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8화 〉새로운 퀘스트에용 (128/190)



〈 128화 〉새로운 퀘스트에용

안쪽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일까?
오린이 문고리를 조금 당긴 순간, 작게 열린 문틈으로 찬 바람이 흘러나와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뒤따라가듯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들려오는 ‘파르륵─’ 하고 종이들이 펼쳐지며 휘날리는 듯한 소리.

“…성녀님? 손님 모셔왔습니다.”
“….”

오린은 열린 틈 사이로 다시금 방 안에 있는 여성을 불러보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
“….”

그와 눈이 맞았다.그는 나에게 면목이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허리를 숙이고 발치에 떨어져나온 서류 몇 장을 대충 주워 담은 후.
다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우리도 가지.”
“…응.”

아용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
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와 걷는 동안 지쳐 생긴 열기를 조금씩 덜어내 주었다.

“시원한데?”
“거기다가 제법 깔끔하군.”

나의 허리 사이로 고개를 쓱 내민 아용이가 말했다.

“확실히….”

나도 아용이가 바라본 방 한쪽을 보며 동의하였다.
이견이 나올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 앞에 펼쳐진 넓은 공간은 마치 편집적으로 불필요한 물건은 용서치 않은 듯이 물건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용으로 보이는 소파와책상을 제외하면….

꽤 살풍경한 풍경이었다.
역시 성녀답게 무욕한 것일까?

“성녀님.”

 뒤쪽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오린의 목소리에 성녀님의 집무실을 멋대로 감상하며,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내디딘다.

“거기 무슨 일 있어요?”
“아, 자용님. 그게…너무 놀라지 마십쇼.”

아니. …경고라고?
대체 뭔가 싶어 찝찝한 맘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려 문짝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이어지는 풍경은….

“…음?”
“응? 그대?”

한차례경고를 들었음에도 짧은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추고  정도였다.

“…이건.”

당황스럽기는  아용이 조차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척 보기에도 깔끔해 보였던 반대편과 다르게.
이쪽은 전쟁이라도 난 듯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흰 종이가 바닥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난리군.”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책상 위에 있어야  잉크병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러다니며 굴러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하얀 대리석 바닥과 몇 장의 종이.
그리고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유일광명교의 문양이 들어간 하얀 카펫은 검은 잉크로 얼룩져, 내가 문을  이곳이 유일광명교 성녀 전하의 집무실인지, 아니면  유일광명교 세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게다가정작  성녀님이라는 사람은….

“그분 혹시 돌아가신 거 아니죠?”
“하아…. 부끄럽게도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

아용이가 우스워 죽겠다는  숨죽여 웃었고, 덕분에 오린의 주름살은 더욱 자글자글하게 깊어졌다.

“성녀님. 손님 모시고 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저렇게 내면의 화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듯이 목소리를 짜내는 오린의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대놓고 악마 취급하는 아용이와 대화할 때도 저러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렇지만 나는 그의 그러한 분노가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이런 쪽에 신앙이 없는 나라도 한 종교의 성녀라 불리는 여자가 아침부터 대자로 뻗어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모습은 좀…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냥 잠을 청할 뿐이라면, 그녀가 전날에 무엇을 했는지,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내가 쉽사리 판단하는 것은 오만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으나….

다른 건  제쳐주더라도 침실과 소파….
하다못해 본인 옆에 있는 의자까지 제쳐놓고 굳이 딱딱한 책상 위에서 제 발에 치인 서류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해 줄  없었다.

“지, 진짜로 무슨  있었던  아니죠?”
“네….”
“푸훕…크큭.”
“불경하게 감히 네가…아니. 후우…. 아니지. 자용님. 급하게 모시고 온 주제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습니다만…네….”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오린을 보며, 나는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성녀님을 보았다.

이만한 사람이 들어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생각지 않고 본다면, 그야말로광명교의 성녀라 불릴만한생김새를 한 소녀였다.

마치 서리라도 내려앉은  길게 이어진 하얀 속눈썹
뒤로 길게 이어진 백 은발에 조각처럼 희고 아름다움을 넘어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은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인간의 그것이 아닌, 인형이나 숨이 거두어진 사람의 그것처럼 보여서….

“프레이야…?”

나도 모르게 그리 말하게 될 정도로….
눈앞의 여성은 천상에서 처음 보았던, 그녀 자신이 모시는 신과 꼭 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그냥 닮은 수준이 아니라 좀 더 작고 꼬리와 머리 옆의 작은 날개만 없다 뿐이지.
그야말로 프레이야가  땅에 내려와 누워있는 수준이어서….

보는 이가 포근해질 정도로 모든 이를 감싸줄 것 같던 그녀의 넓은 가슴과 비교하여 처참하리만치 삭막한  평야만 없었다면 정말로 프레이야가 정체를 숨기고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준이었다.

“…헛!”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책상 위에 있던 여자가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뜬 것은.

아…. 다른 사람이긴 하구나.

눈을 뜬 순간, 그렇게 느낄 정도로 인상적인 자줏빛 눈동자가 멀리서도 확연하게 시선을 끈다.

“…으응? 바, 방금…누군가가 불경한 생각을   같은데….”
“….”
“헛소리 마시고 일어나기나 하시지요. 손님이 와계십니다.”
“응? 츄릅…. 오, 오린경? 에흑…. 그리고…에흠.”

여성은 고개를 돌려 문 앞쪽에 나와 있는 나와 아용이를 보더니, 책상에 등을 붙인 그 상태에서 작게 기침을 하고는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검은 머리…남자….”
“아,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신가….”

막 잠에서  그녀는 척 듣기에도 나른한 목소리에 반쯤 감긴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다듬으며, 뛰어내리듯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그렇군. 오린경 그러면 저분이…?”

그녀는 여전히 반쯤 감긴 눈으로 서서

“네. 저분이 당신이 찾던  자입니다.”
“흠…그렇군요. 저 사람이 ‘엄마’가 말했던….”
“엄마…?”
“성녀님…. 여신님을 그러한 형태로 부르는 것은 자중하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남들 앞에서는 의식 좀 해주십시오….  그래도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성녀님이시지 않습니까.”
“오린경. 그대는  본녀 앞에서만 엄하다 못해 신랄하군.”
“성녀님. 그렇게 억울하다고 말씀하시고 싶거든. 제발 입에 묻은 침부터 닦고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응? 읍…아, 미안하오. 본녀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추태를…츄릅.”

그녀는 간단히 소매를 올려 입 주변을 훔치는 것으로 다시금 오린이 자신의 이마를 치게 만들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에게 걸어왔다.

“그랬군. 그랬어. 하여튼 그대가 우리의 용사님이시라는 말이군? 그리고  옆은….”
“아, 이 몸은 신경 쓰지 말도록. 이곳에서는 되도록 조용히 있어 주기로 약속했으니….”

아용이가 말했다. 언제? 누구랑? 싶어 쳐다보니. 녀석은 가볍게 황금색 눈동자를 위로 한  올려 보이며, 머리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 날갯짓을 해 보였다.
용들끼리 오면서 대화한 것인가? 어쩐지 계속 조용하더라니….

“물론. 그렇다고 이 남자에게 개수작은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

방금 자신이  말도 잊어버렸는지 대놓고 도발하는 아용이를 보며, 뒤쪽에 있던 오린이 한 걸음 걸어왔으나, 눈앞의 성녀는 손을 벌려 그를 막아서고는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자는 사실….”
“아, 괜찮소. 오린경도 실례되는 행동은 자제하도록 하시게.”

아용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하는 오린을 달래듯 말하는 성녀는 연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어머니의친우분이신 것 같으니 말일세.”
“어, 어머니? 설마 진짜?”

딸이라고? 진짜  악신의…?

생김새부터가 리틀 프레이야 같은 여성이 자꾸 저리 말하니 슬슬 진심인가 싶어서 물었다.
아니. 실제로 본인도 어미 같은 얼굴에 모성으로 가득  듯한 뉘앙스로 말하기는 했지만….

어라? 근데 프레이야가 본인의 입으로 용 수컷들이  죽어서 자손을 남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그녀는 아무리 그래도 용의 피를 가진 자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아니. 물론. 친딸은 아니오.”

그리고 본인도 쉽게 이를 인정했다.

“본녀는 길거리 고아 출신이거든.”
“…성녀님.”
“뭐 어떤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어나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일세. 이대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본녀의 머릿속으로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있지. 고향 친구들은 벼락맞을 운이라 하더군. 아하하!”

성녀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가슴을  펴며 웃어 보였다.
평소의 호탕함이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하여튼 그래서 의지하고 감사하는 마음에 마음속 어머니라 여기고 있다오. 이상한 얘긴가?”
“그렇습니다. 어떤 성녀가 자신이 모시는 신을 엄마라 부른단 말입니까.”
“그, 그렇지만 엄마가 그래도 된다고 말씀하셨는걸?”
“…거짓말 마십쇼.”
“어허!  사람아 성녀는 본녀가 성녀인데. 자네가 여신님의 목소리를 듣는 자던가? 그렇다면 내일부터 출근할 때 치마 입고 집무실에 짱박혀, 서류 보시게나.”
“치마 입으면 ‘출근’해도 되는 겁니까? 처자식을 못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만….”
“뭐야? 본녀가 말실수하였군. 출근은 마시게 치마는입으시고.”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노예 상인도 그렇게는 안 부릴 겁니다.”
“하하. 우리 모두 성스러운 어머니 사랑에 목마른 신앙의 노예가 아닌가.”
“저기….”

성녀는 오린과 대화하다 다시금 나에게 시선을 두며 미안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아차차. 내 정신을 봐. 손님을 계속  있게 했구려. 자! 어서 앉으시게 오린경? 앞에 있는 사제에게 차를 좀 부탁해주겠나? 넉 잔으로 해서 자네도 앉지 그런가?”
“저는 괜찮습니다. 바로 석 잔 부탁해오지요.”
“아 저희도 괜찮습니다.”
“그럼…혼자서라도 드시겠습니까?”
“물론. 꿀 잔뜩 타서 달달하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간 오린은 나가기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제발….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마시고요. 힘들게 모셔오신 분입니다.”
“경은 본녀를  믿나? 이래 보여도 본녀가 성녀인데. 그래도 성녀의 직속 호위를 담당하는 자가 신앙이 너무 땅에 떨어진  아닌가?”
“외람되옵니다만, 성녀님…. 신앙이라는 것이 모시는 주가 아닌 성녀로 결정되었다면 진작에 개종했사옵니다.”
“어허! 불경한….”

그러한 성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듯.
오린은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콧방귀까지 껴대며 문을 닫고 나갔다.

“흠…. 이런저런. 우리 오린 사제가 부끄러운 행동을 보였구려.”
“아뇨….”

다른 건 다 두고.
오린이 갑자기 상의 탈의 후 집무실 중앙에서 춤을 췄어도 그녀가 책상 위에서 퍼질러 자던 모습만 한가 싶었지만…굳이 이러한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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