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외전 2편. 금빛 머리카락의 그 처녀. (3)
외전 2-3.
닉 쿠퍼가 기합과 함께 실드를 가로로 휘둘렀다.
지금 리에겐 실드가 없었다. 닉 쿠퍼가 휘두른 실드를 피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인간을 초월하는 도약력이 없는 한 뛰어서 피하지 못할 터였다. 활로는 아래뿐이었다.
아만다는 닉 쿠퍼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리고 리가 몸을 숙여 실드를 피하는 순간, 아만다가 진정한 결정타를 날릴 계획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직!
“아, 아니?!”
닉 쿠퍼와 아만다의 계획은 그저 계획으로 끝났다. 리가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리는 하이퍼 블레이드를 날아드는 실드에 정면으로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가가가각!
실드의 가장자리 날과 하이퍼 블레이드의 날이 격돌했다. 스파크는 물론, 소름끼치는 소리를 흩뿌렸다.
“끄흑!”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리는 닉 쿠퍼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실드를 고작 하이퍼 블레이드만으로 멈춰 세웠다. 게다가 두 손도 아닌 한 손만으로 저 검을 들고 있었다.
닉 쿠퍼는 서둘러 계획을 수정했다. 실드를 들고 있지 않았던 오른손의 하이퍼 블레이드를 고쳐 잡았다. 리의 팔이라도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리가 더 빨랐다. 실드가 막혀 비어버린 닉 쿠퍼의 명치에 리의 충격봉이 박혔다.
까자자자자자자자작!
“아욱!”
닉 쿠퍼가 비명을 터뜨렸다.
아만다는 닉 쿠퍼의 실드가 막혔을 때부터 기존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하이퍼 블레이드를 곤두세우고 바닥을 박찼다. 그대로 리에게 검날을 박아 넣을 작정이었다.
“느려.”
퍽!
“흐읏!”
리는 상대가 여자라고 사정 따위 봐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다면 다섯 살배기 아이라도 용서 받지 못했을 터였다.
한 손으론 닉 쿠퍼의 실드를 막고 다른 손으론 닉 쿠퍼의 명치에 충격봉을 박은 채, 리는 뛰어드는 아만다의 손목에 면도날 같은 앞발차기를 먹였다.
쨍그랑!
아만다의 손에서 하이퍼 블레이드가 떨어졌다.
처녀를 1차적으로 무력화시킨 뒤, 리는 아만다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비록 하이퍼 블레이드를 떨어뜨리는 순간 아만다가 글라디우스 나이프를 꺼내들었어도, 리의 정신은 이제 닉 쿠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닉 쿠퍼가 이 특수전대의 리더였기 때문이었다. 전투에서 지휘관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리의 충격봉에 명치를 직격 당했을 때, 평범한 청년이었다면 벌써 기절하고 말았을 터였다. 하지만 특수전대의 리더답게 닉 쿠퍼는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닉 쿠퍼는 비인간적인 충격을 견디며 리를 노려보았다. 바들거리면서도 손에 쥔 하이퍼 블레이드를 놓지 않았다.
닉 쿠퍼는 여기서 버텨야 했다. 자신과 아만다의 뒤에는 아직도 행동대원들이 열 명도 넘게 있었다. 닉 쿠퍼와 아만다가 방패가 되어 리를 붙잡아두는 동안 그 행동대원들이 파상 공격을 취해올 터였다.
“흠.”
리는 명치에 충격봉을 맞고도 닉 쿠퍼가 쓰러지지 않자 망설임 없이 충격봉을 꺾었다. 그리고 충격봉의 손잡이로 닉 쿠퍼의 턱을 올려쳤다.
“큭!”
닉 쿠퍼의 자세가 무너졌다. 닉 쿠퍼는 팔을 편 채로 뒤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리를 글라디우스 나이프로 연격 하려던 아만다와 충돌하고 말았다.
“앗……!”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만다는 유능했다. 자신과 충돌한 닉 쿠퍼를 붙들어 보호하는 동시에, 처녀는 리를 향해서 글라디우스 나이프를 내질렀다.
서걱!
아만다가 쥔 글라디우스 나이프의 예리한 칼날이 리의 옆머리를 베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회피였다.
아만다는 민첩했다. 그러나 리 역시 달인 수준의 반사 신경을 갖고 있었다. 아만다는 유능했다. 그러나 리가 약간 더 유능했다. 그것들이 모두 처녀의 불행이 되었다.
그래도 리는 아만다의 실력에 내심 놀랐다. 몇 센티만 더 깊이 들어왔다면 귀가 잘렸을 터였다. 그 직후엔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터였다.
하지만 아만다는 이미 실패했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고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위험한 계집이군.’
리는 닉 쿠퍼의 턱을 올려쳤던 충격봉을 비틀었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아만다의 겨드랑이에 찔러 넣었다.
빠지지직!!!
“아악!”
아만다가 비명을 질렀다.
처녀의 팔에 경련이 일어났다. 글라디우스 나이프를 도저히 쥐고 있을 수 없었다. 아만다의 섬세한 손가락이 하이퍼 블레이드에 이어서 글라디우스 나이프까지 놓쳤다.
쨍그랑!
반면 리는 여전히 하이퍼 블레이드를 꽉 쥔 채였다. 닉 쿠퍼가 뒤로 넘어간 바람에 닉 쿠퍼의 실드가 리의 검날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리는 하이퍼 블레이드를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다.
“센추리온!”
“조심하십시오!”
“이 개자식!!!!!!!”
닉 쿠퍼와 아만다보다 뒤에 있던 로메리카 제국군 특수전대 행동대원들이 갖가지 표정과 갖가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닉 쿠퍼만을 노려보았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젊은 리더를.
세뇌 재료로 삼기 위해선 되도록 신체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다수인 적의 전의를 꺾는 것이 그보다 중요했다.
리는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놈들의 리더를 꽤 가혹한 상태로 만들어버릴 필요가 있다고.
서걱!
“끄악!”
서거걱!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리의 하이퍼 블레이드가 닉 쿠퍼를 중심으로 거꾸로 된 브이(V) 자를 그렸다. 그와 동시에, 청년의 두 팔이 한꺼번에 잘려나갔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닉 쿠퍼의 몸통 양쪽―방금까지 팔이 붙어 있던 그곳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센추리오오오오오오오오온!!!!!!”
삽시간에 벌어진 그 참극을 보고서 특수전대 행동대원들이 절규했다.
“아, 안 돼!!!!!”
“죽여! 저 새끼 죽여!!!!”
하지만 그 와중에도 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차갑고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리는 이미 반 이상 시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닉 쿠퍼를 옆으로 밀쳐 쓰러뜨렸다. 그리고 아직도 충격봉의 여파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아만다를 향해 다시 충격봉을 내리찍었다.
파지지지지직!
“아…….”
뒷덜미에 충격봉을 맞은 아만다는 큰 비명도 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최전열의 둘-부대의 리더와 부대의 최고 실력자를 단숨에 저항불능으로 만든 뒤에야 리는 비로소 다른 행동대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른 행동대원들도 지켜만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닉 쿠퍼와 아만다가 너무나 쉽게 제압당하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긴 했지만, 그들 역시 숱한 전투를 겪어온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울분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리로서는, 닉 쿠퍼가 당한 끔찍한 모습에 그들의 넋이 빠져 있던 짧은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위잉-! 철컥!
행동대원들의 뒤쪽, 복도 옆면의 벽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리의 보디가드 슬레이브 네 명이었다. 각자 슈마허와 응웬, 핫산과 샤오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다른 평행 우주의 용병 출신으로서 리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세뇌된 자들이었다. 단순 근접전 능력만 놓고 봤을 땐 로메리카 제국 특수전대 행동대원들보다도 실력이 나았다.
그 보디가드 슬레이브들이 행동대원들의 대열 후방에서 충격봉을 휘둘렀다.
파직! 파지지지직!
허를 찔린 행동대원들은 실드로 충격봉을 막아내지 못했다.
“흐억!”
스파크가 튈 때마다 행동대원들이 신음하며 너부러졌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쓰러진 닉 쿠퍼와 아만다를 짓밟고 선 리가 있었다. 이제 H구역에서 포위당한 쪽은 로메리카 제국군들이었다.
리는 행동대원들의 노출된 목덜미나 겨드랑이, 명치, 허벅지 등등에 충격봉을 때려 박았다. 자신을 향해 행동대원들이 필사적으로 내지르는 하이퍼 블레이드를 피하며. 혹은 자신의 하이퍼 블레이드로 튕겨내며,
치직! 빠직! 와지지직!
“끄악!”
“히읏!”
“억!”
리가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할 때마다 행동대원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나 또한 충격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어두침침해졌고, 바닥에 쓰러진 처녀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다.
눈꺼풀이 닫히기 직전, 여전히 흔들림 없이 전우들을 거꾸러뜨리고 있는 리를 보며 한나는 생각했다. 마치 악마를 상대한 것 같다고.
그렇게 하여, FTU 호를 습격한 강습 전투 양륙함 댄들라이언 31호의 승무원들을 비롯한 닉 쿠퍼 특수전대는 전원 리에게 포획 당했다.
…….
…….
…….
“으응…….”
“……만다.”
“읏…….”
아만다는 두통을 느꼈다. 충격봉에 맞았던 곳이 뻐근했다.
“닉…… 쿠퍼……님…….”
하지만 자신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아만다의 머릿속엔 센추리온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의식을 찾았나.”
“……!?”
남자의 목소리에 아만다는 눈을 떴다.
아직 정신이 혼미했지만 처녀는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센추리온 닉 쿠퍼를 그렇게 만든, 용서할 수 없는 자의 목소리였다.
눈을 뜬 아만다의 앞에 리가 있었다.
“좋은 눈빛이다.”
자신을 노려보는 아만다에게 리가 말했다.
“아앗!”
아만다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팔과 다리가 결박된 채 기계장치에 의해 벌려져 있다는 사실을.
“과연, 개인용으로 쓸 만 하겠군.”
아만다가 입었던 전투 슈트 또한 제거된 채였다. 그래서 처녀는 알몸이었다. 부끄럽고 소중한 곳들을 리에게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
하지만 아만다는 기죽지 않았다. 아만다는 로메리카 제국 닉 쿠퍼 특수전대가 자랑하는 최고의 전사였다. 비록 낯선 사내에게 알몸을 내비칠지언정,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만다는 올곧은 마음을 꺾지 않은 채 파란 눈동자로 리를 노려봤다. 드라이아이스처럼 날카롭고도 싸늘한 시선이었다.
“날…… 어떻게 할 셈이지?”
“짐작할 텐데.”
리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겪은 동료들을 구경하겠나?”
“……!”
리가 가리킨 쪽을 바라본 아만다는 섬세한 눈썹을 찡그렸다.
전우들이 거기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아만다와 함께 이 우주선으로 용감히 뛰어들었던 전우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행동대원들은 전투 슈트나 방호복을 입지 않았다. 누군가는 발가벗겨져 알몸이었고, 누군가는 성감대를 훤히 드러낸 민망한 슈트를 입은 상태였다.
그들이 특수전대 행동대원 출신임을 더 이상 알아보기 힘들었다. 알몸이기 때문에, 음란한 슈트를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쾌락에 절어서 헤벌쭉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