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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화 〉171편. 신혼집을 기다릴게. (171/330)



〈 171화 〉171편. 신혼집을 기다릴게.

171편. 신혼집을 기다릴게.

“유나 제임스. 당신에게 배정해 준 그 슬레이브에게서 소식은 아직 없는 거요?”

리가 언급한 소식이 내포하는 것의 의미를 자코미오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유나를 달라고 했었다.

자코미오는 신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요즘 유나와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네. 소피아가 입원한 이래로. 유나를 안으려고 하면 으음, 죽어버리지 뭔가. 그게.”

“저런.”

“아무래도 소피아가 깨어나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이. 지금 이대론 도저히 그 애를 마주할 면목이 없네.”

“……알겠소. 아무튼 유나 제임스를 더 쓰지 못하게 된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다른 활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는 짐작했다. 자코미오의 발기 불능은 심리적인 영향 때문일 거라고.

순간의 유혹을 못 이기고 손녀딸의 세뇌를 묵인했지만 자코미오는 리만큼 강신경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아들과 손녀를 가슴 깊이 사랑하던 남자였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손녀의 몸에 손을 댔다는 죄책감. 그것이 노인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소피아가 함대전에 휘말려 혼수상태에 빠지자, 죄책감은 자코미오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을 터였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리는 자코미오의 정신을 건드릴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최고 수준의 장인이라면, 뇌 개조로 인해 그 능력이 저하될 확률이 높았다.

리는 좀 더 자코미오를 지켜보기로 했다. 노인의 죄의식이 성생활 외의 업무에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리는 우주항을 떠났다. 소피아의 쾌차를 기원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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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의 할머니이자 나이트 사쿠라의 선대 대모. 그 노파의 이름이 소코였다는 사실을 리는 장례식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결혼식 때의 뼈아픈 교훈 덕분에 장례식의 경계는 더욱 삼엄했다. 특히 스텔스 배리어처럼 광학 위장 장치에 대한 색적을 위해 고성능 레이더가 식장에 몇 대나 배치되어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조직에서 고르고 고른 극소 중의 극소였다. 유키의 반려로서 자리를 잡은 리가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장례식은 어둠이 깔릴 무렵 끝났다.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유키는 울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나온 작은 유골 구슬을 움켜쥔 유키의 얼굴엔 비정과 냉혹이 흘렀다. 현재의 로메리카 제국을 향한 복수심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핏값을 받을 것이다.”

유키가 선언했다. 최소한 그 순간, 유키는 리의 아내라기보단 나이트 사쿠라의 대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장례식이 마무리 되고 며칠 뒤. 리의 새로운 기함―스페이스 배틀쉽 율리에타 호를 비롯해 유키의 기함 화이트 오로치 호, 기타 등등의 크고 작은 우주선들이 일제히 이륙했다.

선단은 최고 속도로 행성 히말라야의 대기권을 돌파했다. 콜리바르 공화국 본국에서의 손길이 뻗기 전에, 휴양지를 남겨두고서. 더 크고 잔인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는 우주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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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근거지가 필요했다. 그 점이 리와 유키가 제1순위로 동의한 부분이었다.

나이트 사쿠라의 휴양지가 있는 행성 히말라야나, 나이트 사쿠라의 근거지라 할 만한 행성 썩딕이나, 노바(Nova) 로메리카, 즉 새로운 로메리카의 출발점으로 삼기엔 부적합한 평행 우주들이었다.

둘 다 중립을 표방하긴 했다. 하지만 행성 히말라야는 콜리바르 공화국의, 행성 썩딕은 연합 폭력 조직의 실질적인 관리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행성 히말라야는 휴양지로서, 썩딕은 매춘굴로서의 지역 특색이 너무 강했다. 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 및 군사적인 강점을 갖고 있는 평행 우주였다.

유키는 자신의 반려에게 나이트 사쿠라 병력의 일부를 내어주었다. 스페이스 프리깃 세 척, 스페이스 디스트로이어 두 척, 스페이스 크루저 한 척이 리의 선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동안 포획한 우주선들까지 합하면 도합 열 척을 운용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결혼은 하되 서로에겐 속하지 않는다는 계약과는 일정 부분 어긋나는 결정이었다. 리의 품에서 리에게 파고들며, 리에게 자극 받으며 유키는 말했다.

“선행 투자라고 생각해 줘. 할머니라면 이렇게 했을 테고……아, 아아……♥”

때로는 유키가 율리에타 호로 건너왔고 때로는 리가 화이트 오로치 호로 건너갔다. 리는 약속했었다. 유키와 있을 땐 유키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가장 깊은 관계를 갖겠다고. 다행성 국가들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지역들을 항행하며 세력을 재편하면서도 리는 그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었다.

나이트 사쿠라의 협력으로 병력이 두 배 이상 확장되긴 했다. 그러나 리는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아더 케네디가 율리에타 호를 자폭시키려던 위기의 순간, 나이트 사쿠라의 조직원들이 트윈 카타나 호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전장을 이탈했었던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탈했던 조직원들은 나름의 처벌을 받은 상태였다. 그들 스스로 처벌 대상자 중의 10퍼센트를 뽑아 동료를 처형해야 했다. 옛 시대의 혹독한 형벌이었다.

그나마 나중엔 전의를 회복해서 리 구출을 도왔기에 그 정도였다. 만약 끝까지 전장에 복귀하지 않았더라면 세뇌기 혹은 인체 개조 캡슐로 끌려갔을 터였다.

한번 벌어졌던 일은 반복될 수 있었다. 리는 나이트 사쿠라에게 역으로 잠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리가 잠식한다면 모를까 다른 세력에게 잠식당하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제너럴 코레아누스는 황제의 개로 쓰이다가 삶아 먹혔다. 리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할 마음 따윈 없었다.

리에겐 좀 더 많은 세뇌 병력이 필요했다. 다소 능력의 저하는 있더라도 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만한 자들이 필요했다. 궁극적으론 그런 자들로 선단을 채워야 했다.

나이트 사쿠라의 조직원들은 그 작업을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어쩌면 유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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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지점의 평행 우주에서 유키와 나이트 사쿠라 본대는 리의 선단과 헤어지게 되었다. 기함 화이트 오로치 호를 따르는 우주선들이 향할 곳은 나이트 사쿠라의 근거지인 행성 썩딕이었다.

현 시점에서 행성 썩딕을 완전히 버리기엔 그곳에 두고 온 인적, 물적 자원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대규모로 움직일 경우 적의 탐지망에 발각당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행여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다 해도, 행성 썩딕과는 어느 정도 연계를 유지하는 편이 전략의 다양성 측면에서 더 유리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

메인 스크린에 떠오른 유키가 말했다. 율리에타 호의 지휘석에 앉은 채 리는 대답했다.

“조심해라. 로메리카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그곳 또한 안전을 장담할 순 없다.”

“그러니까 그 전에 달링이 신혼집을 마련해줘야겠지?”

“…….”

“믿고 있어.”

화이트 오로치 호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리를 향한 유키의 윙크를 마지막으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이다 크비슬링과 소피아는 유키가 데려갔다. 그 둘은 행성 썩딕 내의 시설에서 요양할 예정이었다.

소피아를 떠나보낸다는 생각에 마스터 자코미오는 크게 동요했었다. 하지만 리가 약속했다. 제대로 된 거점을 마련하면 소피아를 다시 부르겠노라고.

“나에겐 당신이 필요하오, 마스터. 손녀를 위해 당신까지 썩딕으로 가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시오. 허락할 생각 없으니까.”

“말 안 해도 아네. ……소피아가 싸움터에서 떠난다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구먼. 이미 난 자네에게 바친 몸일세. 마음대로 하게나.”

자코미오는 반쯤 포기한 듯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주인님.”

유키와의 통신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아만다가 리를 돌아보았다.

“다음 행선지의 좌표를 지정해주십시오.”

부선장으로서의 요청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만다는 율리에타 호의 선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휘하게 된 것이 우주선 한 척이 아니게 된 이상, 리가 계속 선장직을 수행할 순 없었다. 리는 형식적으로 율리에타 호의 선장일 뿐, 선단 사령관으로서의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편 FTU 호는 슬레이브 멜리나, 그린로즈 호는 슬레이브 구스타프, 발라우르 Ⅳ호는 슬레이브 아더에게 지휘권이 주어졌다. 나머지 우주선들의 선장직은 나이트 사쿠라 소속의 조직원들이 기존대로 맡은 상태였다.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다. 레밍턴의 데이터 칩을 통해 명단을 확인했을 때부터.

“행성 마블리움으로 침로를 돌린다.”

행성 마블리움은 제10군단 소속 44백인대 사단의 주둔지였다.

그곳에 있었다. 센추리온 닉 쿠퍼 및 그린로즈 호의 함장이었던 량에게 리 제거를 직접 지시했던 자가. 리가 제너럴 코레아누스임을 알고 있던 자가.

13대대의 지휘관, 가이우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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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인 표준 시각, 오후 1시. 리의 선단은 평행 우주 마블리움 외곽에서 점프 아웃했다.

마블리움은 황량한 행성이었다. 제1우주 행성―지구에 거대한 운석이 몇 차례 충돌했다면 현재의 마블리움 같은 모습이 되었을 터였다.

지구라기보단 화성에 가까운 붉은 대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자체 생산량은 형편없었다. 외부의 보급이 없다면 생존이 힘든 행성이었다. 마블리움에 거주하는 이들 중 민간인은 20퍼센트 안쪽인 것도 1차적으로는 그 때문이었다.

그런 한편, 마블리움은 다스부르크 제국과의 접경지였다. 그렇기에 사단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여 마블리움을 방어하는 한편 다스부르크 제국을 감시하고 있었다.

제10군단에 소속된 44백인대 사단의 정확한 병력은 대외비였다. 하지만 리는 로메리카 제국의 통상적인 사단 편제에 따라 대략적인 규모를 예측했다. 지상 군단은 6천~8천명 수준, 우주군은 50척 이내의 함대일 것이라고.

다스부르크 제국과의 접경지이긴 했지만 다스부르크 제국과 로메리카 제국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관계였다. 따라서 44백인대는 최정예 베테랑으로 편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선, 황제의 통제력이 강력한 중앙의 평행 우주들보다 더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전선이라는 이유로 풍족한 보급을 누리면서, 목숨을 걸 필요까지는 없이 정형화된 업무를 반복하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마블리움의 로메리카 제국군은 속된 말로 꿀 빠는 자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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