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이제 뭐 할 거예용
“…뭐 하는 거야?”
레이디는 아침부터 마당에 나와 몸에 냉수 뿌리고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샤워했지.”
“옷을 다입고?”
“어.”
“왜?”
“남자는 가끔 그러고 싶은 법이라.”
“….”
그녀는 나를 미친놈 보듯 봤다.
아직 쌀쌀한 초봄 날씨에 팔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옷을 입은 채 냉수를 부리고 있었으니, 그리 보여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다.
“용서해줄게.”
알았으면 제발 가라. …하고 노려보고 있으려니, 잠시 고개를 숙여 내 말을 곰곰이 씹던 레이디가 대뜸 그렇게 말하여 나를 벙찌게 했다.
용서? 대체 뭘?
“…용서?”
참지 못하고 질문하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긴. 너 이러는 거 어제 내가 홀딱 젖어서 와서 그런 거잖아? 그건 그냥 용서해줄 테니까.”
누가? …내가?
“음…. 정말 괜찮겠어?”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옳다구나 하고 받았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거기다가 사실을 말해, 아침부터 본탈리아씨의 귀여운 배꼽을 보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럴 때는 그냥 그녀가 생각하고 싶은 데로 생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제일이겠지.
“그래. 어제 그건 확실히…. 인생에서 최고로 열 받는 기억 중 하나로 남겠지만, 결국 언니가 너에게 도움을 받아 돌아왔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기로 했어.”
“견습….”
“누가 견습이야! 이 야만인아! 벼락 맞고 싶어?”
“아니…너 정식 수녀는 아니라며?”
“그, 그렇긴 하지만!”
“….”
“아무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뭐야? 틀리게 말한 것도 아니구만….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계속 그렇게 부르면 진짜 벼락 맞을 줄 알아!”
“….”
하여튼 정말 여전히 불같은 인성의 소유자였다.
“어휴! 하여간! 제인 언니가 그 꼴로 있는 거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네 방에 옷 넣어 두겠다고 했어! 가서 갈아입든가 말던가!”
레이디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다가 무언가 한 가지를 깜빡했다는 듯 쪼르르돌아와 말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내가 널 용서하긴 했어도 네가 쓰레기 자식이라는 인식은 변함없으니까! 멋대로 다가오거나 친한척하면….”
그녀가 자신의 지팡이를 올리며 말했다.
“이걸로 네 머리를 쪼개 버릴 거야.”
실제 마을에서 기적을 사용한 전과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친 여자 같으니….
나는 레이디가 말한 대로 옷을 갈아입으러 빌린 방문을 열었다.
“…역시 넓다.”
기본적으로 2인실이라 그런지.
남은 방을 대충 준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좋은 방이었다.
“쿨….”
“….”
그리고 아용이는 계속 자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정말 잠든 상태였다.
그야말로 첫날에 깨어 있었던 것이 작은 기적이었던 것 마냥, 계속해 검은 찰떡 형태를 유지하며 잠에 빠져…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흠….”
뭐…. 먹기 위해 사는 용이니 점심은 몰라도 저녁을 먹을때쯤에는 일어나겠지.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촉촉하게달라붙어 오는 젖은 옷을 벗는다.
“응?”
하지만 일단 벗고 보니, 정작 내 방에 두었다던 갈아입을 옷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빈 장롱과 아용이가 누워있는 침대뿐….
레이디가 나에게 거짓말을?
역시 어제의 복수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그렇다기에는 너무 소소한 복수였다.
아예 안 하거나, 몇 배로 갚아주는 타입으로 보였으니…만약 장난을 준비한 것이라면 이것이 끝이 아닐 텐데….
혹시나 있을 후속타에 잠시 긴장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응? 아…미안. 바로 갈아입고 있었군.”
예고도 없이 덜컥 문을 열고 나타난 제인이 홀딱 벗은 내 모습을보며, 눈을 가렸다.
“…가리는 시늉하고 있는 거 다 보이거든요? 그렇게 보지 말아주실래요?”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비취색 눈동자가 대놓고 보일 정도였지만 말이다.
“응? 아냐 아냐 안 봤어…근데 너도 보기보다 몸매가 꽤…응?”
“아 좀!”
“아, 알았어! 그렇게 가릴 정도도 아니면서…. 옷, 여기 두고 갈 테니까. 어서 갈아입고 나오라고.”
“…네.”
그녀는 나의 대답을 듣고 옷을 바닥에 내려둔 후 방문을 닫았다.
“하아. 진짜….”
가려야 할 부위를 간신히 가리고 있던 나는 그녀가 나가고 나서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작게 한숨을 쉬며 문 옆에 둔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덜컥─
다시금 문이 열릴지도 모르고.
“아, 근데….”
“아 좀! 자꾸 그럴 거예요?”
간신히 옷을 잡은 나는 황급히 몸을 가리며 소리쳤다.
이번에는 확실히 다 보였을 것 같지만….
첫날의 그걸 제대로 당하게 되는군.
“아하하 진짜 미안하다.”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 듯 아저씨 같은 웃음을 짓는 그녀.
“다름 아니고….”
“아니. 다름이고 나발이고 일단 방문 좀 닫아주시고 말하면 안 돼요?”
“야, 진짜 진지하게 할 말 있어서 그래.”
“아니. 그러니까 문 좀 닫고 말하…!”
“…너 왜 이렇게 몸에 상처가 많냐?”
“….”
계속해 높이 올라가던 나의 목소리는 난데없이 날아온 날카로운 말에 잘려 나갔다.
“….”
조금 당황한 나는 애매하게 있던 자세를 등이 완전히 안 보이게끔 바꾸었다.
다른 것도 보였을까? 목걸이가 없다고 방심해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남자는 이 정도 상처가 보통이에요.”
“그게 보통이면 보통 아닌 녀석들은 전부 묘지에 있게?”
할 말이 없군.
나는 유일한 도주 경로인 창가를 슬쩍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좀 험하게 살아서요.”
“흠…. 그런 것치고는 얼굴은 깨끗하네?”
“…불운도 제 얼굴은 좋아했나 봐요.”
“뭐…. 네가 야만인치고는 좀 곱상하게 생기긴 했지.”
다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역시 들킨 것일까?
제인은 이 집의 장녀이기 때문인지 뭐든 곱게 넘어가 주진 않을 것 같았다.
특히 자신의 동생들이 피해가 갈 수있는 일이라면….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는 것도 범죄니 특히나 조심해야겠지.
“쿨…. 피유….”
나는 곁눈질로 찰떡처럼 몸을 말아 자는 아용이를 보다 옷 한 장을 손가락으로 이불을 슬쩍 올려 녀석을 가렸다.
“….”
다행히도 제인은 오직 나에게 집중하느냐 아용이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
다시금 이어지는 침묵.
“그래, 험하게 굴렀단 말이지….”
“트라키아인이잖아요.”
“…그렇군. 그렇다면 그럴 수 있지.”
제인은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그럼…. 미안했다. 갈아입어라.”
쿵.
마침내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전직 노예 출신은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닌 것이었다.
미인인 세 자매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동거 라이프!
“어이. 거기 식객! 지랄 말고 와서 밥이나 처먹어.”
“…네. 누님.”
…당연하게도 이런 일은 시작되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장녀는 나를 수상하게 여기며 험악하게 굴렸고….
“앗 그거 내가 먹으려고….”
“으르르….”
“아냐너 먹어…다 먹어 그냥….”
삼녀는 나를 아예 적대하고 있는 느낌이었으며….
“흑…. 탈리아씨….”
세 자매 중 유일한 양심과 선을 담당하는 푸른 천사 탈리아씨는 급한 일이 있다며 마을을 나가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마을로 전속 예정인데 건물 문제로 이야기가 있어서요. 잠시 얘기 좀 하고 와야 할 거 같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며 나가시는데 정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흑….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제가 올 때까지 꼭 기다려 주셔야 해요?”
아니. 참고 버티자….
이후에 큰 도시로 갈 때는 같이 가자고 권유해주시지 않았는가?
한 푼도 없는 지금으로써는 마음 든든한 그녀와 함께 다른 마을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이득이었다.
“야.빈곤한 놈.”
“네. 누님.”
“다 처먹었으면 설거지. 해놔라.”
“…예.알겠습니다.”
“아…바닥도 쓸어 놔.”
“네…. 견습님.”
“자꾸 누구보고 견습이래! 이 야만인아!”
이 집에서 버티자고 마음먹은 만큼은말이다.
후…. 그나저나 역시 사람이 돈이 없으니 사람 사는 것 같지가 않군.
얼마나 서러운지….
아용이의 한 끼 식사를 방으로 들고 갈 때마다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배고퍄! 배고퍄!”
“미안한데 아용아 벌써 네가 다 먹었잖니….”
“배고퍄! 배고퍄!”
“하이고…내 등골 휜다 이년아….”
…쉬이불.
생각해보니, 또 속이 쓰리다.
이 녀석이 먹어 치운 2실버만 있었어도….
지금쯤 다른 도시에 정착하여, 당당히 모험가로 등록한 후에 자신이 번 돈으로 당당히 먹고 자고 했을 텐데….
“여기 청소가 덜 됐잖아! 제대로 안 할래?”
“…죄송합니다. 견습 아가씨.”
“누, 누가 견습이야!”
하지만 다시금 자각한 현실은 잔혹하기만 하다.
남의 밥을 먹는 대가로 다시금 목걸이 없는 노예 취급이나 받으며 살고 있으니까….
“야! 빈대. 뒤지기 싫으면 당장 튀어나와.”
“아…네! 누님. 지금 갑니다!”
“어? 야! 아무리 언니가 불러도 지금 나랑 말을…야!”
그렇게 나는 이 집의 기둥이자 장녀인 제인 필드의 명에 따라 다시금 쇠사슬이 묶인 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너 혹시 용돈 벌이할 생각 없냐?”
“…네?”
그렇게 그녀가 시키는 대로 청소를 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식탁에 앉아 있던 제인이 갑작스럽게 그런 말은 던져왔다.
“…벌이요?”
뭐지? 돈은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사정상 일을 가려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나로서는 마냥 환영하기도 어려운 일이긴 했다.
그것도 만약 대낮에 마을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면….
“별건 아니고 밤에 잠깐 나가서 용돈 좀 벌고 올 수있는 거인데…. 혹시 별로야?”
“아, 아뇨! 하고 싶어요!”
“듣지도 않고?”
“아, 그럼 일단 듣고요.”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제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부탁할 일은 창천교의 일이야.”
“창천교요? 저 입회는 좀….”
“나도 너 같은 형제는 일없다.”
“아! 언니! 지금 이 야만인한테 그거 시키려고 하는 거지!”
쾅!
지금까지 계속 나를 노려보며 앉아 있던 레이디가 갑자기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 깜짝이야! 왜 가만히 있다가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이 년아!”
“…그거? 그게 뭔데요?”
“아 뭔데! 언니가 같이 가기로 했잖아! 또 나랑 이상한 사람만 보내고 자기는 집에서 놀면서 술 퍼마시려고 하는 거지!”
“씁…. 야 언니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어 보여! 완전 보이거든! 지금도 마시고 있잖아! 바보! 바보!”
“언니한테 바보라니 짜식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착실히 자신의 앞에 놓인 술병을 비우는 모습을 보니 설득력이 떨어지긴 했다.
“크하! 응? 아, 그런 거 아냐…. 얘도 그…뭐냐? 어, 돈이 없어서 우리 집에서 묵을 정도고? 너도 매번 나랑 있으면 실력이 안 늘잖아…. 막말로 계속 견습이라 놀림 받고 싶어?”
“누, 누가 견습이야!”
“너지 너! 이화상아! 대체 너 말고 우리 세 자매 중에서 누가 견습이겠니!”
“그, 그건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고…본래 실력으로 따지면 나는 분명 천재….”
“이 년아! 네가 진짜 천재면 이미 견습이 아니겠지! 심사 의원 앞에서 기적도 제대로 하나 못 쓰는 애가 무슨 천재야!”
“씨잉…. 어, 언니는 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너만 그러니까!”
“저기요…?”
슬슬 싸움이 과열되는 분위기다.
열도 식힐 겸, 나는 조심스레 손을 올려 다시금 질문하였다.
“그래서 그게 대체 뭔가요?”
내 말에 흥분한 레이디가 다시금 책상을 치며 말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죽을 만큼 고생하는 거야 알겠어?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않겠다고 하라고!”
“아니. 그렇게 설명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바보야! 그냥 무조건 안 하겠다고 하라고!”
다시금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레이디 필드.
“흠…하겠습니다.”
“뭐? 왜!”
“설명도 안 듣고?”
“솔직히 돈이 급하기도하고 밤에 하는 일이라는 게 아주 좋네요. 무조건 하겠습니다!”
“음! 좋아. 합격!”
자신 있게 말하자 면접관 제인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채용을 결정해 주었다.
“야! 너, 너어…. 소, 솔직히 말해! 지, 지금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
솔직히 이는 사실이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