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숲이에용 (4/190)



〈 4화 〉숲이에용

풀과 흙냄새가 베여나오는 나는 바닥.
여전히 딱딱하고 차갑지만, 동굴에 비하면 푹신하고 따듯하게마저 느껴지는 어느 장소에서 나의 의식은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일까?

“….”

수면 속에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동굴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노예였던 일부터 수녀님의 도움으로 도망칠 기회를 얻었던 기억.
그렇게 도망친 끝에 뛰어내려, 잠들어 있던 세계의 용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일과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 용을 풀어주고 눈을 감은 것까지도….

[…!]

마지막. 노이즈로만 들렸던 용의 말을 떠올린다.
아마 ‘버텨라!’ 같은 말이지 싶었지만…틀림없이 늦고 말았다.
죽음을 예측한 생의 감으로 확신컨대, 나는  순간 확실히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막 각성하기 시작한 나의 의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죽어서 사후세계에라도 온 것일까?

“하─압.”

아니. 그렇다기에는 작은 동물들이 쏘다니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가슴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귓가에 전해져왔다.

틀림없는 생의 소리.

혹시 기적처럼 늦지 않아서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면….

“….”

끊어지기 직전의 기억, 그리고 뚫어진 가슴 한편에 남은 확고한 죽음의 상흔이 서서히 각성하기 시작하는 이성과 엉겨 붙으며 이를 불가능하다, 고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등에 베인 이 감각.
얼굴을 간질이는 풀과 코끝을 스치는 산들바람의 향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하여서….
나는….

“일어나아아앗!”
“아아악!”

일순 ‘빽─!’…하고 예고도 없이 귓속을 파고드는 우렁찬 목소리에 번쩍하고 눈을 뜨여진 나는 힘차게 벌렁거리는 심장을 감싸 안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하아…. 나…살았? 읏.”

순식간에 폐에 가득 담기는 공기와 함께 온몸의 감각이 끓어 넘치듯 머릿속으로 전해져온다.
두통과 함께 아려오는 몸,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관절, 타는 듯한 눈동자와 따가운 목과 귓구멍, 피 맛이 감도는 입안.
그리고….

“우욱….”
“…어?”

무엇보다 빠르게 차오르는 구토감.

“…웩, 우웩.”
“헉! 그, 그대?”

황급히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어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내자, 위액의 시큼한 맛과 함께 비릿한 철분의 맛이 강렬하게 퍼져나간다.
아무렇게나 피어난 풀들 위로 붉은 피가 섞인 투명하고 끈적한 위액이 ‘투둑투둑’ 떨어져 내렸다.

“후우…케흑! 커흑…웩!”
“아, 아니 괘, 괜찮은가…?”
“우웩….”
“앗!  피를…! 저, 저렇게 많이? 읏…분명 재생은 끝났을 터인데. 아, 체내에 남아있던 혈액을 토해내는 것인가?”

…목소리?
잘 아는 목소리다.

…아니. 아닌가?
머리가열이 나는 것처럼 뜨겁고 아파서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휴. 계약자여…. 이게 무슨 육갑인가 그래?”
“욱…우웩….”
“아이고 옳다. 옳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리 말하며 나의 등을 토닥거려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한결 편히…피를 쏟아  수 있었다.

“쿨럭…. 하아…하아….”

그렇게 한참 속을 게워낸 나는 여전히 입안에 감도는 시큼한 위액과 비릿한 혈액을 모아 침을 뱉듯 ‘퉤’ 하고 뱉어낸 후.
숨을 짧게 끊어 헐떡이며,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으….”
“이제 괜찮은가?”
“아, 아니….”

두통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목구멍은 여전히 찢어질 듯 아프다.
입가에 가득한  맛 때문일까? 온몸에 힘이 빠지고 귀가 먹먹한듯한 느낌도 들었다.

아, 아니지. 귀가 아픈 건 분명 누가 소리를 질러서….

“끄, 끝난 건가? 하…정말 놀라게 하긴. 정말…. 인간은 이다지도 나약하니 살리는 것도 쉽지 않군.”
“….”

응?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질렀던 그 정신 나간 목소리와 비슷했던 거 같은데?
아, 두통이 다시….

“하아…하아….”

심호흡으로 다시금 차오르는 두통을 진정시킨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려 미끈거리는 입술 주변을 훑었다.
입 주변에 피도 잔뜩 묻었던 것인지 붉은 흔적이 팔에 길쭉하게 묻어나왔지만, 내가 토해낸 혈흔을 생각하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리라.

“여, 여긴…?”

조금 시야를 올린 나는 여전히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관찰한다.
보이는 것은 초목.
햇빛이 드는 공간에 무성하게 자란 주변 식물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솟아난 큰 나무들.

“…근처의 숲이다.”
“숲?”
“그렇다. 정확히 어딘지는 묻지 마라. 이 몸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모호하지만 그래도 착실히 나의 물음에 대답해주는 조금 앳된 여성의 목소리.
역시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였다.

“…설마.”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나의 등을 토닥여주던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

“….”

귀를 기울이기면 서로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은 가까운 거리에….

“그래. 이제 정말 괜찮은가?”

두 개의 태양처럼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익숙한 기분이 들어오는…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강렬한 인상의 소녀.

“….”
“응? 왜 그러지? 아직 문제가 있나?”

내가 끔찍할 정도로멍청한 표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안 그대로 사납게 올라간 눈매를 조금 더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냥….”
“그냥?”
“…아무것도 아냐.”
“…실없긴.”

그녀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젠장.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아름다움이다.
덕분에 그녀를 계속해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시야를 넓히다가….

“…응? 헉!”

그녀의 현 상태를 겨우 자각한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내가 뱉어놓은 핏덩이 위로 엎어질 뻔했다.

“응? 뭔가? 왜 기분 나쁘게 남의 얼굴을 보고 놀란 토끼처럼 그리 펄쩍 뛰며 멀어지고 지랄이지?”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너…너어, 씹! 왜,  다 벗고 있어…!”

그 말 그대로.
내 눈에 들어온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상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옷이 없으니까 벗고 있지 왜 벗고 있겠는가?”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그 작은 가슴을  보였다.
그야 그렇게도 아담하리만치 작은 가슴을 가졌으니, 부끄러움이 없어도 이해는 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솜털조차 자라지 않고 그대로 드러난 아래쪽은 좀 가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 옷은? 옷은 왜 없는데?”
“이 몸이 옷을 가지고 다니는 게 더 웃기지 않은가? 의복같이 오히려 단순한 것일수록 오래되면 만들기도 어려워져서…시간이 좀 걸리는 거다.”
“시, 시간? 아니…그럼 됐고 대충이라도 좀 가려! 팔다리나…그 근처 풀잎이라도 쓰던가!”
“귀찮으니 싫다.”
“…미친.”

후…. 진정하자.
평정심을 잃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

나는 다시금 녀석을슬쩍 보았다.
확실히 그 얼굴만큼이나 전체적으로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한 슬렌더한 체형이 마치 작정하고 만든 조형물처럼 완벽하게 매끈하고도 아름답긴 하다.

 하나 찾으려 해도 그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는 어떠한 결점도 찾을 수 없었으며, 작게나마 튀어나온 말랑한 가슴살에 찍힌 연한 핑크빛의 유두는 성욕이 아니더라도 그냥 한번 건드리고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형태나 색상에 있어 극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은  그대로 예술품을 보는 심정으로써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후훗.”
“응? 뭐지 갑자기? …좀 때리고 싶어지는데?”

그래. 진정하자.
애초에 많이 쳐줘 봐야 고작 이십 대 초반이나 될 법한 체형.
얼굴은 인정하지만, 두 손에 가득 차다 싶을 정도의 연상의 거유녀가 취향인 나에게 있어서는 정욕이 솟아날 정도의 몸매는 아니었다.
거기다 제일 중요한 것은….

“…뭐? 왜? 아까부터 뭔데 자꾸?”
“….”

가장 중요한 내용물이 이것인데.
고작 알몸 좀 보여줬다고 당황하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는다.

“후우….”

그리하여 다시 크게 호흡,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조용히 손을 올려 본래의 형태로 돌아온 나 자신의 가슴 부근에 손을 올려 보았다.

두근두근─

 어느 때보다도 강인한 심장 고동이 나의 손바닥에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인가?

“분명 가슴을 찔렸을 텐데….”

모두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옷 위로 뚫어진 구멍이 커, 그래도 넝마 같던 헌 옷이 아예 걸래 짝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늦지 않은 건가?”
“아니. 늦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적발의 소녀는 나의 중얼거림을 강하게 부정한다.

“…늦다니?”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황금빛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조금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말 그대로다.”

작게 한숨을 내 쉰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이 몸은 늦고, 그대는 죽었다.  자리. 그곳에서 숨을 거둬 싸늘하게 식은 것이다.”

마치 씁쓸한 기억을 상기시키듯  중얼거림이었다.

“죽었다고 내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 다시금 가슴에 손을 올려 보았다.
여전히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지금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죽은 자는 되살릴  없다며?”
“그렇다.”

즉답했다. 묻고 싶은 것이 더욱 많아져 간다.
하지만 그전에 가장 먼저….

“너….”
“음?”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이제 와 물어보는 것도 우습다만, 꼭 해야 하는 질문이….

“너…. 그 용이냐?”
“그렇다.”
“…진짜?”
“음? 알고서 대화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는가?”
“아니. 대충 그렇구나 싶긴 했는데….”

숨을 삼키는 심정으로 입을 열어 물었는데…시원할 정도의 즉답이었다.
잠시나마 아름답다 느낀 눈앞의 붉은 소녀가 그 밥맛없던 용이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심정이었다.

“음?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너 설마 생각이나 기억을….”
“못 읽는다.”
“어 진짜? 이제 못 읽어?”
“…원하는가?”
“미쳤냐?”

그 동굴에서 생각으로 하는 대화를 나름 익히긴 했다만, 항시 정신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현재로서는 내 모든 생각을 그대로 읽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흐응…. 뭐,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연결된 것도 아니고 혈이나 육을 받는 중도 아니니.  상태로는 어렵다. 일방적으로 보내는 거면 가능하지만….”

[이런 식으로.]

“….”

두통만 심해지고 별로인데?

“두통만 심해지고 별로라고 생각하는가?”
“너 진짜  읽는  맞아?”
“모르고 싶어도 그대의 얼굴에 그리 쓰여 있는 걸 어쩌란 말이냐.”
“….”

젠장. 진짜  녀석이  녀석이라고?
이번에도  표정을 읽은 것인지 녀석은 히죽거리며 다가와 제 머리를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자, 잘 봐라. 이렇게 뿔도 달리고 여기…이렇게 꼬리도 있지 않으냐.”
“어, 엉덩이는 왜 들이미는 거야!”
“아니. 보라고 자!”

확실히 나름 자랑할 수준은 되는지.
그리 말하는 녀석의 머리 위에는 크고 단단한 뿔이 우뚝 솟아나 있었고, 엉덩이위쪽에는 도무지 그 곱고 가늘게 휘어진 등줄기로부터 이어져 나왔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크고 굵은, 꼬리가 살랑이고 있었다.

허리 가죽에서 보이는 척추는 분명 사람의 그것인데.
정말 어찌 저리 굵은 것이 이어져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의…칠흑같이 검고 매끄러운 비늘로 덮인,  허리만치 굵은 꼬리였다.

분명 꼬리뼈와 척추의 단단함 덕분이겠지?

나는 다시금 시선을 올려 그녀의 머리 위로 크게 뻗어 나온 것을 보았다.
이 또한 마치 흑요석처럼 검고 반짝거리는 뿔이었다.

역시나 그 주먹만 한 얼굴에서 뻗어 나온 것치고는 상당한 수준의 크기여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으로 ‘뚝’ 부러져 있는 오른쪽 뿔조차 그녀의 작은 손목과 주먹을 합친 것보다도 크게 보일 정도였다.

“에흠! 어떤가? 이제 좀 납득이 가나?”

녀석은 다시금 자신의 작은 가슴을  보이며 말했다.
한창 크고 단단한  보여주던 녀석이 말랑하고 빈약한 것을 보여주며 말하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만, 확실히 그런 훌륭한 걸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하아….”

작게 한숨을 쉬어 보이지만 내심 나의 바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이 몸이 이렇게까지 해야 믿다니.  길이 멀군? 큰일이도다.”

세계의 용은 그렇게 이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려 보여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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