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외전] 창천과 성염과 하수도의 흡혈귀에용
“이곳이 바로…로덴!”
“야! 그러다 넘어질라! 도시가 도망가냐! 천천히 좀….”
거리도 마을도 온통 순백으로 유명한 성진국 로덴.
현존하는 종교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유일광명교, 그 최초의 성녀가 안식했다는 땅 위로 세워진 도시답게 아름답고 웅장한 도시에 지금, 두 명의 여성이 막 발을 내디딘 참이었다.
“도시야! 진짜 크고 이쁜도시! 맨날 보던 시골 촌마을이랑 다르다고!”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뒤따라오는 일행의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들갑을 떠는 소녀는 자신이 직접 개조한 푸른 수녀 베일을 잡으며, 마치 제 안방인 양 후다닥 마을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니. 알겠으니까. 이 언니 말 좀…하아. 됐다. 그래.”
며칠이나 홀로 두기도 불안하고.
겸사겸사 함께 일을 하던 파트너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데려온것은 좋았으나.
도시에 도착하고 10초도 안 되어 그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한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뛰어가는 막내 자매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꺅!커! 많아! 언니! 언니이! 저거 봐! 빨리 봐봐! 이쁜 가게가 저렇게 많아~!”
“아, 알겠으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라. 이 언니는 지금 마차 때문에 내려갔던 숙취가…윽. 다시 올라오고 있거든…?”
“언니! 언니! 우리 나중에 들리자! 어? 어? 어~?”
“흐, 흔들지 말라고. 우욱…너 내 말 안 듣지 요오…지지배야. 아…머리야…죽겠다.”
계속되는 흔들림에 큰 두통을 느끼며, 마치 사자의 갈색 갈기와도 같은 갈색에 가까운 거친 금발을 뒤로 넘긴 창천교의 수녀.
제인 필드는 지금도 자신의 팔에 매달려 깨방정을 떠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야. 레이디. 우리 놀러 온 거 아니거든? 정신 안 차릴래?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견습인 거 아냐.”
“누, 누가 견습이야! 마, 마지막에 긴장만 안 했어도 여유롭게 합격이었거든!”
“결국, 실전에서 긴장해서 떨어졌잖아. 요 헛똑똑이 견습 꼬맹이야.”
“아! 언니는 왜 맨날 나한테만 그래!”
“그야 우리 집에서 너만 이러니까 이러지. 신성력 하나도 못 쓰는 탈리아도 진작 통과했어 이 지지배야…. 내가 창피해서 다른 수녀님 얼굴도 못 뵈러 가요. 어휴.”
“씨이….”
필드가의 장녀인 제인 필드의 독설에 잠시 걸음을 멈춘 필드가 삼녀.
레이디 필드는 자신의 푸른 수녀 베일의 양옆을 잡아당기며, 눈물을 찔끔하고는 양 볼을 부풀리고 언니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이고….”
뾰로통하니 뒤쫓아 오는 레이디의 모습을 보며 제인은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고.
“…편지?”
“어. 언니가 예전에 알던 사람한테 편지가 와서. 오늘 아침 첫 마차로 올 거라고 답장했으니. 봤다면 분명 여기 길드 근처 공원에서 기다릴 텐데….”
제인은 그리 말하며, 잠시 공원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누군가를 발견한 듯. “아! 저기 있네.” 하고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기사님! 간만이네?”
“아, 제인! 오셨군요.”
공원의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있던 금발의 여성은 제인의 목소리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어라? 그쪽 분은….”
“아, 이쪽은 내 동생. 탈리아가 오늘은 좀 바쁘다고 해서.”
“아…안녕하세요. 레, 레이디라고 합니다.”
소개를 받은 레이디는 잔뜩 긴장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외진 마을에서 오는 수수함에 익숙했고.
그녀는 척 보기에도 화려한 금발에 성숙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양.”
“네, 네에….”
이 다부진 몸의 미인 여기사가 성화교의 새빨간 수녀복에 철갑을 덧대어 만든 화려한 복장이 아니었더라도 레이디는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으리라.
“이건 좀 실례하는 감이 있어 묻기 죄송합니다만, 너무 젊으신 건….”
“아, 아뇨! 저도 이제 좀 있으면 스무 살이에요!”
“그래. 스무 살의 견습이지.”
“누, 누가 견습이야!”
“겨, 견습 이라고요? …수습 사제?”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 얘는 지원은 잘해서 혼자서는 글러 먹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옆에 있으면 1인분 이상은 충분히 하는 애야.”
“그, 그래도 상대는 흡혈귀인데….”
금발의기사는 잠시 말을 흐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알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창천의 사자인 당신이 말씀하시는 거니. 괜찮겠지요.”
“그래.”
“언니. 괜히 폼 잡으면서 주머니에 손 넣진 마. 여기 금연구역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조금 괜히 데려온 거 같긴 해. 빼고 갈까?”
“야!”
“이게 어딜 언니보고 야? 야라고? 너 진짜 죽을래?”
“하하….”
금발의 기사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생긋 웃으며 대처했다.
“뭐 하여튼 그래서? 우린 이게 다인데…. 그쪽은 그걸로 끝인가? 다른 동료들은….”
“아, 먼저 보냈습니다. 편지로 말씀드렸듯. 로드니가 크게 다쳐서요. 한스에게는 그의 보호를 부탁했고요.”
“그렇군….”
제인은 평소 피우던 값싼 연초 대신 속 주머니에서 납작한 철제 포켓 술병을 꺼내어 마셨다.
뚜껑을 열자 레이디가 인상을 쓸 정도로 독한 향. 여전히 마찬가지로 값싼 술이었다.
“정정하시니 다행이네요.”
“뭐 내가 호호 할머니인 줄 알아? 나도 아직 20대야 이거 왜 이래?”
“아, 그런 뜻이 아니에요. 워낙 거칠게 사시니까요.”
“음주 관련의 의미면 그건 그렇지….”
“넌 진짜 이따 두고 보자. 그리고 뭐…내가 아무리 거칠게 살아도 동료를 다 보내고 홀로 복수를 하겠다고 남은 우리 기사님만 하겠어?
“아, 물론 저도 완전 혼자는 아닙니다.”
“맞아. 우리가 왔잖아!”
“아니. 그것도 맞습니다만…실은 여러분 말고도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도움?”
“네. 전에 죽을 뻔했을 때 도와주신 분들입니다. 아, 그분들도 창천교를 믿으시니 어쩌면 아시는 분일지도….”
“호오. 우리 쪽?”
제인의 초록색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우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멀리 떨어진 좁쌀만 한 섬에 있는 본교에서 어제저녁으로 뭘 먹었는지도 들려올 정도인데.”
“그렇긴 하지…. 어쩌면 탈리아가 포교에 성공했을지도? 아,근데 정작 중요한 그 사람들은 어디?”
“여기 계셨는데…기다리는 동안 배고프다고 하셔서….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군. 미안하게도 배가 꽤 고프셨나 보네.”
“어, 언니! 그건 그렇고 이분…저기 성함은….”
“아! 이런 실례를…. 제 이름을 말씀 안 드렸군요? 저는….”
“금 언니님~!”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큰소리를 치며, 땅을 벅차고 뛰어온 것은 그 목소리가 어찌 나도 경쾌한지. 그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였다.
“응?”
“저 사람은…?”
“아. 저분이 오늘 도와주실 분입니다.”
“사람들 아니었어?”
“원래 남자 한 분이 더 계시는데…오늘은 좀 중요한 분과 약속이 있으신 거 같아서요. 아~피스님. 그렇게 뛰다 다치십니다!”
“아햐햣! 금 언니님도 이거 먹어 보는 거다! 엄청 맛있는 거다!”
“어머 감사해요. 피스님. 맛있게 먹을게요. 앗, 근데 입에 이렇게 소스를 묻히셔서…잠시 기다려주세요. 자…됐다! 이제 깨끗하네요.”
“응! 고마운 거다! 금 언니님!”
“….”
‘일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기보다는 천진난만한 아가씨와 그 시녀를 보는 것 같군.’
제인은 그리 생각하며, 달려온 상대를 보았다.
어쩐지 조금 흐릿한 인상의…보는 이를 상쾌하게 하는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으로 빚은 듯한 소녀….
“아, 그러니까…반갑습니다. 이름이 피스라고요?”
“응? 그렇다 피스는 피스인거다!”
“우리…창천교고?”
“…창천교? 아니. 이 몸은 그냥 피스인 거다.”
“아, 피스님은 창천교가 아니셨군요? 같이 다니는 남성분이 창천교의 옷을 입고 다니셔서 피스님도 창천교에 속하신 줄 알았어요. 그렇군요. 무교라…. 그럼 어떠신가요. 이 기회 저희 성화교에 입회하심이….”
“아니. 기사 양반. 종교인 동료분이 있다며, 그러다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아. 그, 그것도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피스님.”
“하하! 이 몸은 괜찮은 거다!”
“자, 잠깐만…탈리아 언니가 있는 유일 광명교의 도시에서 홀로 다니는 창천교 남자라고…?”
그때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조용히 생각하던 레이디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것은….
“호, 혹시 그 남자…거, 검은 머리의 트라키아인이라거나….”
“응? 에이~. 아, 아니…. 설마 진짜…?”
“화, 확실히 검은 머리의 젊은 남성분이시긴 한데요. 역시 아시는 분이신가요?”
“진짜? 그 자식 설마 이름이 자….”
레이디의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려던 그 순간이었다.
“응? 지금 우리 주인님 말하는 거다?”
“주, 주인님?”
“주인님이라면…그 남자가 당신의?”
“그런 거다! 피스의 주인님은 주인님인 거시다!”
순박한 얼굴로 말하는 피스의 모습에 레이디와 제인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자신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확신했다.
‘노예 목걸이도 없는데. 이런 애한테 주인님이라 부르게 하다니…. 어디 사는 뭐 하는 변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응. 걔는 아니겠네….”
“그 녀석은 아니겠군….”
“응? 주인님 말하는 게 아닌 거다?”
“피스님. 주, 주인님이라니요? 어, 어라? 원래 그렇게 부르셨던가?”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하는 여기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은 제인은 가볍게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하하. 하긴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그렇지. 그 빈대가 아직도 탈리아한테 빌붙고 살겠냐?”
“아니. 난 그 녀석이라면…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탈리아 언니 성격도 성격이고.”
“그건 그렇게 말하니…부정하기 어렵다만….”
“뭐!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은 아니긴 하지!”
“그렇지? 하하! 하, 하….”
“아하하하, 하아….”
차오르는 찝찝한마음을 억누르며 두 사람은 웃었다.
다 속으로 생각하는 남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잘못된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건 그렇고 정보는 정확한 건가?”
“…흡혈귀가 이 도시 지하에 있다는 정보 말씀이십니까? 목격담이나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지요.”
“아니. 암만 그래도 종교 국가잖아? 그게 가능해…?”
“그들도 바쁜 업무가 있고 현재로서는 빈민가의 신원미상자를 대상으로 한 피해만 발생하고 있으니까요. 지하로 출입하는 허가증은 받아두었습니다만…확인은 직접 할 필요가 있겠지요.”
“좋아. 뒤져서 안 나오면 그때 생각하자고. 없으면 며칠 밤 정도는 묶을 생각으로 왔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필요는 없어. 편지에도 적었듯이 우리도 찾고 있던 녀석일 가능성이 크니까.”
“확실히 편지 내용에 적혀있는 정황을 보면 상처 범위나 위치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만….”
“후…. 몰랐지 그 공동묘지에 흡혈귀가 둘이나 매장이 되어있을 줄은….”
“네? 볼리도라님. 맙소사! 그 정도 되는 흡혈귀가 두, 둘이었다고요?”
“아…저기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는 안전…이 아니고 퇴치를 했거든요! 네에….”
“휴…그렇군요.”
“아가씨들! 오래 기다렸소이다. 여기 특제 샌드위치 4개요!”
“와! 밥인 거다!”
“허허! 말하지 않아도 곱빼기는 이쪽이군. 그래!”
“아, 일단 밥부터 드시고 움직이죠. …잠시만요.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길드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하수도의 도면과 증거 자료 펼쳐 이야기하던 그녀들은 서둘러 자료를 정리하며 식사를 받았다.
“와…역시 도시인가 봐. 언니. 외다리 드워프 아저씨가 서빙하고 있어….”
“균형감각이 좋으시네. 음. 이거 맛 괜찮은데? 그나저나 당신은 먹을 수 있나? 우리 오기 전에 뭐 좀 먹고 있었다며?”
“이 몸은 아직도 배가 꼬르륵인 거시다!”
“제, 제거 좀 드실래요? 저는 이렇게 큰 거 다 못 먹어서….”
“와 진짜? 핑크 인간 좋은 거다!”
“피, 핑크…?”
식사는 훌륭했다. 식사 후, 그들은 바로 지하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마치기 위해 일어섰다.
“응? 1쿠퍼가 딱 모자라네. 아…실버 쪼개기 싫은데. 야 레이디. 아무래도 네 행운의 동전이 빛을 발할 순간이 온 거 같은데. 어찌 생각하니?”
“이, 이건 절대 안 돼!”
“아, 알았어. 너도 참…. 어디서 그런 이상한 구린내 나는 이상한 동전 하나를 주워와서는 맨날 벅벅 닦기나 하고…그런 거 다 미신이야.”
“남이사!”
식당을 나온 그들이 다음으로 향할 곳은도구점이었다.
당연히 흡혈귀 대책을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