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어쩐지 배가 고파용
“….”
감고 있는 눈동자의 틈새에서 끈적이는 소리가 달라붙었다.
“괜….”
“괜찮으니까. 조용히 하고 좋은 말로 할 때 눈 곱게 감고 있어라. 그대로 영원히 눈 감기 싫으면….”
날카롭기는.
그래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어 주자.
이어서.
저벅─.
발걸음이 달라붙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깊은 곳에 잠겨 있던 무언가가 뭍으로 올라온 듯한 소리였다.
저벅. 저벅.
걸음은 천천히 내 귓가에서 멀어질수록.
초조함은 커져만 간다.
아용이는 정말 괜찮을까?
트롤을 유인한 오린은 어떻게 됐을까?
파이톤의 출혈은 이러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기분 탓인지 비릿한 피 냄새는 더욱더 깊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니미랄. 코가 마비될 때도 된 거 같은데.
피 냄새는 언제나,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됐다.”
뒤쪽에서 울리는 듯한 허락에 눈을 뜨자.
그다지 변하지 않은 절망적인 광경 속,커다란 변화가 눈에 띄었다.
쓰러져 의식을 잃은 남자.
정밀한 칼로 자른 듯 사라진 다리.
덤으로 마치 껍질을 까놓듯.
허벅지 부근까지 사라진 갑옷까지─.
“으, 으윽….”
놀라고 있을 시간 없지.
파이톤의 미약한 신음에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일단 소매를 찢고 나무 막대기를 끼워 넣어 매듭을 만든 후, 막대기를 돌려 상처를 압박하는 기본적인 응급 처치였다.
솔직히 원래 세상에서 점수를 따려고 배우는 척했던 기술이었기에 응급 처치의 자세한 과정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바로 피가 나지 않을 때까지 천에 감긴 막대기를 잡고 계속해 돌려주는 것이었다.
“윽….”
어느 정도 돌리자 기절한 파이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다리를 압박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배울 때. 너무 많이 감으면 조직이 괴사하거나 하여 엿 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아니. 절단면을 다시 붙이기 어렵다는 말이었나?
모르겠다. 애초에 소독 절차조차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완벽하게 하려 하지 말고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할 생각으로 하자.
이렇게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이미 붙일 피와 육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여기서 더 망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싶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미 너무나도 많이 흘린 피를 멈추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설령 내 실수로 다리 윗부분을 조금 더 잘라내야 하더라도 지금 당장 피를 멈추지못하여 죽게 놔두는 것보다는 만 배 나을 것이었다.
그리고…뭐였지?
부상자한테 말을 거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이 양반아. 정신 좀 차려요. 이번 일이 마지막이라며!”
“으으….”
말하고 보니 이건 좀 그렇군.
다른 말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저씨 제 말 들려요? 이대로 죽으시면 어떻게 죽었는지 묘비에 상세하게 써달라고 할 거예요. 아시겠어요? 생전 유언이었다고…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멍청한 죽음도 있다 경고하고 싶어 했다고 가족분들한테 구라치고!묘비에 그대로 새겨달라고 부탁할 거라고요! 10년 차 모험가 병신같이 실족사하고!”
“으으…쓰벌. 그, 그것만은 안돼….”
“그래요. 그거예요. 죽어서 평생 놀림감 되기 싫으면 알아서 정신 똑바로 처신 잘하라고요.”
확실히 모험가라는 양반이 발을 잘못 디뎌 죽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웃기겠는가.
근데 그런 죽음으로 내 꿈자리까지 사납게 하려고?
어림도 없는 부분이었다.
“후.”
내 손이 아플 정도로 조이자.
마침내 그의 다리에서 줄줄 흘러나오던 피가 눈에 띄게 줄어보였다.
나는 풀리지 않도록 천 조각을 매듭지어 풀리지 않게 꽉 묶은 후.
근처에 보이는 커다란 돌을 가져다가 바닥에깔고.
그의 잘린 다리를 돌 위에 기대어 두었다.
출혈이 계속되는 다리를 심장보다 높은 곳에 올려두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아니.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겠지만….
“하아….”
크게 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온몸의 땀을 쫙 빠진 느낌이었다.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얼추 다 하지 않았나 싶다.
“염병.”
긴장이 조금 풀린 나는 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피를 잔뜩 먹은 손바닥은 마치 처음부터 그런 색이었던 듯.
본래의 색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떨리는 두 손을 옷에 대충 묻혀 닦아내었다.
뻣뻣하게 마르기 시작한 혈액이 굳어가는 물감처럼 거친 색감으로 푸른색 옷감에 묻어나왔다.
“….”
여전히 진동하는 비릿한 피 냄새.
속이 좋지 않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다만 불평할 수는 없었다.
셋 중에서는 그나마 내가 제일 나은 상태였으니까.
“넌 괜찮냐?”
“그렇다니까? 정말, 몇 번이나…물을 생각인가? 이 몸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새긴 건좋다만, 지나친 과보호도 적당히 하라…. 계약자는 이 몸의 아바이라도 될 셈인가?”
“징그럽다. 차라리 오빠라 불러 길드 등록도 여동생인데.”
“…차라리 이대로 혀를 씹고 평생 벙어리로 살아가마.”
뒤쪽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는 조금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가 나무를 기대고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상상하니, 살짝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장난 말고 진짜 괜찮냐? 괜찮은 목소리가 아닌데?”
“쯧쯧. 저번에는 눈이 가더니. 이번에는 귀까지 가버렸는가? 계약자는 정말 여러 가지로 하자 있는 남자다. 저걸 누가 데려갈꼬?”
“…너도 만만찮아요.”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저만큼 웃을 수 있으면 괜찮다.
믿자, 본인이 말한대로 저번보단 나아 보이니까.
“아직도 모르겠군. 어찌 이 몸이 여동생인가? 일 끝나자마자 그렇게 손을 부들부들 떨며 새끼 오리 마냥 이 몸을 찾아 헤매는 주제.”
“대체 거기서 어떻게 본…이건 쓸데없이 피를 많이 봐서 그래.”
“이 몸을 찾아 헤매는 꼴을 보면 누나라 불리기도 민망하고 엄마라 불려야 할 수준이더군.”
“….”
나는 항복했다.
먼저 입을 연 내가 잘못이지.
“하여간 아주….”
“아주 이 몸이 아주 소중해 돌아가시겠다고?”
“…한마디를 안 진다고.”
그녀가 웃었다. 작고 미약하게 조금 흔들거리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무언가 오고 있다고 했던가?
자신은 정말로 괜찮으니. 어서 가 주변이나 살펴보라는 아용이의 말에 등살을 밀려, 나는 홀로 숲을 살피게 되었다.
물론. 심장이 있으니 아주 멀리는 못 돌 테지만, 예전에 그녀를 두고 걸었던 감각을 되살려 대략 어느 정도의 위치까지는 나갈 수 있다 파악하고 움직이기로 했다.
“그나저나 뭔가라….”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고 낮은 자세로 걸었다.
이 주변은 잡다한 것들은 트롤 때문에 모두 숨어 있을 테니.
오고 있다는 무언가는 높은 확률로 거대한 쥐랑 두꺼비를 섞어 만든 듯한 그 울퉁불퉁한 회색 피부를 가진 흉물 놈이지 싶었다.
“아, 쓰벌. 진짜 다시는 보기 싫은데….”
동료가 다쳤으니 분한 마음은 있지만, 내가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이대로 그냥 지나가 주길 바라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정말 안타깝게도 언제나 불안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고.
“케호크! 캬카!”
나는 얼마 걷지도 않아, 금세 숲속을 헤매는 트롤 새끼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워낙 덩치가 큰 놈이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확연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불행이자 다행이었다.
“캬흐카?”
놈들은 다 비슷하게 빻았기에 순간 오린이 유인한 개체가 돌아온 것인가?
싶었지만, 들고 있는 곤봉의 형태가 매우 다른 걸 확인하고안심했다.
적어도 놈이 나의 작은 동료를 먹어 치우고 부족한 배를 두들기다 미리 잡아둔 후식을 떠올린 건 아닌듯했으니까.
오린은….
일단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길 바라야지.
“킁. 킁.”
내가 주시하는 저 트롤놈은 세상에서 제일 흉측한 코를 높이 들고는 연신 킁킁거렸다.
너무 집중해서옆에 있는 내가 들키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집중하던 한 가지 냄새에만 꽂혀있는 모양인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제 갈 길을 향해 나아갔다.
“카흑. 캬흐크….”
숲에 진득하게 배어 나온 피 냄새를 쫓아서….
놈은 정확히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게 포장된 드워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저놈을 막아야 할까?
고민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곳에는 파이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용이도 있으니까.
세계를 삼킬 용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최근 그녀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더더욱 접근시키고 싶지 않았다.
‘과보호도 적당히 하여라.’
과보호라니 웃기는 이야기다.
보호라고 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내가 너의 심장이듯 네가 나의 심장인걸.
나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적당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괜히 어렵게 머리 굴리지 말자.
간단하게 생각해서 돌을 던져 도발 후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에 집중한다.
목표는 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 도움이 올 때까지 최대한 버티는 것.
놈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나무가 많은 쪽으로 도망치면 저 살덩이로는 알아서 발이 늦춰질 것이었다.
“….”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수단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돌을 던지기 위해 달려 나간 순간, 풀숲에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트롤 한 마리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크륵? …캬흐크!”
아용아….
“두 마리라고는 안 했잖아….”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트롤이 한 걸음 달려와 무기를 휘둘렀다.
트롤이 자신이 쥔 곤봉…아니. 통나무라 불려야 할 그것을 옆으로 휘둘렀다.
“…!”
피하지 않고 방패를 들어 올린 것은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트롤의 공격을 방패로 막을 생각은 말게.’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이 떠오른 것은 트롤이 휘두른 나무가 나의 방패에 맞닿은 그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대로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면, 온몸의 뼈가 부서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예 맞고 날아갈 작정으로 다리의 힘을 풀고 상체와 골반에 집중했다.
이어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은 계획대로 나의 몸이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 역시 최고의 선택은 아니었겠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커, 흐윽!”
내 등이 크고 단단한 나무에 닿아 꺾였을 때였다.
“쓰읍….”
엄청나게 아팠지만, 그래도 몸이 멀쩡히 움직이니, 아주 최악의 선택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재수가 없으면 긍정적이기라도 해야지.
방패를 들고 있던 팔은 아예 박살이 난 듯 움직이지 않았지만….
“씁….”
아니. 손모가지 조금 나간 게 아니고 어깨까지 개 박살이 난 느낌이었다.
왼손은 당분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오른손에 쥔 단창을 짧게 쥐어 단검을 다루듯 잡고는 과감히 팔에 감긴 방패의 가죽 벨트를 잘라 버렸다.
철판이 땅에 떨어져 튕기는 소리를 내며, 원형 방패가 땅 밑에 떨어진다.
“시발….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트롤에게 맞아 조금 찌그러진 걸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캬호카!”
그러나 마음의 정리는 빨라야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으니까.
“캬호카!”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드니, 이 트롤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손뼉까지 쳐가며 처 웃고 있었다.
“진짜 좆 같이도 웃네.”
역시 약자멸시가 DNA에 패시브로 달고 태어난 사악한 종족답게 설계 하나하나가 사람의 혐오감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후…씹팔.”
놈의 눈에는 내가 그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좋은 장난감이자, 간식 정도로 비추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온다.
당장 일어나 뛰든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않았다.
조금 전의 충격이 뒤늦게 몸에 퍼진 것일까?
머리가 핑그르르 돌며 본격적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해, 창을 지팡이처럼 사용하여 간신히 버텨야 했을 정도였다.
시간이 필요했다. 충격에서 벗어날 시간이.
단 몇 분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