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5화 〉195편. 열쇠 확보. (195/330)



〈 195화 〉195편. 열쇠 확보.

195편. 열쇠 확보.

“용건은 잘 끝난 모양이군.”

“덕분에.”

“치워.”

칼리드가 말했다. 사내들이 샤를의 머리에 겨눴던 핸드건을 거뒀다. 샤를이 리의 곁으로 왔다.

하지만 리 일행은 아직 이 나이트클럽을 떠날 수 없었다. 칼리드의 사내들이 입구를 막아섰고, 그 너머에도 경비 조직원들이 공격 명령만을 기다렸다.

리는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어쩌면 샤를 혼자만으로도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필요했다. 시간이나 에너지 양 측면에서.

칼리드가 약속을 저버린다면 그때 대가를 치르게 해도 늦지 않았다. 리는 칼리드에게 두 번째 키워드를 말해주었다.

“흐음……. 이 키워드들이 사실이란 증거는? 그게 없다면 당신을 바로 보내줄 순 없어. 최소한 놈들의 보스가 제거되는지, 확실해질 때까지 남아 있어줘야겠는걸?”

칼리드는 분명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는 당황하는 대신 준비했던 것을 꺼냈다. 일전에 보여줬던 영상 녹화장치가 아닌, 음성 녹음장치였다.

라이벌 조직의 보디가드인 할레샤와 올림피아를 세뇌할 당시, 리는 키워드를 말하기 전 영상 녹화장치의 전원을 껐다. 그러나 음성 녹음장치는 여전히 그들의 대화를 담아내고 있었다. 칼리드가 재차 증거를 요구할 가능성을 리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흠.”

영상을 확인했었던 것처럼 칼리드는 녹음 파일을 확인했다. 영상에 나왔던 것과 동일한 처녀들의 할딱임이 들렸다. 처녀들에게 암시를 거는 리의 목소리도. 영상에는 없었던 키워드가 분명히 발음되고 있었다.

칼리드는 만족했다. 칼리드의 명령에 따라 사내들이 물러났다. 리와 샤를은 무기를 돌려받고 나이트클럽에서 나올 수 있었다.

…….
…….
…….

리는 딱히 칼리드가 도의적인 인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키는 것이 더 이득이라 판단했기에 칼리드는 약속을 지켰을 터였다. 리가 그랬듯이.

작별하던 순간, 리를 보는 칼리드의 눈빛은 첫 대면 때와는 질감이 달라져 있었다. 리가 칼리드를 어느 정도 인정했듯 칼리드 역시 리를 인정했다. 정말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에서 악명이 높은 그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리와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건 없었다. 최소한, 이번의 거래처럼 공정한 물물교환에 가까웠던 것을 칼리드 측에서 먼저 망쳐버릴 까닭은 없었던 것이다.

리 역시 행성 우라트마의 지역 폭력 조직과 적절한 인연을 맺었다고 자평했다. 훗날,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리의 세력이 행성 우라트마를 공식적으로 장악하게 되는 날. 연계가 있는 지역 폭력 조직을 활용해 적절히 내부 통제를 행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리는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에, 칼리드 정도의 안목을 가진 자가 속한 조직은 지금보다 훨씬 성장한 상태일 터였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부터 문제겠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 웃음을 지우고 샤를에게 말했다.

“하즐과 유게니우스, 저우는 전원 사망했다.”

표준 시각 새벽 1시경. 칼리드의 나이트클럽―바닐라 걸을 출발한 리 일행은 오토모빌을 몰고 내부 순환로를 달리고 있었다.

“…….”

전투 슬레이브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도 샤를은 덤덤했다. 아마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근거지에서 새로운 병력을 차출할 여력이 없다. 열쇠를 확보하는 작업은 너와 나만으로 한다. 각오하도록.”

“네, 주인님.”

리가 언급한 열쇠. 그 상대는 아바리쿰 브레인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 중 하나였다. 정보업자의 리스트 상위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행성 브레이눔의 도미닉 뉴런 연구소에서 일하던 닥터 홀트보다 한 단계 낮은 직위를 갖고 있었다.

아바리쿰 브레인 연구소야말로 제너럴 코레아누스가 끌려갔던 장소였다. 장소가 특정된 이상, 노려야 할 목표가 생긴 이상 리는 전력으로 그곳에 부딪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스트 상위에 있던 이 인물이야말로 아바리쿰으로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리는 판단했다.

리미트로 삼은 오전 6시까지는 다섯 시간이 조금 덜 남아 있었다. 자신이 있다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샤를이 오토모빌의 스티어링 휠을 꺾었다. 수석 연구원의 현 주소지로 적힌 시내의 아파트를 향해서.

‘사라 크림슨, 여성, 49세라…….’

샤를의 옆인 조수석에서 리는 열쇠의 신상정보를 내려다보았다.

인쇄된 사진 속에는 조금 우울해 보이는 인상의 단발머리 여자가 있었다. 말만 40대일 뿐 이제 곧 50대에 접어들 나이인 것에 비하면 몇 년 더 젊어 보였다. 사진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어서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그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
…….
…….

표준 시각 새벽 1시 24분. 오토모빌이 도심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사라 크림슨이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기록상, 사라 크림슨은 독신이었다. 자존심 높은 엘리트 여성이기에, 결혼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미 결혼했었다가 싱글로 돌아왔거나.

수석 연구원은 사라 크림슨 말고도 몇이 더 있었다. 그럼에도 리가 사라를 열쇠로 삼았던 것은 사라가 독신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혼자 사는 여자. 최소한, 가족과 함께 사는 남자를 노리는 것보다 훨씬 성공 확률이 높을 터였다.

리는 오토모빌에서 쌍안경을 통해 아파트를 살폈다. 사라 크림슨이 사는 그 아파트는 복도형 구조가 아니었다. 한 층당 두 호실이 마주보고 설계되어 있었다.

‘방범 카메라에 기록이 남지 않으려면…….’

리는 접근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완벽하고 안전한 것만 추구하다간 시간만 낭비될 뿐이었다. 지금은 돌파해야 할 때였다.

“가자, 샤를.”

“네, 주인님.”

납치가 알려지고 촬영된 영상을 되감아 보는 것은 아마 아침이 된 뒤의 일일 터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낸다면 상관없었다.

리와 샤를은 흡착판을 이용해 아파트 외벽을 올라갔다. 옥상에 도착한 뒤, 로프를 고정하고 아래로 레펠을 탔다. 사라 크림슨의 집은 아파트 중앙 쪽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지상에서 바로 흡착판으로 오르기엔 난도가 오히려 높았던 것이다.

휘잇-! 쉿-!

샤를을 일단 옥상에 남겨둔 채, 리만 어둠을 가로질러 내려왔다. 20층 아파트였고, 사라 크림슨은 17층에 살고 있었다.

외곽을 순찰하는 경비원이 나타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외벽에 매달린 리를 발견하고 뭔가를 조치하기도 전에 샤를의 스나이핑 라이플이 화약 냄새를 뿜을 터였다.

몸 대부분이 기계로 개조된 샤를이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의 저격이라도 그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사라 크림슨이 자체적으로 설치한 경비 업체의 감지 장치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의 기본 보안 시설은 이런 일이 일상적인 리에겐 한숨 나오는 수준이었다.

드드듯-!

리의 유리칼이 베란다 창에 구멍을 만들었다. 리는 그곳을 통해 잠금장치를 풀었다. 창을 열고, 미끄러지듯 집안으로 들어갔다.

…….
…….
…….

집은 작았다. 사라 크림슨은 수석 연구원이긴 해도 경제적으로 그리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 같진 않았다. 이렇게 보안이 허술한 아파트에 살고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었지만.

리는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적게 내도록 주의했다. 캄캄한 집안을 은밀하게 나아갔다. 사라 크림슨의 침실을 찾아.

새벽 2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각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깊이 잠들기 충분했을 때였다.

그러나 리는 방심하지 않았다. 사라 크림슨은 웬만한 사람이 아닌, 연구원이었다. 즉, 너드일 확률이 높았다. 너드일 경우, 어쩌면…….

따각따각따각따각따각따각.

‘……!’

리의 귀에 어떤 소리가 포착되었다. 분명 발작적으로 단말기의 자판을 누르는 소리였다.

부엌을 벗어나자, 자판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저편으로부터 빛이 보였다. 빛은 살짝 열린 문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리의 추측은 옳았다. 사라 크림슨은 이 새벽에도 아직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연구에 빠진 너드답게, 연구소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도 데이터와 이론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한 커피를 테이블에 두고 단말기 앞에 앉아서.

그래서였다. 리가 베란다를 통해 침입해 오는 것도, 문 바로 앞까지 접근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던 까닭은.

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

사라 크림슨―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뒤통수가 보였다. 흰색에 가까운 백금발이, 타자를 칠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찰랑거렸다.

리는 품에 손을 넣었다. 무엇을 꺼낼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수면 유도제를 섞은 마약? 칼리드의 라이벌 조직 보디가드 계집년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걸 주사한 뒤 성감대를 자극한다? 장기적으로 뇌가 망가지든 말든, 단시간에 효과를 내는 암시를 걸어 아바리쿰 브레인 연구소로의 길을 열게 만든다?

‘그럴 순 없지.’

리는 마음을 정했다. 사라 크림슨에겐 향정신성 약액이 아닌, 보다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자고.

그것은 사라 크림슨이 뇌신경계통의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어기제에 어떤 처리를 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정신을 건드렸다가 사라가 죽거나, 뇌가 너무 일찍 파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뇌에 경보 칩이라도 박아, 이상을 겪을 경우 연구소에 직접 연락이 가게라도 해뒀다면 리로선 큰 낭패였다.

때로는 간단한 것이 최고였다. 리가 품에서 꺼내든 것은 글라디우스 나이프였다. 빛줄기마저 자를 듯이 날이 서 있었다.

스탠드 불빛이 날에 반사되어 들키는 것 따위의 초보 짓은 하지 않았다. 방문은 소리 없이 열렸고, 리는 빨랐다.

“……힉?”

사라 크림슨이 침입자를 눈치 챘을 땐, 이미 글라디우스 나이프가 턱밑 살에 닿아 있었다. 리는 사라의 입을 틀어막아 더 이상의 비명이 나오는 걸 막았다.

“흐읍! 읍……!”

중년 여인이 버둥거렸다. 단말기 옆에 뒀던 잔이 넘어졌다. 자판에 커피가 쏟아졌고, 파직! 하는 스파크와 함께 스크린이 꺼졌다.

리는 펄떡이는 상대를 힘으로 찍어 눌렀다. 사라 크림슨이 바닥에 쓰러졌다. 리는 자신의 몸 아래에 사라를 능숙하게 깔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강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난 겁탈범이 아니오. 당신을 건드릴 생각 따윈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으읍……!”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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