈와 살을 헤집고 피보라를 만들어내는 끔찍한 광경. 그것이 펼쳐지기 바로 직전,
슈슛!
파캉! 파캉!
“……끼잉?”
전투 로봇이 강아지 울음소리를 닮은 기계음을 냈다. 머신 건이 달린 양팔이 잘린 채.
지지지직-!
전투 로봇의 절단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오토모빌의 뒤쪽에서 리는 틀림없이 보았다. 홀의 상층부, 각종 장치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던 그곳으로부터 미처 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날아온 것을. 그것이 전투 로봇의 머신 건을 단숨에 끊어내는 광경을.
“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이애나 황녀의 비명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것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빠르고 격렬해졌다.
쉬앗! 쉿! 쉿! 가가가각!
마치 푸르게 빛나는 실이 전투 로봇을 이리저리 휘감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빛 하나하나마다 모두 예리한 커터였다.
처음엔 양 팔이었지만 그 다음엔 전투 로봇의 두 다리가 잘려나갔다. 본체가 홀 바닥에 곤두박질친 다음엔 카메라가 달린 머리부위가 난자당했다.
“끼잉, 끼이이잉……!”
사지가 잘려 스파크를 내는 와중에도 전투 로봇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려 애썼다. 전투 로봇의 위쪽 허공, 푸른빛의 무수한 실 줄기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긴 창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꿰그억!
그 창이 관통했다. 전투 로봇의 장갑을 헤집고, 엔진이 있는 중앙부를 정확하게.
쿠콰콰콰콰콰콰쾅!!!
폭발이 일어났다. 전투 로봇은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며 파편을 흩뿌렸고, 리와 칼 하인츠가 몸을 숨긴 오토모빌에도 파편들이 날아와 부딪쳤다. 다행히 폭발 자체는 직격이 아니어서 오토모빌 정도로도 버텨낼 수 있었다.
“전투 로봇을 순식간에…….”
칼 하인츠는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표정인 보디가드 슬레이브였다. 그런 칼 하인츠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이었다. 리 역시 눈앞의 광경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리는 현장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혹과 경악에 잠식되는 대신 냉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전투 로봇을 폭파시킨 직후, 처음 형성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푸른 창이 단숨에 흩어지는 모습을. 이젠 푸른 소용돌이처럼 홀 주변을 맴도는 모습을.
어린애라면 마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리는 머리가 굳은 어른이었다. 이 우주가 철저한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어른이었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닥터 홀트 놈. 두뇌 진화는 결국 저 병기를 위한 수단이었나.”
“병기 말씀입니까, 주인님?”
칼 하인츠의 물음에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작고 너무 많아서, 마치 푸른 물결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마이크로 머신이다.”
하나하나는 날파리 같은 크기였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미세한 머신들이 수백, 수천 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이합집산을 반복해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평행 우주 어디에서도 실용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는데.’
리는 불길함을 느꼈다. E. P. 핸드캐논이라는 로메리카 제국의 신무기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기술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저 스피드와 변형력. 예리함과 견고함. 그것들을 감안했을 때 섣불리 가까이 가서 확인하려다간 끔찍한 결과가 나올 터였다.
“진격! 진격!”
그때, 함성과 함께 일련의 무리들이 균열로부터 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호복을 갖춰 입은 연구소의 경비병들이었다. 다들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그 수는 대략 20여 명이었다. 전투 로봇까지 실패하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직접 돌입해 온 모양이었다.
“세뇌기는 아직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잘 됐군! 연구소 자산이 우선이다! 기계를 확보해!”
하지만 연구소 경비병들이 라이플을 겨눈 채 세뇌기로, 정확하게는 원형 개조대 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쉬잇-!
푸른 마이크로 머신 무리가 다시 움직였다. 소용돌이에서 여러 가닥을 가진 칼날로 변형되며.
“……!”
메인 시스템을 해킹하던 이다의 손놀림에 멎었다. 처녀는 공포에 질려 더 이상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오토모빌 안에 있던 레임도 눈을 크게 뜬 채 굳었고, 리와 칼 하인츠 역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끄아아아아아아악!!!”
몰살이 벌어졌다. 홀에 들어온 경비병들 전원이 뼈째로 갈려나갔다. 약 10초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그 모두를 죽인 뒤에야 마이크로 머신은 천연덕스럽게 흩어져, 소용돌이의 형태로 홀을 맴돌았다.
“크레이지 댄스란 이런 의미였나. 우린 거대한 믹서기 안에 갇혀 버린 꼴이군.”
리가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이제 뚜렷해졌다.”
리는 원형 개조대를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뇌 커넥터를 쓴 채 경련하는 알몸의 처녀를 노려보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