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세상에 나쁜 용은 없어용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확실히 아까와는 다른 숲의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여, 여기 확실해?”
[지도가바르다면, 정확한 위치는 아니고 바로 옆이긴 하지만.]
“후우…. 그래. 좋아…우욱.”
[괜찮나?]
아니.
슬프게도, 나는 거짓말이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숨은 거칠고 몸은 무거웠으며, 머리는 누군가 뽑아다 잠시 볼링공으로 쓰다 붙여 놓은 듯 핑핑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마에서 미열마저 느껴지고 있을 정도로….
용에는 꽤 익숙해졌다만, 본격적으로 하늘을 나는 생명체의 등에 매달려 날아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하. 스읍─하.”
이게 대체 얼마 만에 하는 멀미인지.
아, 마차를 탔을 때도 조금 했던가?
하지만 그때와는차원이 다른 강도였다.
“후읍…윽.”
나는 그녀의 몸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바닥을 굴렀다.
“인간? …괜찮은 거다?”
“으…고맙다.”
“….”
피스가 잡아준 손으로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그대로 바닥을 기어가듯 걷다, 근처의 나무에 애원하듯 매달려 무릎을 꿇었다.
“그럼. 난 주변 좀 둘러보고 올 거다.”
“그래. 부탁 좀….”
필라피스는 그렇게 말하고 매고 있던 짐을 내려둔 채.
숲속으로 사라졌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정찰이라니 뭐가 저리 든든하담?
내가 알던 피스가 맞나? 가슴이 다 뭉클해질 정도였다.
본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저게 뭘 잘 못 먹었나 싶기도 했고.
[홀로 생각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겠지. 불라슈카의 일행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필라피스에게 있어그리 좋지 못할 소식이거든.]
“…그, 그래?”
필라피스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는 나에게 이데노아가 말했지만….
솔직히 지금은 내가 다른 누군가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리 말하고 넘겼다.
[그렇게 힘든가? 그렇게 거칠게 날지도 않았을 텐데. 너 ‘그녀’의 하수인치고는 꽤 나약한 사내였구나?]
“닥…쳐어….”
욕설을 내뱉으며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긴 목을 올리며, 천천히 몸을 푸는 이데노아가 보였다.
[─.]
그녀는 내 신경질적인 시선을 느끼고는 몸을 풀던 것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하던 짙은 에메랄드와도 같은 눈동자를 감추었다.
…실망이라도 한 것일까?
“후우….”
나는 침이 새어 나온 입 주변을 대충 닦아내고.
일어나, 옆쪽으로 돌아간 그녀의 시선을 쫓듯. 그녀를 향해 걸었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눈앞의 존재가 더욱 확연하게 보였다.
확실히 용…. 초목으로 빚은 듯한 용이다.
작고 연약한 새싹이 표면에 자라나고 있다고 착각할 법한, 연초록색 비늘로 덮인 그 용은.
기존에 보았던 두 용과는 다른, 상당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아용이의 경우 마치 거대한 산을 보는 듯한 압도적인 크기와 위엄이 있었고.
필라피스의 경우는 바다에서 헤엄칠 것 같은 매끄러운 형태를 하고 있었긴 하지만, 둘 다 기본적으로 골격과 구조는 비슷하다 느꼈음에 비하여….
이 용. 이데노아라는 머리 위로 솟아난 나뭇가지 같은 뿔과 함께 발톱이 아닌 발굽으로 이루어진 매끄러운 뒷다리를 하고 있어.
기본적인 형태부터 기존의 두 명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고 있었다.
표현하자면 지금이라도 숲을 뛰어 달릴 것 같은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날개가 달리긴 했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판타지 속의 드래곤이라기 보다는 동양의 환수…기린이나 해태에 더 가깝지 않나 싶기도 했다.
묘하게 친숙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목 위로는 확실히 기존과 같은 용의 두상이긴 한데….
여태까지의 만남으로 대강은 알고는 있었던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용이란….
같은 용이라고 해도 개체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구나 싶었다.
프레이야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뿔 대신 깃털 달린 작은 날개가 붙어 있지 않은가.
이러다가 언젠가 동양의 용처럼.
날개가 없고 여의주를 입에 문. 그러한 존재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후우.]
눈앞의 용. 이데노아가 짧게 호흡하고는.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어─
[─]
신음하기 시작한 것은.
[끅…끄윽.]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마치 고양이가 털 뭉치를 토해내듯.
목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듯한, 움직임.
[브웩─.]
한참을 안쪽에서 껄떡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던 그녀는 이내 목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초록색 에메랄드 덩어리 같은 것을 토해내었다.
신기하게도 그 보석 같은 표면은 땅에 떨어지자 바로 녹아 없어졌는데.
그 안에서 그녀가 날기 직전 삼켰던 자신의 옷가지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후우. 목 아파.]
자기가 벗어 던진 옷과 짐을 우물우물 씹다 삼키는 것 같길래 뭔가 했더니 저런 거였나?
여행하기에 매우 유용한 능력이지 싶었다.
좀 그로테스크하지만….
나는 그리 말하는 대신 그녀가 땅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물건들 쪽으로 다가가 대충 정리를 도와주었다.
[….]
내 행동이 묘해 보였는지. 이데노아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딱히 별 이유가 있어서 도와주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래도 여기까지 태워 줬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지 싶었던 것뿐.
“흠.”
그래도 의외였다.
목구멍 속에 있다 나온 걸 두 눈으로 봐서 좀 끈적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손으로 집어 든 짐들에서는 전혀 그러한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뽀송뽀송해진 듯한…?
아니.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 짧은 시간에 완전히 녹아 사라진 보석 같은 결정의 효과인가?
그녀가 짐을 토해내며 함께 내뱉었던 끈적이는 액체, 침이나 위액조차 바로 증발하여 사라진 것을 보면, 이데노아의 체액에 들어 있는 특수한 효과인지도 몰랐다.
“…킁킁.”
[그렇게 코를 대봐야 딱히 냄새는없을 거다.]
“아, 진짜네? 장화에서도 냄새 안 나잖아?”
아니. 사실 나긴 나는데.
굳이 따지면 풀냄새…와도 같은 상쾌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페브리즈도 없는 세계에서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에 이런 향이 나다니.
정말 신기하군.
이번에야말로 진짜 그녀의 침을 좀 담아다 팔면 때 돈을 벌지 않을까?
일단 마르지 않게 처리하고 물에 희석해도 향이 어느 정도 유지되면. 향수라던가. 탈취제라거나 하는 활용방도는 무궁무진할 터였다.
[왜 내 옷에 코를 붙이고 그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지?]
“응?”
아. 나도 모르게 계속 킁킁거리고 있었네.
숲의 향. 머리가 맑아지는 향이라 그런지.
묘하게 중독성 있는 향이었다.
“…미안.”
아무리 그래도 계속 입던 옷인데.
본인이 보는 앞에서 코를 들이밀어. 한참을 킁킁거리는 것은 좀 실례였나 싶어 사과했다.
상쾌한 향이 나는 침을 팔아보자는 사업 아이디어는 일단 기억만 해둬야지.
그녀의 기분이 좋을 때 물어봐야 승낙해줄 확률이 높을 테니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질문한 것이니.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다만, 묘한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니. 별로 그리 이상한 생각까지는 안 했어.”
[용이 섞여서 본래의 모습을 한 우리에게도 발정한다거나….]
“뭐라는 거야.이 녹용은.”
[…녹?]
“아니. 죽어도 그럴 리는 없단 뜻이야.”
인간 형태의모습이면 몰라도. 본래의 모습이라니….
확실히 밝히는데. 나는 수간충이 아니다.
애초에 크기 적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있을 테고.
아니. 크기 문제가 없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흠. 그래? 하지만 그 또한 흥미로운 관측이야.]
“…흥미롭다고?”
인간의 기준으로. 사뭇 요상한 오해를 받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좀 강한 말투로 대꾸했는데.
이어지는 대답은 더 요상하여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할까? …이질감?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맞물리는 듯 맞물리지 않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넌 용과 섞인 이질적인 존재니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동과 사고에도 제법 나의 흥미가 자극당하는 모양이야.]
“….”
자극받는 것도 아니고.
자극이 되는 듯한 모양이라고?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태도.
그러고 보면 갑자기 데려다준다고 말을 꺼냈을 때도.
너무나도 뜬금없이 대뜸 궁금하다며 밀어붙여 왔었지.
검은 굶주림. 그리고 순백의 자애.
용들은 다른 형태만큼이나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원래라면 지금쯤 해부하고 있었겠지만….]
“응? …너 지금 뭐랬냐?”
원래 뭘 하려고 했었다고?
순간 내가 잘 못 들었나 싶어져 되물었다.
[해부 말인가? 아 좀 아쉽다만, 결과적으로 널 관찰하니 재미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군.]
“….”
하지만 이놈의 망할 놈의 것들은 언제나 생긋 웃으며, 네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말해주고는 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안심해. 말했잖아? 개인적 흥미가 없더라도 공격했을 때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고 난 지금 항복 상태잖아?]
“거참 안심되는 말이네.”
[그렇지?]
이 개자식.
당연하게도 전혀 안심할 수 없는 말이었다.
원래는 그냥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해부를 할 생각이었다고?
그 들판에서? 이거 완전 인성 문제 있는 년 아냐?
초면부터 역대급으로 문제가 있는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갑자기 놈이 태워 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공포 영화 속 살인범에 함정에 간단히도 걸려주는 피해자를 욕하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딱 그 짝이 아닌가.
[….]
내가 한창 공포 영화 속 주인공에 빙의한 것처럼 몸에 돋아난 소름을 느끼는 사이.
그녀는다시금 거대한몸을 움츠리고, 비틀며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에서 용으로 변할 때는 부르르 떨며 뼈가 살을 찢고 나오는 듯한 우드득 소리가 나더니. 초록색 빛을 뿜으며 순식간에 용의 상태로 변해 있었다만, 용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정이었다.
처음 목 안에서 에메랄드색의 결정을 꺼내어 밖으로 뱉어냈을 때처럼.
그녀의 연초록색 몸에서 하얀 연기가 나더니 점점 그 거대한 몸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네.”
예상한 것처럼 그녀는 연기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면서도 뒤에서는 덜 녹아내린 용의 잔해가 점점 풍화되어 사라져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용이 그렇게 변해?”
“그건 스스로 확인해 봐.”
이데노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바람이 불고.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한 연기 속에서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숨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본인도 당당하니 딱히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양심을 팔 정도로.
보기에는 좋은 몸이었다.
최근에 인상 깊게 본 가슴들처럼 엄청나게 커다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손에 딱 들어올 정도의 아담한 가슴이었지만, 그 형태가 매우 이뻐 좋았다.
거기에 적당히 키도 크고. 전신에 군살이 없는 늘씬한 몸매를 하고 있다 보니.
마치 유명한 모델이 나체의 상태로 내 앞까지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흐뭇하게 천천히 나신으로 다가오는 고혹스러운 분위기의 미녀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인간!”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평소에 자주 들었던, 아주 안심되는 목소리가 나를 부른 것은.
“다녀온 거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사라졌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 그녀는 자신의 푸르름을 담은 듯한 경쾌한 목소리하고 있는 푸른 용. 필라피스였다.
“아니. 넌 또 왜 거기서 나와?”
“빙글 돌다가 보니 이렇게 된 거다.”
“…그래.”
어찌 놀랄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필라피스인 걸.
나는 이제 정말 그녀가 무엇을 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응?”
그렇게 자신한 것은 바로 그 순간에 깨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필라피스가 어깨에 새하얀 엉덩이….
“인간! 이것 좀 봐라!”
아니. 또 다른 나신의 여자를 짊어진 채,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