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시체들의 밤이에용
“으헥? 나, 나리? 어째서?”
흡혈귀는 얼얼한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뭘 어째서야? 아주 그냥 봐줬더니 못하는 짓이 없어서는…!”
“에흑…. 봐, 봐주세요. 나으리.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너무 오래간만에 보는 여자아이라 그만….”
“…됐고 준다고 했던 거나 내놔.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아, 아뇨! 있어요! 있어요!”
보물이 있다면 넘어가 줄 수 있지.
“자, 잠깐만요….”
놈은 내가 번쩍 눈을 뜬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시금안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금 고개를 든 흡혈귀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지팡이를 들고나왔다.
“설마….”
“아, 아니에요! 이건 모르셨을 테니 기다려 보세요.”
고작 그거야? 싶은 맘에 노려보자, 다급히 말한 녀석은 지팡이의 장식 쪽을 만지작거리더니 안쪽에 있는 작은 공간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작은 보석을 하나 꺼내왔다.
“진짜 마나석인데…. 이 지팡이도 제법 가치가 있긴 하지만, 모르고 파셨으면 손해 보셨을걸요?”
“흠….”
확실히 그건 그렇지. 양심 있는 상인 놈들은 드물었으니….
“나, 나쁘지 않네….”
“그렇죠?”
솔직히 말하면 너무 대박이라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작은 보석 하나라도 만족했을 텐데, 정제된 마나를 담고 있는 마나석이라고?
정확한 가치는 모르지만, 적어도 실버 단위로 가격임은 확실할 터였다.
“계약자여 그걸 내놓도록.”
“…엥? 너 또 갑자기….”
“어?”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와 레이즈가 돌아보니, 어느새 다시 인간의 형태로 변한 아용이가 내 손에 들린 마나석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아니지…. 네가 이게 뭐가 필요해?”
“응? 헉! 나, 나나리? 이, 이이이분은?”
퉁명스럽게 마나석을 쥐고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뒤에서 나의 옷자락을잡은 흡혈귀가 아용이에 관해 물었다.
“대, 대체 나리는 뭐, 뭘 데리고 다니시는 거예요! 저거 완전 괴물이잖아요!”
마족이라 그런가?
아용이에 대해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괴물이라고?”
“히익!”
아용이의 말에 레이즈는 찔끔 놀라며 내 등 뒤로 숨었다.
완벽하게 고양이 앞에 선 쥐 신세군.
“에효….”
아용이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깊게 쉬고는 다시금 내가 손에든 마나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도시를 벗어날 생각이 아닌가? 이 몸이 봉인된 장소와 멀어짐과 동시에 이 몸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 올 것이다. 마나석을 내놓던가….”
아용이의 손가락이 움직여. 내 등 뒤에 흡혈귀를 가리킨다.
“이 녀석을 먹겠다.”
“히익! 나리. 살려주세요. 나으리.”
“괜찮겠지? 계약과 다르게 사람은 아닐 터다.”
“히익!”
꼭 하겠다는 강한 말투에 흡혈귀가 울었다.
물론. 나도 기왕 살려준 녀석이니 이대로 먹히게 두는 건 영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만….
그보다는 아용이의 경고가 신경 쓰였다.
“네 힘이 필요한 순간이 올 거라고? 전력?”
“그렇다. 확신한다.”
아용이의 강력함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녀석이 전력을 낼 필요가 있는 일….
단 몇 초라도 원할 때 꺼내어 쓸 수 있다면 작은 마나석 하나 두개쯤은 아깝지 않을지도 몰랐다.
“덧붙여서 그거 먹으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대략 몇 초 정도가 아닐까?”
효율 진짜 쓰레기군.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손에 쥔 마나석을 던져 주었다.
“합.”
그리고 아용이는 마치 개처럼 던져진 마나석을 한입에 꿀꺽 삼키고는 “잘 먹었다.” 한 마디를 남긴 후, 다시 연기처럼 작게 변해 가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요즘 계속 잠만 자는 것도 조만간 자신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 오기 때문인가?
대체 뭐가 오길래 이 정도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나 싶었지만, 이미 변해버린 아용이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아이고오…. 나으리…감사합니다.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야! 감사하다면서 그건 왜 챙겨?”
“네?”
슬슬 갈 준비를 하며, 자신의 것(이었던) 로브와 지팡이를 챙기는 흡혈귀를 막자 놈이 당황한 듯 말했다.
“아니. 나리. 이건 원래 제 물건이고 보상은 드렸….”
“그건 네 목숨값으로 이미 끝났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아용이가 보상을 가로채든 안 가로채든, 처음부터 녀석의 로브랑 지팡이는 내 것이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단 한마디면 될 것이다.
“내놔.”
“….”
레이즈는 잠시자신의 손에 든 여러 도구를 보며 갈등했지만, 아용이가 들어간 가죽 가방을 보더니얌전히 자신의 손에 있던 물건들을 넘겼다.
“나리…. 아무리 그래도 저도 숙녀인데. 로, 로브만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가랑이 사이가 너무 시려서어…흑.”
“….”
과학실 인체 모형같이 생긴 주제 수줍은듯 다리를 비비적거리는 그 모습을 보니 참으로…뭐라 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자.”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로브를 주었다.
어차피 이득은 많으니 이 정도는 안 챙겨도 충분할 것이다.
“와! 나으리~. 정말, 정말로 좋은 분이시군요! 진짜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슴다!”
“그래. 꼭 그래라….”
“큭…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보, 본녀는 기본적으로는 여자애들이 좋지만, 지금이라면 남자도 완전히 가능할 것 같은 기분임다. 나리만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아니. 됐고 그냥 가….”
“응? 머리카락이 덜 자라서 그렇습니까? 이래 보여도 저 찰랑찰랑한 은발 미인인데…피, 피만 더 주시면….”
“…너 로브 뺏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흡혈귀….
인체 모형과도 같은 상태였다.
묘지의 냄새도 상당하고….
내가 아무리 성욕이 심해도 저건 불가능이다.
“그, 그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나만….”
“또 뭐야?”
“그, 그게…멀리 사라지려고 해도 힘이 없어서 혹시….”
레이즈는 귓가에 자신의 부탁을 속삭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라지기 위함이라는데 괜찮지않은가? 어차피 내 피도 아닌 것을….
“으, 윽!”
마침내 최면에서 풀린 레이디가 땅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지팡이에 담겨있던 기적은 사라진 지 오래여서 본인 빼고는 아무도 다치는 일 없이 끝났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여긴 어디? …응? 흐, 흡혈귀는?”
뒷감당은 내가 해야 하는 게 문제였긴 하지만….
나는 대충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뭐? 그래서 그 흡혈귀랑 싸웠어? 너 보기보다 대단한걸?”
살짝 거짓말을 보태어서…. 나 치고 이야기를 상당히 잘 지어내었는지.
레이디는 의심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믿어 주었다.
“그, 근데 몸에 느낌이…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아니. 전혀 그러고 보니 싸우면서 내가 널 신경 쓰지 못했네…. 미안하다.”
“응? 아냐. 그렇지…. 내가 기절한 사이 너 혼자 싸웠으니까….”
어찌나 잘 믿는지.
흐트러진 자신의 옷을 보면서도 얼굴을 붉히고 내 말을 받아 줬을 정도였다.
“어? 나 다리가 안 움직여 허리…. 삔 거 같아.”
“사실. 너는 허리를 삔 게 아니고….”
“응?”
“아, 아냐….”
그 흡혈귀 적당히 좀 빨지….
애가 못 움직일 정도로 빨아 재끼면 어떡해?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 부탁 따위 들어주는 게 아닌데.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그,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잖아!”
아니. 그러니까 너 말고….
“무, 무겁지 않아?”
“괜찮으니까. 가방이나 잘 가지고 있어.”
“…응.”
결국, 돌아가는 길에는 내가 레이디를 업고 가야 했다.
피를 너무 빨린 탓에 빈혈을 동반한 마비증세가 왔기 때문이었다.
“미안….”
레이디는 언데드와의 전투 중에 사제인 자신이 기절했다는 것이 큰 충격인지.
계속 사과를 반복했다. 등에 촉촉한 느낌이 들 정도….
“뭔지도 모르고 기절하다니…. 꼴사나워…. 이러니까. 견습 소리 듣는 것도 어쩔 수 없지.”
“뭐…기습이었으니까.”
그렇게 달래보아도 좀처럼 그녀의 우울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진실을 말해주면욕먹겠지?
어쩔 수 없이나는 울적한 그녀를 한참이나 달래주어야 했다.
“사실 나 있잖아. 그런 말 하는 거 처음이었어….”
그렇게 그녀를 위로하며 고된 행군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대뜸 등 뒤의 소녀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왔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내가 대화의 흐름을 놓쳤었나?
“…뭐? 뭐가?”
“불평 말이야.”
내가 되묻자.
레이디는 마치 간식을 몰래 먹은 아이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듯, 조심스레 말한다.
“아, 그러고 보면 이 마을이 싫어 죽겠다고 했던가?”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정작 나는 매일 같이 터진 분노인 줄 알고 제대로 잘 듣진 않았었지만, 그녀는 나름 처음으로 속마음을 표출한 것이었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들어줄 걸 그랬나?
“이 마을에는 또래가 별로 없어서…. 그나마 있는 애들도 시체랑 논다며 놀아주지 않았고…. 나는 친구가 없거든.”
“….”
나는 조용히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듣기만 했다.
잠이 쏟아지는 야간 행군에 듣기에는 썩 괜찮은 목소리였다.
“언니들한테는 할 수 없는 이야기고…. 어쨌거나 너는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도와줬고…직후에 바람맞혔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언니도 도와줬고….”
등을 잡은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기분 탓일까? 너무 오래 걸었던 것일까?
등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더욱더 따듯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 뜨거울 정도로….
“탈리아 언니가 널 엄청나게 칭찬하더라?”
“그건 그냥 탈리아씨가 사람이 좋아서 그래.”
“…흥. 그쯤이야 나도 알고 있어.”
레이디는 등에 자신의 몸을 더 기대오며 그렇게 동의했다.
“후….”
그렇게 다시 얼마를 걸었을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나는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별들의 바다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 와서 이처럼 하늘을 보면서 걸은 적이 있었나?
시야를 가리는나뭇가지들을 배경 삼아, 사이사이로 보이는 검은 바탕에 촘촘하게 새겨진 별들, 흘러가는 은하수와 노래하는 듯한 곤충들의 구애 소리.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자니 요 며칠 죽도록 고생한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 마저들 정도로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예쁘다.”
“으, 응? 뭐…뭐가? 가, 갑자기 뭔데!”
그렇게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자, 뭘 잘못들은 레이디가 등 뒤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렇게 좋은 풍경인데 정말 분위기 맞출 줄 모르는 아이다.
“야, 야…. 그러지 말고 위를 좀 봐봐.”
“뭐, 뭐라고? 아….”
“이 동네 참 공기는 맑고 좋아.”
“오,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많긴 하네….”
힘든 생활이 계속되어, 갑갑한 세상이라고 여기던 장소가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넓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살아요.’
그 이름 모를 수녀님께서도 보여드리면 좋았을 텐데.
“아…레이디?”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늦은 밤까지 활동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지 피를 많이 빨려서 피곤한 것이었을까?
그녀의 숨소리가…새근새근,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뭐…졸아도 어쩔 수 없지.”
산 중턱에 걸린 달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밤이었으니까.
“이렇게 늦고 다치고 잘하는 짓이다. 그래. 어디 손 좀 보자.”
“윽….”
“물린 건 아니라고?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어디에 베인 거야?”
“그, 그게 저도 잘….”
제인이 내 손을 당기고 나는 작게 신음했다.
집에 도착한 나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아무래도 흡혈귀에게 피를 줄 때 너무 깊게 찌른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피가 많이 샜는데 잘도 몰랐네….”
“따, 땀인 줄 알았죠….”
“미, 미안 날 업고 오느냐고….”
“아냐…. 괜찮아.”
솔직히 기본적으로 내가 다 잘못 한 일이라 사과를 받기도 뭐 했다.
“흠…. 좀 깊게 베였네?”
“흡혈귀랑 싸우다가 그랬다니까?”
“그래. 그래. 이런 작은 동내에 흡혈귀가 말이지….”
제인은 한눈에 스스로 낸 상처 때문이라는 걸 알았는지, 그렇게 대충 넘기며 내 손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어쩐지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언니! 싸우다가 벌어진 상처니까 술 마시면서 하지 말고 잘 좀 봐!”
“그래, 그래. 알겠어, 이 년아…. 아, 매장은 잘 끝낸 거지?”
“아….”
레이디와 내가 동시에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태운 후 그대로 묻고 오는 걸…깜빡했네?
제인은 그런 우리를 보더니,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말했다.
“하아…. 됐다. 그건 내가 내일 할게….”
“으응? 그, 그럼…고맙고?”
평소라면 멱살을 잡고 욕부터 날렸을 텐데….
제인의 그러한 모습에 레이디도 당황을 금치 못한 듯 중얼거렸다.
“알겠으면 넌 먼저 가서 씻어.”
“으, 응.”
제인에게 느껴지는 묘한 기류에 레이디도 차마 더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
단둘만 남은 상황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현관에 단둘만 남은 것은 처음 봤을 때 이후처음이었다.
“….”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머리가 혼란스러운 탓일까?
부끄럽게도 나는 이 순간 그녀의 알몸을 떠올렸고 말없이 붕대를 감아 주는 손을 타, 하얀 민소매를 입은 제인의 가슴이 눈에 올리고 말았다.
“….”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제인은 다시 말없이 자신의 옆에 있는 술병을 비웠다.
…정말이지 지독한 술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