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부탁드려용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방금 쓰러트린 짐승보다도 더 크고 강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필라피스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검은 용이 남자를 감싸고 하나가 되어 사라진 직후였다.
“흑….”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떠한 대응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눈물만 흘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이, 이래서는 안 되는 거다….”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도 뭔지 모를 것은 이쪽으로 오고 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본인뿐이었으니까.
더는 울지 않겠다 결심하며, 뻣뻣하게나마 몸을 세우고 잠시 숨을 돌린 필라피스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아둔 물통을 꺼내어 아무렇게나 자신의 몸과 두 손에 쏟아부었다.
시원한 물이 몸에 닿는 감각은 좋았다.
태어나고 자란 섬이 생각날 정도로.
그런다고 피 냄새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깔끔히 몸을 흔들어 물방울들을 털어내자.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
“이상하네? 아무리 찾아도 없잖아? 그 커다란 녀석이 어딜 간 거람?”
마치 늪지대를 연상시키는 듯한 카키색에 가까운 짙은 녹색의 단발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그 여성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절벽 위에서 숲을 내려다보며 신음하고 있었다.
“하아…. 그러니까. 애초에 싸울 때 말렸어야지.”
“으…자, 장난치는 줄 알았죠! ‘슈나’님도 괜찮다고 말릴 생각 안 하셨으면서….”
한참을 숲 쪽을 보던 여성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딘지 모르게 나른한 목소리에 그리 대꾸하며, 다시금 숲 쪽을 들여다보았다.
“으….”
그녀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었다.
얌전하던 암놈이 갑자기 미쳐서 수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죽이려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평소에 수컷을 배 쪽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금술 좋은 녀석이 말이다!
“…혹시 갑자기 이렇게 된 것도 녀석한테 심어둔 ‘조각’ 때문일까요? 흑용제가 먹힌 이후에 깨진 뿔이라 식욕만 늘어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난폭해지기까지 하다니….”
“글쎄…. 그냥 녀석들 습성일 수도 있는 거 아냐? 자연에서는 흔한 일이잖아. 짝짓기한 다음 암컷이 수놈 먹는 거….”
“흠. 그럴까요?”
‘그렇기에는 너무 사이가 좋지 않았던가요?’ …하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금실이 좋아 가끔 작은 수놈이 암컷의 주머니 안에 들어가 머리를 내놓고 있으면 꼭 머리 두 개인 한 놈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아무리 야생동물이라지만,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마지막은 이렇게 살벌하게 돌변하다니…. 무섭네요. 야생의 세계.”
그녀에게는 아직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흥…. 그건 모르지. 너나 나도 그렇게 될지도.”
“엥? 정말요?”
“응? 무슨 상관이야. 평생 짝짓기하고 살 일도 없는데….”
“그, 그건 그렇지만요. 나, 남자가 없으니까. 헤헤….”
여성은 자신이 ‘슈나님’이라 부른 여성의 나른한 말에 그리 답하며 다시금 숲 쪽을…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시선을 돌렸다.
“으…슈나님? 아, 아무래도 역시 수컷을 따라간 거 같습니다.”
“역…시?”
“아니. 자기가 죽일 듯 물어놓고 이렇게 집착할 줄은 저도 몰랐죠!”
계속 싸울까 봐. 사실상 필요가 없는 수컷은 폐기를 겸해 방생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목이 덜렁거릴 정도니 아마 이 근처에서 죽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하아…. 그렇게 또 대충대충…. 사실대로 말하면…비웃음이 장난 아니겠군.”
“그, 그러게요. 노, 놈들도 벼르고 있을 텐데. 헤헤….”
카키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의 등 뒤에서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그녀의 눈꺼풀 속에는 마치 아름다운 루비를 연상케 하는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니까…도발은 하지 말았어야지.”
“아니.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죠! 그 녀석들은 겨우 고블린이었는데. 그것도 관리 못 해서 다 비우고 도망쳤다잖아요! 얼마나 웃겨요!”
“고작 이런 거로 실패…하면 우리도 똑같아. 프레이야한테 안 들키려고 구두쇠 ‘카르네로’의 보물까지 훔쳐 왔는데….”
“그, 그건….”
“하아…. 역시…네 계획을 믿는 게 아니었어.”
“으….”
짙은 녹색의 머리가 추욱 늘어졌다.
붉은 머리를 한 소녀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결국 다시 한번 나른한 한숨을 쉬며,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지. 좀 멀리…찾으러 가는 수밖에.”
“저, 정말요? 결계 밖으로 나가시려고요?”
“어쩔 수 없잖아. 카르네로의 보물은 휴대용이 아니니까. 그리고 수컷을…따라간 거 같다며?”
“그러니까…아마도요?”
“하아….”
“죄, 죄송합니다….”
“뭐어…됐어.”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나온 흑요석 색 뿔을 만지며 일어났다.
등 뒤에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굵은 꼬리가 바짝 서 있었다.
“찾다 못 찾겠으면 그냥 그 악마 놈들부터 쓸어버리면 될 일이니까.”
“이, 이제 계획이 코 앞인데 그건 좀….”
짙은 녹색 머리를 한 여성은 자신의 이마 중앙에 돋아난 뿔을 긁으며 말했다.
그녀의 허리 아래 삐져나온 온몸을 휘감을 정도로 길고 가는 꼬리 역시 곤란하다는 듯 좌우로 흔들리며 떨리고 있었다.
◆
“가만히 좀…있는…거닷!”
그렇게 마주한 녀석은 생각보다도 거대한 녀석이었다.
안에서는…어쩐지 익숙한 힘의 편린이 느껴지고 있다만, 지금 그것이 뭔지 생각해야 할 수 있는 때는 아니겠지.
그보다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울부짖음에 집중한다.
함정을 만들고 남은 줄을 모아 목에 건 순간, 녀석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형적으로 거대한 날개.
익막이 이어진 커다란 손은 생각보다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서 몇 번의 거대한휘적임 끝에 녀석은 줄은 끊어도 자신의 목 이리 저리를 왔다 갔다 하는 작은 불청객을 잡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리하여 녀석도 생각을 바꾼다.
이 넓은 지형을 이용하여 이 작고 성가신 불청객을 뭉개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머리를 들이밀어 절벽을 무너트리고 나무를 꺾고, 바닥에 누워 구르기까지….
“큿….”
덕분에 필라피스의 작은 몸은돌과 나무 사이에 치이고 꺾여서 점점 붉게,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필라피스. 푸른 창천의 여신이자 투쟁과 관련된 근원을 가진 몇 안 되는 용.
“으아아앗!”
“크륵!”
결국, 인중까지 올라선 그녀는 손을 뻗어 녀석의 안구를 한쪽을 긁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크와악─!”
물론. 놈의 빛을 완전히 빼앗을 정도는 아니지만,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수십 분이 넘는 지옥의 로데오 끝에 얻어낸, 작지만 놀라운 성과였고.
동시에 마지막 성과이기도 했다.
“크르르─”
생각보다도 끈질기고 위협적인 불청객에 녀석이 거대한 날개마저 펼치며 반항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윽…!”
이미 지칠 때로 지친 필라피스의 육체는 이 거대한 날갯짓에서 오는 태풍 같은 바람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단단한 벽에 부딪히고 튕겨 나와 차가운 바닥을 구르며 생각했다.
창공의 용이라 불렸던 자신이 거대한 괴물이라고는 하나.
누군가의 날갯짓 때문에 떨어지게 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굴욕적인 경험….
이 모든 것이 그남자 때문이었다.
“새, 생각해보니…왜…. 왜 이 몸이…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다앗!”
덕분에 쫓겨나고. 다리가 부러지고.
그대로 차가운 길바닥에 버림받고. 또 먹을 거로 장난이나 치고….
최근 조금 친절하게 대해주는 시늉이라도 했다고 하나, 생각해보면 본질부터 글러 먹은 남자가 아니던가.
‘암만 생각해도 이 정도면 충분한 거다.’
저 옆에 보이는…. 지긋지긋한 붉은 고깃덩어리와도 같은 고치만 없었더라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재수가…너무 없는 거다.”
하필 이런 곳에 떨어지다니….
적어도 그들이 보이지 않는 먼 곳에는 떨어졌어야.
여태까지 한 노력이 그나마라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크아아─!”
놈은 놈대로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푸른 머리의 소녀를 발견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의 발톱보다도 작을 그 소녀를 확실한 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등 뒤는 절벽. 눈앞에는 아용.
정면으로 달려 피하면 틀림없이 말려들 게 되겠지. 옆으로 피하면….
‘아니. 그보다 다리가 말을….’
이를 씹으며 일어나 보지만, 일어난다고 없는 답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후….”
그럼에도 그녀는 숨을 쉬고 자세를 잡는다.
“…듣고 있지?”
보고 있을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걸어 본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수단은 그것 뿐이기에….
“크르르─”
앞을 보자 붉은 짐승은 그녀에게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달하기까지 몇 초나 걸릴까?
기분 탓이겠지만, 녀석이 히죽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님이 지키라며….”
시야가 전부 붉게 물들 정도로.
자신을 삼키려는 거대한 짐승이 가까워지고 있다.
“근데 언니님…. 지금은 진짜 피스 밖에 없단 말이야….”
필라피스는 손을 올려,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붉은 문양을 긁어내듯 만진다.
찌그러진 철갑에 의해 연약한 피부 찢어지고…속에서 피가 흘러나와, 문양의 형태가 일그러져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언니님…. 언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주먹 휘두르고자 했다.
“…프레이야아아아!!!”
“캬오─!”
주먹을 휘두르며 내지른 그 필사적인 외침이 닿은 걸까?
손등에서 팔뚝까지 이어진 붉은 문양이 뜨거웠다.
동시에 등줄기와 다리에서 푸른 기류가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맴돌았다.
“….”
그리고 필라피스의 먼지만치 작은 주먹이 거대한 붉은 짐승에 맞닿은 그 순간.
짐승의 육체는 마치 단단하고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허공에 멈추어 부서졌다.
“…하아.”
이와 동시에 느껴지는 전능하리만치 완벽한 해방감.
그에 따른 신체적 변화.
“….”
본능적으로 이해한 용과 그러지못한 존재의 사이에서 묘한 정적이 생겼다.
하지만 이해한 입장에서, 시간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마치 한참 쓰지 않은 날갯짓을 기억하는 새처럼.
필라피스는 자연스레 자신의 발에 감도는 푸른 기류로 대기를 차 날아올랐다.
이어지는…허공을 차는 세 번의 발길질.
창천의 여신답게 창공까지 빠르게 상승하여 거꾸로 빙글 돌아 보인 그녀는 그대로 떨어지며, 다시 한번 허공을 발로 차, 눈앞의 짐승 따위는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몸을 돌린 후.
“….”
그대로 들어 올린발꿈치를 찍어 내려 놈의 목뼈를 완벽하게 무너트려 버렸다.
단 한 번으로.
딱 그녀 자신이 예상한 만큼의 완벽한 파괴였다.
머리 바로 아래의 목등뼈를 완벽히 가루로 만들어주었으니.
무거운 육체가 방해되어, 그 전의 작은 녀석처럼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아….”
필라피스가 갑작스레 돌아온 자신의 힘에 자신조차 얼떨떨해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고 있을 때였다.
“아~아~! 갑자기 동족의 힘이 강하게 느껴져서 왔더니이~늦고말았네요!”
절벽 위쪽에서 묘하게 익숙하고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너…에스트녹이냐?”
“어라라, 라? 이게 누구야? 거기 있는 건 프레이야님 댁 충견 필라피스씨 아닌가요?”
늪지대를 연상케 하는 진한 초록 머리를 넘기며, 기생용…에스트녹이 비아냥거렸다.
“누가…뭐라고?”
다른 사람한테 듣는 건 몰라도 언제나 금붕어 똥처럼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녀석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화화…화, 화났어요? 네, 네놈이? 블라슈카님이 프레이야한테 봉인되어 잊어나 본데! 여기 블레슈나님도 계시거든요!”
“야…. 나는…왜 끌어들이는 거야…귀찮아….”
그녀가 가리킨 뒤쪽에서 붉은 형체를 가진 인영이 피곤하다는 듯한 뉘앙스로 걸어 나왔다.
“안녕…오래간만이네? 거기 푸른 녀석….”
“붉은 놈….”
작은 키지만,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간 피처럼 붉은 머리와 꼬리….
확실히 광폭룡의 자매 동생인…투아룡이라 불리는 붉은 용 블레슈나였다.
“…이 몸은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두 놈 모두 빨리 꺼져버려.”
지금의 필라피스에게는 방금 죽인 짐승만큼이나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저저저! 맨날 두들겨 맞고 눈물이나 흘린 주제! 저 말하는 꼬락서니 보세요. 슈나님!”
“하아…뭐 서로 신경 안 쓴다니 됐잖아? 조오금~? 건방지긴 하지만….”
기생용이 요란스레 반응했고 투아룡은 이에 나른하게 대꾸했다.
“지금 우리에겐…중요한 목적이 있고…하암. 졸려라….”
“아, 아니…그, 그건 그렇지만요.”
“…쯧.”
거슬리는 목소리를 계속 귓가에 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필라피스는 몸에 묻은 흙먼지 등을 털며, 다시금 자용과 아용에게로 걸어가다가….
“아…. 근데 역시 열심히 키워온 아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건 좀 가슴이 아프네요.”
“그러게…. 하지만 뭐, 놈들도 동족이 죽였다는데 어쩌겠어? 실험체는 아깝지만….”
그 목소리에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 실험체라고?”
뒤돌아 그리 묻기 위함이었다.
“응. 실험체…우리 건데…흐암. 왜 죽이고 그래? 사냥이…굶주렸으면 평소처럼 바다에 가서 오징어나 잡을 것이지….”
“저 녀석들이…너, 너희 거…라고?”
올려진 푸른 시선에는 감히 그녀조차 상상해본 적 없었던 강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어, 어라라? 저 녀석 뭐, 뭔가 상태가 이상하지 않나요?”
“으음…? 내가 딱히 뭐라고 했던가?”
“….”
필라피스의 등줄기에서 사라졌던 푸른 기류는 다시금 푸르른 빛을내며 날개처럼 뻗어 나와 흉흉한 형태로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음…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블레슈나는 절벽 위에서 그 푸르른 광채를 내리다 보며 짧은 감상을 내비쳤다.
“…간만에 재미는 있네.”
“….”
마침내 싱긋 웃은 그녀가 절벽 아래의 푸른 광채를향해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그 순간.
“안 돼.”
또 다른 이의목소리가 들려와 푸르게 휘몰아치는 필라피스의 어깨를 잡았다.
“이데노아…언니?”
돌려진 푸른 시선 속에는 언젠가 보았던 사슴의 뿔.
초목을 담은 듯한 연한 녹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용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